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프트
솔직히 말하면 나는 판타지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헤리포터> 시리즈도 영화가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보기는 했지만 그것을 즐겨 본 것보다는 일의 한 영역으로 보았을 뿐이고, <반지의 제왕>은 그나마 영화로도 아예 끝까지 볼 적이 없다. 겨우 <나니아 연대기>, <판의 미로>에 재미를 조금 붙였다고 하지만 판타지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비한다면 나는 정말로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세계 3대 판타지 소설이 <반지의 제왕><나니아 연대기>그리고 이 책 기프트의 저자가 쓴 <어스시의 마법사>라는 것도 이참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책 [기프트]는 어슐러.K.르귄의
<서부 해안 연대기>시리즈 중 첫 번째 이야기이다.
[비탄에 빠지는 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묘한 일이다. 방법을 익혀야 한다. 애도하는 동안에는 함께할 사람을 찾을 수 있지만 일찌감치 터져나온 눈물이 마른 후, 죽은 사람을 칭찬하고 좋은 시절을 기억하는 순간이 끝난 후, 애도의 노래를 부르고 무덤이 닫힌 후의 비탄에는 함께할 사람이 없다. 그것은 홀로 지고 가야 할 짐이다. 어떻게 견디는가는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여긴다.(page223-224)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색깔은 회색이다. 또는 짙은 스모그가 낀 아침의 한적한 길과 그 길에서 마주치는 형체를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낯선 사람의 느낌. 늦은 가을 저녁의 갑자기 기온이 내려간 을씨년스러움. 도무지 따뜻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이 이야기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종일 붙들고 읽어내려 간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전체적으로 하면을 뒤엎던 갈색톤의 명암이 계속 따라다님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을 수 없었다.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이 이런 재미가 있었던 건가? 심오한 세계는 보이지 않지만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즐겁고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 부럽고 또 부러울 따름이다.
기프트(Gift) 곧 선물은 재능이라는 의미라는 것이야 너무 쉽고 간단하게 풀 수 있는 퍼즐이다. 태어날 때 이미 기프트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주인공 오렉의 아버지 카녹. 오렉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인 그라이와 그녀의 부모들. 그리고 기프트를 가지지 못 한 주인공 오렉과 오렉의 어머니 멜이 있다.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거나 또는 그들이 ‘부름’이라 말하는 동물과의 소통 능력을 가진 사람들과 기프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싶지만 사실은 가지지 못 한 오렉의 이야기가 두 개의 커다란 길을 이루며 만나거나 헤어지고 있다.
고지대 종족인 이들과 달리 오렉의 엄마 멜은 저지대의 사람이고 오렉에게 글을 가르쳐 오렉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기프트의 힘을 조절할 능력이 없다고 두려워하는 오렉은 아버지에게 부탁해 눈을 가리고 장님처럼 생활한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멜도 카녹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을 때 오렉은 오랜 친구였던 그레이와 혼인을 하고 고지대를 떠나 저지대로 내려간다. 오렉이 가졌던 그 기프트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가 가공할 파괴력을 두려워해 스스로 눈을 가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오렉은 애초에 그런 능력이 없었음을 알게 된다. 그에겐 파괴의 천성보다는 일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마치, 거대한 힘을 가진 양 오렉의 눈을 가렸던 아버지 카녹과의 화해 후 오렉은 아버지의 유산을 아버지의 조수였던 알록에게 모두 이양한다. 자신보다 오히려 아버지의 능력을 더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알록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오렉은 전형적인 착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떠나온 고지대 그리고 그들이 새롭게 터전을 삼고 살아갈 세상의 이야기들이 펼쳐질 2편 <보이스>의 내용이 새삼 궁금해진다.
이 책을 덮으면서 아~이래서 사람들이 판타지 소설에 그렇게 열광하는 구나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로운 영역을 만난 기쁨과 재미를 동시에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