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 네 슬픔아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 에너지를 과잉 소비하며 읽고 있던 ‘사형제 부활이냐 형벌제도 폐지냐’를 내려놓고 잠시 외도를 하는 기분으로 읽은 책들이 내게 좋아하는 여성 작가들의 책을 골고루 읽었다. 공지영의 소설 한 권. 정이현의 단편집 한 권. 그리고 신경숙의 에세이 한 권. 공선옥이 빠져서 좀 아쉽지만 오늘 쯤 친구의 가게에 잠시 들러 공선옥의 책을 뒤적여 볼 참이었으니 마음을 잠시 뒤로 미룬다.

‘자거라, 네 슬픔아’는 신경숙의 글과 구본창의 사진으로 엮어졌다.

이 책을 산문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사진집이라고 해야 하나? 페이지 마다 구본창의 사진이 들어가 있으니 사진집이라고 해도 될 법하지만 아무리 들춰보아도 사진과 연결되는 신경숙의 글이 더 많으니 산문집이라고 해야겠다. 

구본창은 아주 오래 전 내가 좋아하던 인테리어 잡지의 사진기자였다. 그러니까 지금의 유명한 사진작가 구본창 이전에 인테리어에 실릴 사진을 찍던 시절의 구본창이 나에겐 더 낯익다는 소리다. 그 때도 강렬한 빛을 자제하거나 자연스럽게 찍은 그의 사진들을 좋아했었다. 주로 정원이 예쁜 집, 인테리어가 잘 된 집, 명사들의 근사한 집들을 그가 찍었던 것 같고 그로부터 몇 년 후엔 명사들의 사진과 함께 그가 쓴 인터뷰 기사도 보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또 한참 시간이 흘러 그는 지금 유명한 사진작가가 되어 있는 모양이다. 오래간만에 친구들 만나니 그 새 부잣집 사모님이 되어 명품으로 휘감아 범접할 수 없어진 때의 허전함과 놀라움 그리고 부러움을 함께 느꼈다. 어쨌든,  

그런 구본창의 사진들을 신경숙의 글과 함께 만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으니까.

나는 컬러 사진보다 흑백 사진을 더 좋아한다. 잘 짜여진 구도로 찍은 사진보다는 그저 자연스럽게 찍은 일상의 사진들을 더 좋아한다. 책 속엔 두 가지의 사진들이 모두 들어있다. 취향대로 흑백에 흐트러진 구도의 자연스러운 일상에 더 눈이 간다. 함께 곁들여진 신?가 높지도 않고 감정이 고조되어 있지도 않아서 좋다. 그저 수다를 떨듯 편하게 마치 사진속의 이야기를 풀어놓듯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글을 먼저 써놓고 사진을 찍었을까? 잠시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사진 찍은 해를 보니 아무래도 그건 아닌 거 같다. 그렇다면 사진을 보고 글을 썼다는 소린가? 역시 신경숙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물론 이 책에도 ‘서례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만났던 것 같은 이야기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신경숙의 이야기에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천연덕스럽게 집안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녀의 글을 읽으면 왠지 그녀는 나만큼이나 마음에 둘러친 담장이 높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싸리울이라 바람도 잘 드나들고 앞집 뒷집 오가는 발걸음까지 모두 다 알아볼 수 있는 담장. 그 안에 자신을 오롯이 앉혀두고 사는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 하지만, 누군가 아니라고 해도 별 달리 대구를 할 맘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신경숙의 팬 중 한사람으로서의 내 느낌일 뿐이니까. 

책의 표지엔 1989년 일본에서 찍은 것이라 되어있는 어느 개키지 않은 이부자리의 사진이 실려 있다. 아쉽게도 이 사진에 덧붙여 쓴 신경숙의 글은 그녀의 다른 글들과 달리 그래서? 라는 물음표를 달게 한다. 제주도에서 만난 어떤 소녀를 하룻밤 그녀의 숙소에 재워줬다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녀는 가고 없더란다. 문득 그 소녀가 누웠던 자리 베개와 시트가 구겨진 채 한 쪽으로 밀려나 있더란다. 침대에 잠시 걸터앉았던 그녀는 가방을 꺼내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고 글을 끝내고 있다. 아참, 그 전에 그 소녀는 눈코입이 깨끗하고 이마가 반듯한 처녀였다고 소개했다. 대부분의 다른 모든 글들은 쉽게 가볍게 편하게 내 마음에서 소화가 되었는데 애매모호한 이 글만큼은 전혀 신경숙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가끔 우리는 너무 거창하게 삶을 포장하고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때로는 소박하고 단순한 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설 수 있는데 꼭 무엇인가를 더 얹어야지만 될 것 같은 위태로움. 이 글이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239쪽의 1985년 비행기 기내에서, 라는 제목으로 찍은 사진이 있다. 아마도 구본창의 손이지 싶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 이 손을 신경숙의 손으로 착각한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그런 착각 속에 ‘손’이라는 부제가 붙은 장의 글을 읽는다. 그러곤 비로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느낌들. 사진과 글과의 일체감들이 신경숙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야기일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퍼뜩 해낸다. 불현듯 책에 빠져있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다. ‘루미’라는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고양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다행이다.

     

 

오늘의 거짓말

소설 앞에서 점점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 다만 내 작은 이야기들이. 내가 만든 길을 지우며 나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겠다. 도망치는 일은 영원히 없으리라 이제야 겨우 수줍게 다짐한다.(page338-작가의 말 중)

정이현의 단편소설집인 [오늘의 거짓말]에 실린 작가의 프로필 사진 속에서 정이현은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소위 메이저 작가군의 여자들 그러니까 은희경. 공지영. 신경숙. 공선옥 같은 이들의 분위기에 비해 그녀는 한참 어려 보인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녀의 웃음이 문득, 화원에서 보았던 이름을 외우지 못 한 보라색 난쟁이 꽃이 생각나 한참 손을 놓고 있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궁금해지는 꽃 이름이 난감해서......

정이현의 소설들은 색다르다. 그녀 소설의 주제는 대부분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마치, 세밀화를 보는 듯 아하~우리 일상 속에 이런 부분이 있었지! 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그녀가 보여주는 부분들이 모두 행복하지는 않다. 차라리 우리가 좀 치사한 방법이지만 의도적으로 한 쪽으로 밀어두고 싶어 하던 생각과 감정들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녀 소설의 소제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현실적이며 도한 비현실적인 상황과 감정의 그 익숙함이 오히려 색다르게 다가온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간들. 1995년과 1979년 1985년과 2004년 1972년 이 책이 묶여진 시점인 2007년의 여름과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2009년의 늦은 봄이랄까 이른 여름이랄지 종잡을 수 없는 계절 속에까지 소설 속의 사건들은 소설로만 존재하길 거부하며 사실로 존재하고자 몸부림을 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 몸부림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을 현실 속의 인물로 만나게 하는 마술을 부린다.

‘타인의 고독’의 주인공 종우야말로 내가 좀 살아봤으면 하는 인생이다. 종우의 삶을 들여다보며 내가 너무 많은 관계에 휘감겨 있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종우의 삶이라 다르겠지만, 기존의 사회 질서 속에서 비교적 유유자적할 수 있는 냉소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그의 삶이 맘에 든다는 것이다. 

‘그 남자의 리허설’의 주인공 그 남자 강창규의 경우는 읽는 내내 마음이 답답하다. 문득 드라마를 보면서 마치 자신이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안타까워하고 분노해하는 엄마가 생각났다. 그 남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남자가 마치 나인 것처럼 답답하고 화가 났기 때문이다.

공부방이 있는 아파트의 현관을 지날 때마다 강창규를 생각한다. 나갈 때는 저절로 스스륵 열려주는 문 하지만 들어갈 때는 비밀번호나 키가 없으면 절대로 들어설 수 없는 요지부동의 세계. 도무지 아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 세계는 소설 속 타워펠리스에 사는 강창규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린 이미 너무 많이 마음을 잠그고 살지 않나? 내가 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 내보낼 수 있지만 받아들이기엔 많은 절차가 필요한 개인의 시대. 그런 ‘홀로’의 시대에 강창규가 강박증처럼 ‘냄새’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방의 소도시 시립합창단 자리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는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키를 가진 사람에겐 비겁할 정도로 친절하지만 단지 키를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금 전 인사를 한 사람과도 안면을 몰수하는 몰인정한 아파트 경비원을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그들이야말로 사회의 모습일 뿐이다. 이 밖에도 ‘삼풍백화점’ ‘어금니’도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정이연은 숨기고 싶은 인간들의 욕망과 감정을 아닌 척 잘 끄집어낸다. 물론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그의 의도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그 감정의 일상성이 오히려 정이연의 소설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새로운 소설을 기다리는 재미를 내 책 읽기에 추가하기로 한다.

공지영의 소설을 읽으면 가끔 감정이 충만한 시어를 만나듯 말랑말랑한 감성을 만나는 게 낯익다. 신경숙의 소설은 그녀의 삶의 이야기들이 녹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내가 좋아하는 공선옥의 소설은 치열해서 좋다. 거기에 또 한 사람. 정이연을 꼽는다. 아직 젊어서 푸르른 눈이 좋다. 눈이 푸르러서 거기 뻔 하게 있는 상황을 푸르게 다시 풀어내는 그 날카로움이 좋다. 이 책 ‘오늘의 거짓말’을 읽으며 해 본 생각들이다.

    

 

엄마의 집

“사랑은, 어쩌면 달나라에 가는 것과 비슷할 거야. 지구의 중력을 이탈해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무한의 우주를 지나 꿈꾸어온 달에 착륙하는 여행 말이야. 그 여행이 엄청난 것은 우주선도 없고 연료도 없이 오직 단둘이 끌어안고 스스로 발사체가 되어 날아간다는 점이지. 그리고 달나라에 갈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 살 수는 없는 것처럼, 사랑 속에 안주해서 살수도 없단다. 실제로 달은 채석장처럼 끔찍하게 척박한 곳이고 이간의 발을 둥둥 뜨게 만드는 곳이지. 단지 지구와 달 사이. 원심분리기같이 굉장한 속도로 회전하는 허공만이 사랑의 현장인 거야. 사랑이 끝나고 지상으로 돌아올 때는 우주선을 버리고 각자의 낙하산을 펴야 하지. 이 지상에 따로따로 떨어져 착륙해야 하는 것. 사랑은 그런 거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때 함께 있든, 혹은 헤어져 있든, 무사한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결국 끝이 나. 삶은 사랑의 열정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로 사는 거거든.”(page194-195)

한 여자를 주목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문체가 맘에 들었다. 그녀의 청동빛 언어들이 좋았다. 그 때는 이제 막 빛을 발하는 신성처럼 뜨겁지만 환하지는 않았던 그녀. 하지만, 어느 모임에선가 그녀가 지방 국립대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우선 평가절하 되는 것을 보았다. 전혀 쓸 모 없는 그 편견이 싫어서 그녀가 유명해지길 바랐었다. 그 여자가 오늘 내가 만나는 소설가 전경린이다.

책의 말미에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페넬로페의 후일담’이라는 근사한 제목으로 역시 근사하게 그녀의 소설을 평하고 있다. 작품집에 함께 실리는 작품 해설이야 당연히 우호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해설을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글 잘 쓰는 작가에 글 잘 쓰는 비평가의 환상적인 조합이군 이라고. 전경린이 성애소설가라느니, 대중추수적이라느니 하는 비판들을 달고 다닐 때 내가 좋아한 전경린은 바로 그 때의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쨌거나 주어진 순서가 있으며 통합적인 진리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그것이 음악이든 미술이든 아니면 문학이든 비슷한 단계를 거치지 않나싶은데 처음엔 잘 모르니 떠듬떠듬 어설프고 단순하다. 그 다음엔 익숙해진 기교와 성취에 대한 자신감에 화려하고 풍성해졌다가 어느 때에 이르러 다시 단순해지는데 이 때의 단순함은 처음의 단순함과는 달리 감정과 기교에 대한 많은 생략과 지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단단하고 야무지다. 은희경도 신경숙도 그리고 공지영도 공선영도 속칭 메이저라 불리는 그들 모두도 이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거 같다. 유명해지고 나자 너무 무거운 주제를 끌어왔고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채 낑낑거려서 실망스러웠다. 전경린 그녀도 세태의 흐름에서 비껴 앉기엔 힘이 부쳤던 것일까? 아쉽지만 전경린도 그런 흐름 속에서 헤어나지 못 하고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지금 익숙해진 기교와 성취에 대한 자신감에 화려하고 풍성한 시절을 살고 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좀 더 담백해지길 독자인 나는 기다린다.

여자에게 자기 명의로 된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한 여자가 집을 갖는다는 것은,

경제적이고 정신적이고 육체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자신이 전적으로 통제하는 일이다.

인간적인 공허와 경제적 강박이 외풍처럼 넘나든다 해도, 나의 집을 가지고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은 초월적일 만큼 즐거운 일이다.(page299 작가의 말 중에서)

결혼 후 어찌어찌 집을 한 칸 마련했을 때 나는 남편 명의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순종적인 가부장제도 속의 여자냐 하면 ‘never’ 절대로 아니다. 나야말로 ‘엄마의 집’의 엄마인 미스 엔과 흡사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친구 중엔 아주 조심스럽게 집 명의를 누구로 했는지를 물으며 혀를 차는 이도 있었지만(내가 알기론 요즘은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한다는 명목 하에 아내 이름으로 집을 등기해둔다고 한다. 그러니까 잘 나가는 소수의 남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집이 없다는 소리), 집이란 재산으로서의 가치 이외에 많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미스 엔과 같은 입장이라면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죽을 둥 살 둥 내 이름의 집을 가지기 위하여 기를 썼을 거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돌아보니 난 남편과 이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나의 남편은 미스 엔의 남편처럼 운동권 출신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미스 엔의 남편처럼 많이 배워서 소유와 분배에 따른 자본주의의 불합리에 대해 몸서리치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냥 평범한 도시의 소시민인 남자에게 그의 이름으로 된 집이란 허리에 힘을 줄 수 있고 남들 앞에서 헛기침을 할 수도 있는 웅장하지는 않지만 어쨌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빽이 되지는 않을까? 집은 여자에게만 의미 있는 공간이 아니고 작금의 세태엔 남자들에게야말로 더 의미 있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해 보았다.

책 표지에 실린 소설가 정이현의 평엔 이 소설을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고 단정 짓고 있다.

왜일까? 호은이라는 대학 2학년 아가씨가 화자라서? 그리고 이혼한 엄마의 동선을 따라가고 있어서? 최소한 전경린이 정이현의 말에 수긍했다는 소린가? 그러니까 당당하게 책 표지에 그녀의 평을 실었겠지.

나는 이 소설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전 억압과 은폐를 먼저 배웠고 뒤늦게 자유와 자율의 맛을 알았지만 향유를 배우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끼어있는 40대 세대의 고통을 들춰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시선으로 소설을 읽었다. 호은이와 엄마의 행적을 뛰쫓으며 숨어버린 남자 아버지의 행적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는 소리다. 엄마와 호은이 승지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왠지 현실감이 떨어지고 몽롱하다. 다만, 간간히 나타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내 관심이 혹시 사회학 측면으로 치우쳐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는 단정엔 반만 수긍하겠다.

엄마와 호은이 그리고 관계 설정이 모호한 승지. 엄마의 애인인 아저씨. 이들의 관계야 말로 현 세태를 잘 반영해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부분도 전경린은 너무 아름답게 따뜻하게만 이야기를 풀어놓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실제로 이런 인간관계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렇게 화기애애하기만 할런지 궁금해진다. 좋은 시절이 있으면 안 좋은 시절도 있다고 다만 눅눅한 이야기는 뺐을 뿐이라고 이해하겠지만 전경린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부분 부분으로 나뉘어 파묻혀버린 느낌이어서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경린의 소설을 만나는 것은 즐겁다. 그녀 나름의 문체를 만나는 것도 즐겁고 당돌하다 못 해 발칙한 그녀의 상상을 따라가는 것도 즐겁다. 그것이 성에 대한 것이든 대중이 좋아하는 부분만 건드리는 것이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게 배 아프면 그들도 전경린처럼 용감해지거나 막무가내이거나 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