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다보니 육아서를 많이 읽는 편이다.  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의 성장과 함께 나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다. 물론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육아서가 아니다.  '어른'이 어른다워지는 책이며, 왜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일상에서 허우적대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좌절을 다룰 줄 모르는 어른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흔들릴 수 밖에 없다.  내가 먼저 바로 서는 것이 가장 좋은 육아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타인에 대해 완벽한 책임감을 경험하고 싶거나 사랑하는 법, 가장 깊이 서로 엮이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자식을 가져보라고 했다.  '완벽한 책임감'의 무게는 한 아이의 인생을 좌지우지 한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정보와 나의 가치관 충돌을 이겨내지 못하고  때때로 선택 불능자로 내몰리는 상황을 자주 연출하고 삶이란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한다.  좌절하고 자학할때가 늘어날수록 내 선택에 자신없는, 늘 한발자국 물러서는, 책임지고 싶지 않은 어른아이로의 퇴행이 일어난다.  매일 뜻밖의 상황으로 치닫는 일상들 속에서 숨이 막히고 갈림길에서 주저하고 있을때면 그럴듯했던 어른의 모습은 사라지고 정신적 공황상태에 직면한 심약한 어른 아이의 모습을 보며 '도대체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궁금했던 물음에 정확한 대답과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10장 나를 다그치는 삶에서 벗어나기'였다.  카톡. 카톡.  오늘도 어김없이 울리는 메세지들. 핸드폰에 주르륵 올라와 있는 카페나 밴드 알림메세지. 최저가 쇼핑알림. 기념일 미리 알림음. 스케줄러에 저장된 오늘의 할일 목록들. 쉴틈 없이 몰아치는 강제적인 일정들에서 벗어나 도망치고 싶었던 적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 스스로 '잘하려는' 긴장 때문에 지속적인 흥분 상태에 놓여있다고 진단했다.  과도한 요구를 '당한다'고 생각했는데 나 스스로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내 가정을 한숨만 새어 나오게 하고 나의 에너지를 빨아먹는 곳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며, 나 자신은 그것을 지금껏 깨닫지 못했다는 점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처방전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처방전은 간단하다.  나를 돌보고 가끔은 디지털 세계에 안녕을 고하는 것.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알고 있었지만 아직 실천하지 못했던 일일뿐 별다른 것이 없다고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나 쉬운 방법조차 시도해 보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어른아이에 머물러 정신없이 방황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며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었던 <미움받을 용기>가 주는 메세지와 일맥 상통하면서도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있어 거침이 없다.  결국 그들의 메세지는 자신에게 책임지는 삶을 살아라는 것 아닌가.  그동안 선택불능자로, 책임전가자로 머물러 있었던 어른들에게는 지금 바로 나를 변화시킬 따끔한 충고가 필요하기에 작가의 문제인식과 충고에 감사를 드린다.  아이들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좋은 엄마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고 칭찬받거나 사랑받기 위해 아이들 생활에 일희일비했었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이 책으로 나는 아이들과 나를 동일시하거나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함께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고 아이들은 그들의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상적인 일상에서 과제를 완수하고 보살피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나도 편한 것 대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가면서도 아들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던 "인생은 아름다워".  지금은 모두가 자유를 누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각자 개인에게는 "hell"이 되어버린 현실앞에 현실을 동화같이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  그리고 이제 막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8살 여자아이 엘사가 찾아가는 할머니의 이야기. 

 사실 소설책이라도 6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금방 읽기는 어려워 책 읽기가 어려웠다. 8살이지만 어른 뺨치는 언변과 이해력의 소유자 엘사는 김수현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조숙한 어린이가 연상되어 작위적인 듯 느껴졌다.  게다가 나는 엘사의 아빠처럼 스타워즈를 싫어하고 모험과 판타지는 질색하는 사람이라 할머니와 엘사의 깰락말락나라의 여섯개 왕국 이야기는 뜬구름 처럼 선뜻 다가서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혀 맥락이 예측되지 않는 말들이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진짜 모습을 드러내며 엘사가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놀라울정도로 탄탄하게 전개된다.

  용서와 화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지만 때때로 사람들은 결말보다 전개와 갈등에 더욱 집중한다.  꿈꾸거나 도전하는것에 집중한 나머지 용서와 화해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해도 된다고 마음 속 깊숙이 숨겨두고 다른 모습으로 바쁘게 살아간다.  그렇게 잊은 줄 잊혀진 줄 알았던 문제는 나의 열정이 힘에 부칠때 스물스물 기어 올라와 몸과 정신을 다 옭아맨다.  그래서 슬플때는 온전히 슬퍼하고, 아플때는 또 아파하며,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면 충분히 나 자신과 이야기 해봐야 한다.  용서와 화해는 타인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할수 있는 것이다.  내 삶이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릴때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엘사의 할머니는 우리들에게도 편지를 보내주었다.  어린아이와 같이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라고 그냥 말하라고. 

  믿음이 있어야 해.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믿음이 있어야 동화를 이해할 수 있다. 

  "뭘 믿는진 중요하지 않고 다만 뭐라도 믿는게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거면 차라리 전부 다 잊어버리는 게 낫지."               - 441p

  엘사가 할머니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할머니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늘 암호로 이야기하듯 마음을 숨기고 나를 온전히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세상에는 슈퍼 히어로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차라리 전부 잊어버리는 것을 선택했던 내게도 할머니의 메세지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한다.  나 자신이 누군가의 슈퍼 히어로가 될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의 전작 [오베라는 남자]는 읽어보지 않았다.  까칠한 남자가 점점 변해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이미 어디서 보고 들었던 뻔한 이야기 같아서.  그러나 작년에 [오베라는 남자]가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감동코드 만으로는 압도적인 독자층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를 읽고 나니 편견을 깨고 전작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왕성기분. 명왕성기분이란 어떤것 일까. 고구마 먹은 기분이라거나 사이다 마신 기분이라면 금방 이해가 됐을텐데 명왕성 기분이라니. 명왕성은 2006년 8월 76년만에 행성의 지위를 상실한 행성이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라고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이제는 아니라니 어릴때였으면 공부해야 할 내용이 줄어들어서 좋았겠지만 뭔가 섭섭한 느낌이 든다.

명왕성이 행성이라는 분류에서 쫓겨난 이유는 크기가 달의 3분의 2 정도로 작고,자신의 궤도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란다.

  타지에 살다보면 고향에 대한 추억의 크기가 달라진다.  영국에 살고 있는 저자가 느끼는 추억의 무게도 한국에서와는 다를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해 우리말인지도 모르는 말들. 책속에 소개된 생소한 우리말들은 그래서인지 명왕성 기분을 느끼게 한다.  자신을 찾아내어 행성으로 분류했던 것도 다시 제외되었던 것도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생각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더 쓸쓸한 기분이다.  내게는 소중한 추억이었던 일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던 것처럼 그저 그런 사실이 되는 기분. 

  한국이라는 나라의 궤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 시나브로 정착했지만 여전히 우리말을 사랑하는 저자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첫사랑, 어릴때 살았던 동네, 살아온 날만큼 익숙하게 먹었던 음식들. 그녀만의 추억의 더께를 되작거리다 보면 들렁 들렁 말랑해진 나의 추억과 마주하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내 느껴지는 쓸쓸함 뒤에 조그맣게 속삭이는 말들. '그래 너도 괜찮구나. 나도 괜찮아.' 하고.

   
  나도 알지 못하고 한번도 써보지 못한 우리말들을 아이에게 말해주니 사투리냐고 촌스럽게 느껴진다고 한다. 요즘은 유치원생들도 한자인증시험을 보는 세상인데 우리말을 소개해주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책들도 나왔으면 좋겠다. 데데하다 느럭느럭 시들부들처럼 느낌으로 뜻이 비슷하게 전해져오는 말들도 있지만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생경한 단어들이었기 때문에 기억하기 좋게 어원을 설명해주는 책이라면 더욱 좋겠다.  책 속에 등장하는 예쁜 우리말을 책 뒤에 다시 한번 실어주어 찾아 보기 쉬웠고 쇼비님의 일러스트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