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10월 19일 여의도 차량 질주 사건이 있던 날 고등학생이었던 남편의 친구는 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엄청난 사상자가 났던 것으로 봐서 내 기억에도 그날의 사건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야 정상일텐데 나는 이 책을 읽기전까지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책을 읽고 남편과 사형수 용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우연히 남편의 친구가 현장에서 모든 것을 목격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그날의 참상이 어떠했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용제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버지와 시각장애인인 어머니 외에 모두 여덟가족이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지만 여느 대가족에서 느낄 수 있는 가족의 사랑을 그는 맛보지 못한 채 자라났다.  어머니는 자주 집을 나갔고 그 때마다 아버지는 실성한 사람처럼 변해가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부모가 이런 상태이니 아이들이 집에서 응당 느껴야 할 사랑이나 행복과 같은 감정들을 용제는 알지 못했다.  사랑이나 행복은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감정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가 못한다면 형제들끼리라도 서로 위로하며 지내야 하겠지만 큰 형은 간질병을 앓고 있었고 용제 자신도 어머니의 시각장애를 물려받아 거의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생활하다 보니 형제들의 삶도 팍팍하기만 했다.  그나마 온전한 둘째 형이 용제의 모든 일을 감싸주고 받아주는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저 받아주는 것만으로는 사랑에 대한 결핍이 해결되지 않았다.  성인으로 자라기도 전에 가시밭길로 내몰렸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편지들은 담담한 그의 문체와는 달리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다.  안타깝게도 그는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고 그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다. 

어릴 때 기본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성인으로 무리없이 섞이기 위한 사회규범이나 도덕 규칙 등도 가정에서 먼저 배우게 된다.  그는 그런 모든 기회를 거의 가져보지 못했다.  그의 사회적 박탈감은 시각장애 때문에 받은 설움보다 가정에 기초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을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맹학교를 방화하거나 남의 물건이나 돈을 강탈하는 것을 밥먹듯이 했으며, 자신에게 모진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복수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모습은 걸어다니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또한 시각장애는 행복한 가정에 실패한 그가 다시 사회인으로 성공하는 것까지도 발목을 잡았다.  친구의 소개든 작은 형의 소개든 소개 받는 곳마다 그의 장애를 문제삼아 내쫓았고 공부하는 학생에도 속하지 못하고 일하는 어른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기 정체성의 혼란까지 자초하게 만들며 그를 자살의 궁지까지 내몰았다.  작은 형이 소개시켜 준 공장주인의 자동차 키를 몰래 복사해 두었던 그는 불행한 삶의 끈을  끊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자동차를 훔쳐 여의도광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그 사건으로 21살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내가 사형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데드맨 워킹이라는 영화를 보고서부터이다.  수잔 서렌던과 숀펜 주연의 영화로 지나친 감상주의에 젖지 않고 사형수의 마음의 변화를 직설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사형제도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용제는 진실로 신과 만나 복음을 전파받아 자신의 죄를 뉘우쳤을까?  솔직히 나는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입장이라 용제의 마지막 선행이라고 보여졌던 제소자들의 손발씻기나 청소, 설거지 등의 봉사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행적을 낱낱히 들여다보면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 할 필요도 없어진다.  숀펜처럼 강간하고 칼부림 하지 않았다 뿐이지 그도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죽게 만들었다.  물론 그의 어린시절의 얘기는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웠지만 그의 불우한 어린시절 때문에 그가 저지른 모든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용제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성경에 보면 '죄 없는 사람이 간음한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말이 있다.  그러자 아무도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했다고 한다.  나도 어릴 때 호기심으로 문구점에서 물건을 가져오기도 하고 엄마에게 거짓말로 용돈을 타기도 했다.  죄는 인간에게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죄값에 경중이 없다는 성경말씀대로 하자면 그런 내가 용제의 죄가 무겁다고 해서 그를 사형장으로 보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 말씀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조성애 수녀처럼 그를 대할 수는 없다.  데드맨 워킹에서 수녀 역할을 했던 수잔도 천사가 되기는 쉽지만 성자가 되기는 어렵다는 대사를 하며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녀인 그녀도 그럴 정도였으니 일반인은 나는 말 할 것도 없다.  내가 만약 그 광장에서 다친 사람들의 가족이었다면 나는 평생 그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가 다치면 아이의 부주의를 먼저 탓하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아이가 다친 것부터 살펴주고 나중에 야단을 치는 부모가 있다.  수많은 육아서의 가르침대로 나도 후자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거의 대부분 전자처럼 행동하게 된다.  아이가 다친 것이 마음이 아프면서도 그렇게 주의를 주는데도 엄마말을 듣지 않는 아이의 부주의가 속상해 매번 '그러니까 엄마말 안들으니까 그렇게 되지!' 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받았을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명한 부모라면 부주의를 탓하기 전에 먼저 아이의 아픔을 보듬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용제는 그런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해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타인의 아픔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성애 수녀님을 만나 변화된 그의 모습을 보면 부모와 가정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용제보다 죽음의 문에 한발자국씩 다다르는지도 모른 채 오늘도 수없이 많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나를 더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용제의 편지글 사이사이 조성애 수녀님의 글을 보며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 한 번쯤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