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작품집이다. 개인적으로 근작인 '발칸의 장미를 내게주었네' 보다는 밀도높은 감정이 약했지만 정미경씨 소설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았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꽉채워진 상징들로 가득해서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을 읽는 기분이었다. 수첩 한구석에 적어놓고 외우도록 읽고 싶은 문장이 너무 많았다. 청춘의 날은 가고 남은건 색이 바랜 추억과 애정이 아닌 무관심뿐인 관계들로 외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쓸쓸함과 어떤 것으로도 채울수 없는 공허에 시달리며 일상의 반복에 무생물처럼 굳어진 사람들. 불치병에 걸린 딸을 돌보다 빚투성이가 돼버린 가장과 그런 남편을 증오하는 아내를 그린 '성스러운 봄'과 표제적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가장 돋보였던 단편이다. 딸을 일찍 포기해버린 것처럼 보이는 남편에게 아내는 딸을 잃은 고통을 삭히기위해 증오를 쏟아붓지만 결국 둘 다 슬픔을 이기려 애쓰고 있을뿐이라는 걸 마지막에 가서야 알수있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나서야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미망인이 나오는 표제작은 여운이 오래갔다. 남편의 유작을 모아 책을 내자는 출판사 제의는 살림살이가 넉넉치못한 형편에서 유혹적인 제안이었지만 남편의 컴퓨터에 남은 기록에서 딴 여자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읽고난뒤 원고를 넘기느냐 이대로 놔두느냐를 두고 아내의 고민은 깊어진다. 배신감과 분노, 그 여자가 누구인가 등 복잡한 갈등을 겪는 동안 알수없는 피부병은 더해만 가고 삶은 무겁게 짓눌러온다. 담담하면서도 축약미가 뛰어난 감정묘사는 몇번을 읽어도 감탄스러웠다. 정미경만의 작품세계에 푹빠져 읽었지만 너무나 다들 아프고 고통스러운 감정들이라서 울지않기위해 애써야했다.

 

엘리자베스1세의 탄생부터 어린시절, 단명한 배다른 남동생과 이복언니 뒤를 이어 여왕의 자리에 오른 삶을 시간순으로 정리해주는 책이다. 소설이 아니라 사실기록만 모은 평전이라 딱딱한 편이었지만 극적인 드라마화로 형상화된 영화나 소설속 여왕의 생애가 아닌 진짜 삶을 엿본다는 사실때문에 끝까지 읽을수 있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한적 없는 처녀여왕이라는 점과 장수했던 왕이라는 점에서 호사가들이 금박을 입힌 환상을 만들어냈을뿐 진짜 여왕은 그렇게 아름답지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도 할수없다. 사실기록만 분석한 책이라 그런지 이 책만 읽고 여왕을 다시본다면 재미없는 삶을 산 여왕이라는 이미지가 생길정도다. 어린시절 성추행 당한 기록에서부터 헨리왕의 서녀로 추락할수있는 위치때문에 늘 혈통문제를 조심스럽게 넘어갔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한번도 표현한적 없다는 일화를 통해 여왕의 심리를 유추해보는 즐거움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유럽의 변방이었던 영국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여왕이라지만 그다지 현명한 혜안을 갖고있다는 점도 발견하기어려웠다. 늘 골칫거리였던 스코틀랜드를 왜 복속시키지않고 내버려뒀으며 메리여왕을 수십년 감금한채 처리를 머뭇거린 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물론 정치기반도 약한 여왕이 군주로서의 자리를 위협하는 수만가지 음모와 귀족들의 위협을 이기고 살아남았던건 사실이지만 탁월한 정치감각은 눈씻고 찾아봐도 발견이 어려웠다. 오히려 그때 좀더 밀어부쳤다면 영국에 이익이었을텐데 왜 중도포기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다. 작가말대로 여왕의 최대강점이었던 균형감각이 아니었다면 간신과 음모에 휩쓸려 일찌감치 권좌에서 사라졌을것이다. 여왕의 생애에서 가장 큰 두가지 이슈는 정략결혼으로 영국의 안위를 보장받으려했던 오랜기간의 시도였고 또 하나가 스크틀랜드 메리여왕과의 악연이다. 그 두가지를 비롯해 많은 점을 새로 알수있게 해준 책이다.

 

전작 '하늘꽃'도 좋았고 '영원한 제국'으로 열렬한 팬이 된 이인화님 책이라 서슴없이 읽었다. 하비로는 소설 배경이 되는 중국의 어느 거리 이름이다. 1930년대 상해는 불법과 전 세계 인종과 문화가 다 모여있던 곳이었고 마약이 성행하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곳에서 경찰로 일하고 있는 준상은 조국을 잃은 동포들 속에서도 외따로 지내던중 얼마전 클럽에서 만난 동포청년이 끔찍하게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그 사건은 상하이 넥타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살인자의 기록과 맞물려 흐르다가 전혀 다른 사건으로 변하고 오리무중에 빠지면서 준상과 독자를 점점 미로같은 상황속에 몰아넣고 있다. 살인사건을 쫓으면서도 소설 분위기는 시종 몽롱했다. 마치 준상도 마약에 찌든 상해 사람들처럼 약을 한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다. 물론 약을 한건아니고 기억손상을 입은 준상의 특별한 과거 사건때문이고 작가의 의도에 따라 조성된 분위기지만 색다른 느낌에 휩싸여 책을 읽어나갔다. 솔직히 말하면 중반까지는 만족스러웠고 기대감이 컸는데 문제의 핵심이 뜬금없이 종교문제로 이어지면서 사이비집단이 나오기때문에 100% 만족하기는 어려웠다. 작가님 특유의 분위기만큼은 너무 좋았고 추리소설같은 구성도 흡입력있었지만 아쉬움도 남았던 편이다. 막판에 살인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부분은 기대이상이었다. 피해자와 범인이 같은 사람일수 있다는 발상은 참신했다. 어둠속에 살짝 윤곽을 드러내는 실루엣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절대 본모습을 보여주지않는 실체를 찾아 상처투성이가 된 사내가 모든 힘을 다해 달려가는 과정, 그리고 진실을 둘러싼 혼돈과 혼란, 이 모든게 잘 버무려져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인화님 소설은 이인화님 다우면서도 약간 색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