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를 끝내고 아들이 3주 만에 집에 왔다. 못 본 사이 이젠 제법 청년의 테가 난다. 하지만 쏙 빠진 볼 살이 어미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들 오면 먹인다고 지난번 영주 사촌시누이 결혼식 때 작은집에서 얻어다가 냉동실에 꽁꽁 얼려두었던 문어를 꺼내 데쳐놓았는데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나간 녀석은 우리 부부가 저녁을 모두 먹은 뒤에 친구 녀석과 함께 나타났다. 손엔 라면을 사들고 엄마를 위해선 달달한 초코칲도 사들고 온 녀석. 후루룩 소리를 내가며 라면을 끓여선 참 맛있게도 먹는다. 학교 앞 식당에서 사 먹는 라면은 집에서 먹는 그 라면 맛이 아니라고 너스레를 떠는 녀석이 맘을 짠하게 한다. 식사 후 잠시 동안의 환담시간. 마저 읽느라 책상에 올려놓은 [점선뎐]을 보던 아들이 “점선이 얘기네”라며 웃는다.
“엄마가 원래 여성잡지는 안 사보잖니, 그런데 예전에 거의 10년을 정기구독 하던 잡지가 있었어.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인테리어 잡지지. 거기에 이 아줌마 얘기가 실렸던 거야. 그 때는 이 아줌마가 주인공이 아니고 남편이 주인공이었어. 어떤 날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떤 미친 여자가 찻길을 걸어가고 있더라는 거야. 그런데 그 여자를 대학모임에서 만났대.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외박을 한 날이 있었대. 그랬더니 이 아줌마가 글쎄 남편이 자는 침대의 이불을 들치고 고무호스를 넣은 거야. 그러곤 그 끝을 수도꼭지에 연결해서는 확 틀어버렸대. 그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잠든 남편의 얼굴로 고무호스를 대고 물을 뿜어 버렸댄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아들은 뭐 그런 여자가 다 있지? 그런 여잔 너무 무서워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편이 외박을 하고 난 다음날 선배라는 사람까지 데리고 집에 왔대. 부부싸움을 하는데 소변이 마렵더래. 그런데 화장실에 다녀오면 자기의 분노가 반감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는 거야. 그래서 이 아줌마는 그냥 선채로 소변을 눠 버렸대. 엄마는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가 안 잊어져 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아줌마와 이 아줌마 아저씨의 인터뷰 기사를 기억 한단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의 아들은 진짜 화끈한 아줌마였네 라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이 책에도 실려 있다. 20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오래전의 이야기를 내가 기억하고 있다. 그것도 잡지책에 실려 있었던 에피소드의 한 토막을. 그만큼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김점선 이라는 화가의 색깔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죽하면 한동안 나와 공부를 같이 하던 아이 중에 점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애가 있었는데 하도 화가 김점선을 이야기 하는 바람에 그 녀석이 인터넷에서 찾은 자료를 다 가지고 왔으려고......하지만,
끝끝내 내가 그녀의 그림과 색체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난 그녀가 조금 덜 유명한 사람이었음 하고 바랬었다. 그래서 아주 독특한 빛깔을 가진 여자를 내가 알고 있노라는 기쁨을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아주 우연하게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내가 무명의 화가라고 알고 싶어 했던 그 김점선 보다 아주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한 10년쯤은 정말로 좋아하고 그리고 한 10년쯤은 그녀를 잊고 살다가 얼마 전 그녀의 타계소식을 인터넷에서 접했었다.
참 이상도 하지. 그녀의 타계소식이 내 오롯한 새댁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리고 한동안을 절절한 그리움으로 서성이게 했으니 말이다.
[점선뎐]을 읽으며 처음 내가 좋아했던 김점선도 또 유명해진 후 잊었던 김점선도 모두다 진실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그녀를 진짜 예술가로 좋아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할만한 사람을 좋아했었다는 것에 나름대로 흡족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면 지나친 자만이라고 내게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좋아하던 시절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김점선의 이야기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잊고 살던 시절동안 그녀가 살았던 시간들을 모두 만날 수 있어서 이 책은 반갑고 눈물겹고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황홀하다.
체 게바라, 빈 라덴, 김삿갓, 홍경래, 임꺽정, 아르튀르 랭보, 오스카 와일드 같은 사람들이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같이 연결하면 화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항, 저항하는 정신으로 보면 같은 종류의 인간들이다.(중략)
창의성의 밑바닥에는 저항과 반항이 기저를 이룰 수도 있다. 기존의 것들에 대한 저항. 기존의 사고체계에 대한 반항.(중략)
예술가란 얼핏 보면 멋지고 훌륭해 보이기도 하지만 정신의 바닥은 반항과 저항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이 마피아, 범죄자, 노숙자와 예술가가 일치하는 면이다. 기존의 예술을 완전히 긍정하면 새로운 예술이 생기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정신세계를 존중만 한다면 새로운 창작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반항. 저항아들이다. 그러나 기존의 밥과 질서, 정신적인 전통을 하찮게 여기는 점은 같다.(page 224-225-나는 저항한다, 그리고 작업 한다-중 )
책을 읽으면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그녀의 숨소리와 목소리와 행동거지가 모두 생생하게 다가온다. 짐짓 예술가란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하고 어떤 정신으로 예술작업을 해야 하는지 책갈피마다 글의 행간마다에서 알려주고 짚어준다. 그녀가 발전하기 위해 목표로 설정했던 ‘잠과 그림뿐인 세계’는 게으르고 구태의연한 내 정신에게 번쩍 눈을 뜨게 하는 죽비가 되어 사정없이 내 어깨를 내려쳤다.
그녀의 그 뜨거운 창작정신에서 잠깐 비껴 앉아 그녀의 가족사는 그야말로 내겐 부러움 그 자체였다. 김점선의 어머님과 아버님은 어떤 부모가 참 된 부모인지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우리 부모님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는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 주신 것만으로도 우리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 교육에 깨어있었던 그녀의 양친에 대한 부러움은 감출 수 없다. 그리고 김점선의 자식에 대한 교육 방법도 너무 부러운 부분이다. 공부를 하지 말라는 엄마.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엄마. 그럼에도 죽어라 학원 보내고 과외 시키는 엄마의 자식들보다 아들을 더 잘 자랄 수 있도록 했던 그녀의 교육법과 세상을 달리 바라보는 그 개안이 너무 부러웠다.
암은 밖에서 보기엔 어마어마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병으로 알려진 암에 걸려봄으로써 세상의 끝을 억지로 탐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섭지는 않았다.(중략)
암은 병균이 감염된 게 아니다. 내 몸속에서 스스로 돋아난 종유석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암조차도 사랑한다. 내 삶의 궤적인 것이다. 피곤할 때 풀지 않은 피로가 쌓인 석회석이고, 굶고 또 굶으면서 손상된 내 내장 속에 천천히 새겨진 암벽화다. 수십 년에 걸쳐서 몸의 소리를 무시한, 야망과 과욕. 인문주의적인 편식에서 나온 독들이 저절로 만들어낸 퇴적층이다.(중략)
암은 그래서 축복이다. 늘 늘어져서 일상 속에서 권태를 느끼던 나 같은 인간에게 번쩍 하고 하늘에서 번개를 내리꽂은 것이다. 그런 현상을 나는 즐긴다.(중략) 모든 대추나무는 언젠가는 다 죽는다(중략) 살 때도 매일 같이 수양하면서 담백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죽음도 삶의 마지막 부분일 뿐 삶과 동떨어진 괴물이 아니다. 그저 초지일관해야 한다.(page287-289-암에 걸리기도 전에 걱정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중)
이 부분을 읽으며 드디어 나는 울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위암으로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기도 했고 환갑을 갓 넘긴 아직은 젊다고 해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김점선의 운명이 가슴 아파서 눈물을 쏟았다.
지금도 이 부분을 옮겨 적으면서 죽음에 대한 이토록 사실적이고 의연한 고찰에 또 한 번 눈물이 난다.
삶은 참으로 찬란한 것이다. 김점선의 말대로 황홀한 그 자체다. 거기에 우리 같은 인간들은 감히 엄두도 내보지 못 할 천제성과 당참과 자유로움을 맘껏 펼쳤던 김점선 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 나는 그녀가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이라서 좋다. 무엇보다 자신의 현실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행복의 달인이어서 존경스럽다. 가난도 부도 명예도 그리고 병도 모두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는 경지. 내가 걷고 싶어 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책을 만나고 그리고 내 앞에 떠오르는 흰 길을 새삼스럽게 다시 바라본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