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날 때 우리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작년에 갔던 곳을 기억하지 못하는 딸아이를 보면 문자를 인지하면서부터 기억이 시작된다는 것도 개인차가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이전의 상황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기억하는 것은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사진과 어머니의 경험담을 토대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들뿐이다. 대학 때 읽었던 <태백산맥>과 <아리랑> 이후, 오랜만에 조정래 선생님의 책을 읽는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단편으로 썼던 글 중에서 여덟 편을 모아 새로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어쨌든 나는 1977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채 태어났다. 아들을 바랐던 할머니의 성화에 나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비단 나만의 슬픔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남산만 한 배 모양이 틀림없이 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난산 끝에 태어난 아이가 중요한 것을 달고 나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허망했을까. 무튼 나의 어린 시절은 건설공사 현장소장을 맡았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 학교를 다니기 전까지 '집'이라고 불리는 곳을 갖지 못했다. 아마도 곱씹을 일상이 없었기 때문에 기억이 소멸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것은 위험한 공사현장에서 일했던 아버지가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가장이 성하지 못했을 때 가정이 풍비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중학생이 되었을때 우리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진화론>에 등장하는 동호는 그런 사회 속에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다.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살아남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해 '새로운' 개체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 진심으로 동호를 도왔다면 동호는 달라졌을까? 진길이가 말한 것처럼 존 게 존 세상이니까 얼렁뚱땅 비비고 넘어가는 것이 세상살이일까.
어머니가 시집 왔을 때 아버지 밑으로 돌봐야 할 식구가 다섯이었다. 지금이야 한 자녀 가족이 많지만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셋은 기본이었다. 그 중 으뜸은 맏이다. 먼저 태어나 당연히 늘어가는 나이야 그렇다 치고, 부모가 없을때에는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권력의 달콤함 뒤에는 책임이 있다. 부모의 봉양과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이다. 아버지는 맏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다섯 형제 뒷바라지를 하셨다. <한, 그 그늘의 자리>에 경희는 고아다. 자신도 어리면서 유일한 피붙이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은 때때로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구현된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 형제를 뒷바라지 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했다. 당연하다고 느꼈던 책임감은 누군가에게 피맺힌 한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었다. 그나마 말이 많아지는 때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들어왔을 때였는데 그럴 때 우리들은 어김없이 우리방으로 내뺀다. 아버지가 지방에 가셨다가 며칠 집에 있는 날이 싫었다. 아버지는 뉴스만 봤다. 어머니와 있을 때에는 맘껏 볼 수 있었던 드라마, 쇼, 오락 프로그램은 절대 볼수 없었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어머니는 TV 리모컨 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TV가 있었던 큰방에 옹기종기 모여 우리들이 다수결로 하자며 언성을 높이면 마지못해 리모컨을 넘겨주었다. 우리들은 프로그램이 끝나면 약속이나 한 듯 각자 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마술의 손>에는 시골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오고 TV로 변화된 마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머리맡에서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난 옛날이야기가 어떻게 구닥다리로 전락하는지 무심한 듯 보여준다. 지금은 손안에 tv를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다. 거실에, 큰방에 TV 한대를 놓고 싸우던 때는 그나마 정겹다. 길을 걸으면서도 눈은 하염없이 손바닥만 한 휴대 기기에 저당 잡혀있다. 우리는 정말 좀 더 나은 세상에 사는 것일까.
아버지가 사우디 파견근무를 마치고 우리 가족이 뒤늦게 자리 잡은 집 옆에는 사택이 있었다. 우리 집 지대보다 높은 곳에 있어 크기도 어마어마했지만 사택 안에 있는 은행나무 때문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름에는 매미가 밤낮없이 울어대고, 가을에 바람이 좀 분다 치면 은행잎이 우리집 마당에 우수수 쏟아졌다. 쓸고 뒤돌아서면 수북이 쌓이는 은행나무 잎 때문에 태풍 부는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어머니는 태풍에 은행나무가 부러졌으면 하셨다. 물론 그 나무가 우리 집을 향해 부러지면 노발대발하셨겠지만. <외면하는 벽>은 305호에 사는 한 할아버지의 죽음이 불러온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도 그 때는 윗집, 아랫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살았으니 다행이다. 요즘에는 시체가 완전히 부패하여 못 알아볼 지경이 되어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 아닌가. 시체를 이고 살던 깔고 자던 나만 모르면 그만인 세상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비둘기>의 간수는 잡혔을까, <우리들의 흔적> 속 미스터 송은 이전과 좀 다른 삶을 살아갈까, <진화론> 동호는 감옥에서 생을 마치게 되었을까, <미운 오리 새끼>의 창규는 꿈을 이루었을까 등 무엇인가 아직 진행형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작가연보까지 샅샅이 읽고 혹시 편집자의 소감이 있을 것 같아 책의 마지막 장까지 훑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해가 바뀌고 세상도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소설 속 내용은 '진행형'이라는 자각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만만치 않은 두께를 반나절 만에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착착 입에 감기는 정겨운 사투리가 한몫 했다. 가독성은 둘째치고 어휘로는 표현할 수 없는 특유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외국에도 번역되어 출간될 예정이라는데 아마 이 맛을 그대로 느끼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인문학 붐을 타고 작년부터 짬을 내어 고전 읽기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문학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해본다. 6월의 책으로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