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적은 말한다.

저자 구본진은 1965년생이다. 그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지적제산권법 박사과정을 마치고 검사를 거쳐 현재 법무연수원 교수로 재직 중이라는 것은 책을 읽는 동안 지워두기로 한다.

이십년 이상의 수집 이력을 쌓았다는 것. 역사 인물에 관심이 많아 항일 운동가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던 중 글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지금껏 수집한 작품만 1천여 점. 항일 운동가 4백여 명, 친일인사 1백5십여 명의 글씨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 글씨 수집과 함께 필적학 지식을 쌓아 이 분야에선 독보적이라는 것. 처음 제목에서 받은 무겁고 어려운 이미지를 감수하면서 이 책을 선택한 이유 중 한 가지도 저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내용의 전문성과 간결한 문체도 중요했지만 이런 책을 엮어낼 수 있었던 저자의 열정과 부지런함과 자신의 컬렉션에 대한 애정에 내내 놀라워했다.

누구는 이렇게도 살고 누구는 저렇게도 산다. 다들 나름대로는 참 열심히 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 들 속에 끼었을 때 나는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할까 늘 걱정하고 궁금해 하며 산다. 그런 뜻에서 저자의 삶은 정말로 부러움 자체다. 그의 사생활이 어떤지는 알고 싶지 않다. 어차피 사람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러나 책에 스며있는 그의 일상은 다른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열정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필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배움보다 먼저 저자의 삶의 태도를 먼저 배우고자 했다.

예전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만 해도 펜글씨 자격증이라는 게 있었다. 타자와 더불어 상고를 다니는 학생들에겐 꼭 필요한 자격증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펜글씨 교본을 사다가 글씨 연습을 했던 생각이 난다. 파란색 파이롯트나 모나미 잉크를 펜촉에 묻혀 꼭꼭 눌러쓰던 펜글씨. 잉크를 채워서 쓰는 만년필을 사용했고 학교에선 대부분 모나미 볼펜을 심만 갈아가며 쓰기도 했지만 볼펜과 다르게 만년필이나 펜촉에 대한 기억은 ‘느리게 또박또박’ 이다.

한동안은 컴퓨터에 밀려서 손 글씨는 영영 사라질 것 같았는데 요즈음 들어서 다시 손 글씨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걸까? 글씨를 잘 쓰기 위해 글씨를 배우고 연습하는 사람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좋은 현상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글씨체가 중요한 사람들. 그들은 글씨에 인격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논술이나 이력서 작성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은 무심했던 나의 글씨와 글씨 쓰는 습관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볼 기회가 되었다.

필적으로 인물을 평가할 수 있다니 너무 신기하다. 저자는 필적을 이용해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글씨 크기, 글씨 형태, 곧은 글씨와 굽은 글씨, 글자 간격, 행 간격, 규칙성, 글씨 속도, 정돈성 등의 항목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분석 항목을 종합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항일운동가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작고, 정사각형 형태로 반듯하며, 유연하지 못하고, 각지고 힘찬 것이 많다. 글자 간격은 좁고, 행 간격은 넓으며, 규칙성이 두드러진다. 반면 친일파의 전형적인 글씨체는 크고, 좁고, 길며, 유연하고, 아래로 길게 뻗치는 경우가 많다. 글자 간격이 넓고, 행 간격은 좁으며 규칙성은 떨어진다. 일부 친일파는 극도로 불안정한 필치를 보인다.(page 93)

3장의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에서 김구선생과 친일파 이완용의 비교는 눈 여겨 볼만하다. 이완용의 글씨를 보았을 때 참 잘 쓴 글씨라는 생각을 했다. 저자도 이완용의 글씨가 못 쓴 글씨라는 말은 안 한다. 간찰에 나타나는 이완용의 글씨는 밑으로 뻗치게 썼다고 한다. 따라서 이완용의 성격을 독창적이고 즉흥적이며 감정적인 성격이었을 거라고 진단하며, 행 간격이 좁아서 옆 행의 글씨에 거의 닿아있으므로 남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글씨의 속도도 빠르다고 했는데 이는 글씨 연습을 많이 했음을 의미하지만 판단이 매우 빠른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미술시장에서 130X30센티미터인 반절지를 기준으로 김구 선생의 글씨는 1천만 원을 호가하는 반면 이완용의 글씨는 30만원에서 5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친일파에 대한 단죄가 이런 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4장의 ‘자결로 항거한 항일지사의 글씨’편에선 그동안 국사를 공부하면서도 몰랐던 조선의 기개 있는 선비들을 만날 수 있다. 조병세, 황현, 이성렬, 이만도, 정재건, 김석진 같은 분들의 이름을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의미가 된다.

반면, 제 5장 ‘친일파와 일본 침략자들의 글씨’ 편에 저자는 ‘지금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가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이인직에 대한 부분을 옮겨본다.

친일문학의 선구자라고도 불리는 그는 한국 최초의 시소설 [혈의 누]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당대에 이름 있는 유학자이자 일본어에도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완용의 비서로 일하면서 한일합방의 막후에서 크게 기여한 적극적인 친일파였다. 경학원에 소속되어 유림들을 일제에 협력시키는 회유책을 맡기도 했다. 일본 신도의 일파인 천리교 신자였고 장례식도 일본식으로 치렀다 한다.(page172)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이라는 저자의 말에 백번 동감하게 된다. 이인직의 글씨는 규각이 없어 매우 부드럽지만 바르고 졸박함은 약하고 멋부림이 강해 균제미가 떨어진다고 했다. 바름보다는 교묘함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말로 이인직의 글씨를 평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성공하는 사람은 글씨체가 다르다’는 100% 저자의 말에 수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글씨를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었다.

“사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page71)라는 포세신의 글을 인용해 필적으로 ‘항일’과 ‘친일’을 구분할 수 있었던 정황과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필적을 연구하면서 바로 잡게 된 잘못 알려진 역사의 부분들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부분이다.

서여기인(書如基人)-“글씨가 곧 그 사람”이라는 뜻으로 글씨에서 그 사람의 성품과 학식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생김새, 표정, 행동, 걸음걸이, 말투 등 전체는 하나의 아이덴티티로서 따로 분리될 수 없다. 글씨도 마찬가지이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사람은 행동도 모나지 않게 하고 글씨도 통통하게 쓴다. 각진 얼굴을 가진 사람은 행동이 튀고 글씨고 뾰족뾰족하게 쓰는 경향이 있다. 좀 더 완고하게 표현하면 인격이 형편없는 사람에게선 품격 있는 글씨가 나오기 힘들다. 따라서 품격 있는 글씨를 쓰려면 먼저 인격을 갖추는 게 급선무일지도 모른다.(page56)

필적에 따른 항일과 친일의 구분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글씨를 따라가며 한바탕 역사공부를 했다. 필적학이라는 낯선 학문과의 조우라 걱정했던 처음 마음과는 달리 책을 덮으면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문 한 개를 더 발견한 느낌이다. 엄청난 양의 알찬 정보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대한 애정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책이어서 매우 의미 있는 독서였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

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에.(page 109)

어떤 사람은 3천권의 책을 읽었다고 했다. 아니, 3천권은 책을 읽어야한다고 했던 것도 같다. ‘책을 읽었다’고 하는 기억은 나는 영영 도달해볼 수 없을런지 모를 정점에 도달한 자에 대한 질투와 시기와 경이로움의 조각이라면 ‘책을 읽어야한다고 했다’에 대한 기억은 아직은 끝장이 나지 않은 길 위에 나를 세워두고 스스로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자기 모색의 편린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붙잡고 있는 그것이 어느 것이든 3천이라는 숫자만으로도 나는 버겁다. 지난해에도 모든 인간관계를 끊다시피 하고 책에만 매달렸건만 100이라는 숫자를 간신히 넘겼다. 그리고 올 해 혹시라도 나태해질까봐 자신을 채근해보건만 이런 식으로 가다간 작년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조바심이 벌써부터 든다. 일 년에 100권씩 읽어도 3천권이면 30년을 책을 끼고 살아야한다. 나처럼 빨리 읽기가 안 되는 사람에겐 몇 배의 노력을 요구하는 숫자가 아닌가? 더군다나 그동안 읽은 책들이 대부분 건조한 실용서나 기초학문 분야라 내가 책과 만나면 기대했던 말랑말랑한 감성과 번뜩이는 창의성과 조금 멀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기라곤 없는 건조한 마음으로는 시를 쓸 수도 시를 읽을 수도 없어 답답하다. 그럴 때 내가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가 소설을 읽는 것이다. 주목받는 여성 작가의 소설들. 특히, 내가 내 감정의 화분에 물을 주듯 읽는 것이 바로 공지영의 소설들이다.

소설책은 잘 사질 않는다. 아주 나쁜 습관인 걸 알지만, 그동안 돈 들여서 산 소설책이라야 민음사의 세계문학 정도라 우리나라의 소설가들에겐 절대적으로 나쁜 독자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소설책은 책대여점을 하는 친구네서 빌려다 읽는다. 하지만, 가끔 읽고 난 뒤에 불현듯 책을 구입하기도 하는데 공지영의 소설이 바로 그런 책이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같은 경우 빌려다 본 책을 열권이나 구입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이 책 ‘사랑한 후에 오는 것들’도 물론 친구네 가게서 빌려온 책이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누군가에게도 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간만에 마음에 물기가 도는 느낌이다.

공지영의 소설은 묘한 힘이 있다. 한 번 읽고 쉽게 마음에서 내려놓게 하지 않는 이끌림.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녀의 소설 속의 부르조아적 분위기에 입을 삐쭉이면서도 다시 또 빼놓고 읽지 않은 그녀의 새로운 소설이 뭐 없을까 책꽂이를 기웃거리게 된다.

공지영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인텔리 계층이다. ‘봉순언니’는 식모였다고 이야기할런지 모르겠지만 공지영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쨌든 인텔리에 부르조아 쪽으로 추가 많이 기울어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바로 이 점이 공지영의 소설에 자꾸 눈이 가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부르조아도 아니고 인텔리로 살아보지도 못 했기 때문이겠지. 주인공 홍이가 사랑했던 또 다른 주인공 준고가 가난해서 아르바이트를 다섯 개나 애야 하는 사람이었고 사랑하는 여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사 줄 수 없었다고 하는데도 공지영이 만들어내는 가난은 찬란하며 남루하지 않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출판사가 부도직전이라 직원들을 모두 내보낸 사무실에서 자장면을 시켜먹고 아버지와 둘이 교정을 보았다고 하는데 홍의 가난도 역시 낭만적으로만 느껴진다.

......아니라고 해도, 무심하다고 해도, 나는 한국의 여자였다. 나를 점령해 버렸던 그 분노는 이제 와 생각하면 결국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지만 나 자신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다. 그와 나 자신 속에 우리가, 그의 조국 일본과 내 조국 한국의 긴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인이나 영국인 애인과 헤어질 때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그 말, 너희 일본 사람들...... 그건 종결되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마침내 화해하지도 못한 긴긴 역사의 그늘이었다. 그 그늘이 새처럼 커다란 날개를 펴고 결국 그와 나 사이에 둥지를 틀어버린 것이었다. (중략) 참으로 비겁하고 훌륭한 명분이었다.(page206)

일본 여자와 한국 남자의 사랑인 아버지의 첫사랑과. 한국 여자와 일본 남자의 사랑인 홍이와 준고의 사랑을 씨실과 날실로 공지영이 짜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무엇인가 좀 더 굵고 두꺼운 바탕을 깔고 있었을 거라는 것을 작가의 후기에서 알아볼 수 있음에도 막상 소설 안에선 당위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미안하게도 오래간만에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은 소설이었노라는 작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홍과 주노의 재회보다는 민준의 쓸쓸한 퇴장이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내가 한국사람이기 때문인 것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츠지 히토나리는 에쿠니 가오리와 공동 작업 한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의 이름으로 출판 된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궁금하다. 과연 그가 공지영과의작업에서는 어떤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과는 어떻게 다른 색깔을 하고 있으려는지 그의 책도 꼭 읽어봐야겠다.

 

스마트 파워.

이 책은 미국의 전략문제연구소(CSIS) 스마트파워위원회가 2007년에 낸 보고서 A smarter, More Secure America: Report of the CSIS Commission on Smart Power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는 국제 문제에 관한 전략적 식견과 정책 대안을 정부, 구제기구, 민간 영역, 그리고 시민사회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제공하는, 초당적이고 독립적인 비영리기구다.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서, 미래를 전망하고 변화를 예측하여 정책 구상을 개발하고자 연구하고 분석한다.

서문과 서론을 거쳐 전체 3부로 되어있는 보고서는 미국의 쇠퇴하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 진단한 1부. 다섯 개의 세부 파트로 나뉘어졌으며 보고서의 핵심인 스마트 파워 전략에 대한 설명인 2부와 미국 정부의 신뢰회복을 위한 방안들을 제안한 3부로 나뉘어져 있다.

‘특정 사회관계에서 저항이나 저항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하더라도 그 자신의 의지를 수행할 개연성과 ’행동을 실천에 옮기는 한 사람 또는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저항을 받더라도 그 자신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해서 갖는 기회.‘가 베버가 정리한 권력의 개념이다. 권력의 토대가 되는 자원으로 인구. 영토. 천연자원. 경제 규모. 군사력. 정치적 안정 등을 말한다면 국제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드 파워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통해 자국의 뜻을 관철시켜 타국의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권력의 행사 방식이 명령, 강압, 경제력이라는 수단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권력이라고 볼 수 있다.

소프트 파워는 외교, 문화, 가치, 이념 등을 통해 타국이 자국의 목표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게 만드는 권력을 의미한다. 하드파워보다 모호하고 암묵적으로 작용한다.

스마트 파워는 하드 파워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함과 동시에 소프트 파워의 동맹, 파트너십,  제도에 투자함으로써 세계적 공공재를 생산하고, 미국의 이익과 세계의 이익이 일치하도록 만드는 전략이다.(page 207-208)

스마트 파워는 통합전략, 요소 기반, 그리고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 모두를 끌어다 미국의 목표를 달성시킬 도구모음을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강력한 군대가 필요함을 강조할 뿐 아니라, 모든 수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미국이 하는 일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동맹과 파트너쉽, 제도에 엄청나게 투자하는 접근법이다.(page41)

스마트 파워 전략의 전제는 군사력 축소가 아니라 강력한 군사력이다.(page 213)

국제 정치. 경제 쪽으로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게 이 책은 그리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책이었다. 스마트 파워 위원회에서 짚어낸 미국의 문제점들은 이미 다른 공부를 하면서 또는 다른 책에서 익히 읽거나 배워서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해결책으로 제시한 방법들도 대부분은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왜 그렇게 어렵기만 하고 나 같은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듯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말 하면 ‘미국의 저명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드리는 정책 제언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식인들이 인식하는 미국 외교 정책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담고 있는’(page22) 원래의 이 보고서가 너무 장황하게 쓰여졌던 때문은 아닐까? 별다른 각주가 없이 쓰인 정치. 경제적 전문 용어들도 책에 다가서는 걸 막는 빗장으로서 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건조체로 쓰인 보고서는 꼼꼼히 읽은 이에겐 명확하게 요점정리를 해 주는 미덕을 발휘하기도 한다.

스마트 파워의 전제가 군사력 축소가 아닌 강력한 군사력이라는 것에 좀 더 유념해서 이 보고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 문제점을 들춰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맞는다고 이해했다. 이 보고서의 인식의 출발점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를 가진 집단이고 그 권력을 세계에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고민이라는 것이다. 힘을 어떻게 안 쓰고 질서를 잡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아닌 어떻게 힘을 할용 해 주도권을 확실히 할까라는 연구는 그 힘의 주변국들에겐 결국 같은 결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에 몹시도 불편했다. 또한 이 보고서는

‘세계적 공공재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Smart) 외교라고 이야기 한다. 미국 외교 정책의 목표는 세계적 공공재를 위한 관리자(agent)로서 미국의 영예를 지속시키고 보존하는 것이어야 한다.(page36)’고 이야기 하고 있다.

세계적 공공재니 관리자라는 말들을 이제 와서 새삼 이해하기엔 그동안 미국은 너무 이기적이고 심통스러웠다. 하지만, 이 보고서를 보면 향후 미국의 행동에서 이기적이고 심통스러운 부분이 조금 누그러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릴 편하게 해 주진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미국의 영향력을 부정적으로 본다. 한미동맹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인식하면서도 안보 때문에 위싱턴에 의존하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데 불만을 품고 있고, 특히 북한에 대한 한국의 관심에 미국이 무감각함을 알고 있다. 서울은 상호 간 지역이익과 세계 이익을 증진하는데 워싱턴과 더 성숙하고 동등한 파트너 관계를 맺기 원한다.(page76)

일본국민의 3분의 2가 미국에 우호적이라는 평가 뒤 언급한 우리나라에 대한 부분은 미국과 우리의 눈높이가 과연 같은 걸까? 라는 의문점이 생기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옮긴이가 해제 부분에 쓴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스마트 파워 전략은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스마트파워위원회의 보고서는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기 때문에 벤치마킹하기 쉽다.(중략) 스마트 파워 전략에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이슈들이 많기 때문에 초국가적인 공동의 문제를 발굴해서 한국이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도, 국가 역량을 키우는 방법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중략) 현재의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는 내실 있고 조화로운 한국형 스마트 파워 전략이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page 214)

  

미국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한 책이었다.

옮긴이 홍순식의 출판 의도는 이 보고서가 미국의 저명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드리는 정책 제언일 뿐 아니라, 미국의 지식인들이 인식하는 미국 외교정책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담고 있으며, 미국의 세계전략에 관한 정책이나 구상을 예측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정보 제공에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본래의 목적에 아주 충실한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보고서에 실린 내용들이 아무쪼록 오바마 정부에서 많이 실현되어지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