사진 속의 한 아이가 색칠공부를 가지고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다.  내 기억속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사진 속 그 아이는 미술을 좋아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가족 살림살이에 늘 가정형편이 빠듯했던 엄마는 내게 커서 먹고 살 걱정 없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울엄마는 화가는 배고픈 직업이라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내가 좋아했던 미술은 그저 초.중.고등학교 때 예체능 과목 그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사실 ’먹고 살 걱정 없는’ 직업이란 원래부터 없었지만 먹고 살아가려면 돈을 벌어야 했기에 나는 독립해서 바라던 직업을 갖고 드디어 돈을 벌게 되었다.  내 한 입 걱정없게 되니 가슴 저편에 묵혀두었던 미술에 대한 애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그림 배워서 대학 진학할 것도 아닌데 화실을 알아보니 수강료가 너무 비쌌다.   그래서 그 때 유명했던 포털에서 취미로 그림그리는 클럽을 찾아내 다시 그림을 시작하게 됐다.  그냥 그림그리는 것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라 구체적인 교육과정에 따라 배우지는 않았지만 소묘에서부터 수채화, 아크릴, 파스텔 등 여러가지 미술재료들을 다뤄보았다. 

그런데 회사 이전하고, 결혼하고,아이낳고 이런저런 이유들로 붓을 놓은지 벌써 횟수로 6년이 넘었다.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만 바라보고 아이에게 얽매어 살다보니 다시 무언가 해보고 싶은 열정이 이 책과 만나게 해주었다.「정물화 스케치 바이블」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대부분 나중에 색으로 덧칠될 부분이라 정물을 그릴 때는 정밀하게 스케치 하는 작업이 굳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책장을 몇 장 넘기는 순간 굳이 정물화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드로잉 도구들을 비롯해서 아주 기초적인 연필잡는 것부터 다양한 기법을 설명하는 1,2장의 분량이 책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서 정물화 스케치를 위한 책이라고 한정하지 않아도 다른 그림을 그릴 때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술책들이 크기도 크고 일반제본을 택해서 그림그릴때 참고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 책은 두꺼운 양장본인데다가 스프링 제본으로 되어있고 크기(A5)도 알맞아서 이젤에 그림을 그리면서 같이 두고 봐도 책장 넘어가는데 따로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저자인 데이비드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에 따라 그림을 그려보려고 큰맘  먹고 책을 펼쳤는데 예시로 나온 그림들 수준에 기가 죽어 나처럼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 같아서 이제 막 그림에 발 담그려 하는 분들보다는 한단계 더 나아가고자 하는 분들께 권하고 싶다.  5장 정물화 작품 갤러리에서 잔뜩 영감을 받고 6장 드로잉 주제에서 한 번 그려봄직한 사진들을 보고 나니책 제목처럼 정물화 스케치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책 내용에 탄력받아 정물화 스케치를 한 장 그려서 함께 남겨보려고 발버둥쳤지만 역시 그동안의 공백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지 의욕만 앞서서 세워둔 이젤에는 흰종이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아이가 크고 꾸준히 연습해서 반나절만이라도 나 혼자만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꼭 멋진 정물 스케치를 그려서 완성하고 싶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양상을 말한다. 장미의 모습, 붉은 입술, 날렵한 손발이 아니라 늠름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정열을 말한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향하는 마음을 떨쳐버리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세의 청년보다 육십세의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햇수를 거듭하는 것 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뒷부분도 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이미  다 나왔고 뒷부분은 부연설명에 불과하니까.

책을 읽고나서 문득 드는 생각은 내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나 하는 자문이었다. 

주인공인 요코야마 겐지, 미타 소이치로, 구로가와 치에의 모습은 그야말로 이 시대의 청춘들의 모습이다.

뒷골목 청춘의 대표주자 요코야마는 짝짖기 파티 업체를 운영하는 자칭 청년 실업가이고,

하류층을 전전하다 뛰어난 암기력을 기반으로 미타그룹에 입성하게 된 미타는 타칭 상류층 청춘의 대표주자다.

무엇 하나 정의되지 않는 인생에서 젊음이라는 무기는 과연 어느정도의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일까?

이들의 좌충우돌 청춘 방랑기는 미타가 상류층 대표주자라고 생각하는 요코야마의 실수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남들이 철이 일찍 들었다고 할 정도로 이득없는 모험 따위는 한 적이 없다.

예전같았으면 그저 화려하게 사는 것이 목표인 요코야마나와 같은 부류는 아주 경멸했을것이고,

요즘처럼 비정규직시대에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곳에서 회사에 충실하지 못한 미타에게는

벼랑끝으로 내몰 정도의 혹독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리라. 

그래서인지 그들이 어쩌면 가질지도 모를 10억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때때로 무모하게 느껴진다.

한밤중의 행진이라는 제목도 그런 이유로 붙여졌던게 아니었을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한밤중에 걷는다고만 생각해도 조심스러운데 행진이라니..

젊음은 때로 무모함을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 시켜 놓는다.

10억을 향해 질주하는 그들의 모험심과 상상력이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 또한 젊기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그저 함께 공통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 자체가 좋았던 것이었으리라.

뭔가 가슴에 남는 구절이 꼭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일까?

삼십년동안 길러진 나의 독서 편력은 어쩌지 못해 그저 유쾌한 책들은 좋은 점수 주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