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네
방송대 2학기 등록을 간신히 마쳤다. 늘 그래왔듯 이번 학기 등록도 전쟁을 치르듯 끝내야 했다. 많지도 않은 금액이건만 빠듯한 생활비에서 내 등록금을 빼낼 때마다 다달이 고정수입이 있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맘이 편치 않다.
하지만, 그렇게 이번 학기만 견디면 다음 학기는 좀 쉽게 지날 수 있겠지 라고 기대하며 지낸 시절이 벌써 12년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영문학과와 교육학과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문화교양학과 3학년 2학기를 살고 있다. 돌이켜 보면 늘 즐거웠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를 한다는 건 참 즐겁다. 살림에 일에 공부까지 하려니 머릿속이 늘 복잡하지만 그 복잡함 덕분에 오히려 내 삶이 더 명쾌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처음 한비야 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체구도 자그마한 여자가 정말 대단하다 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내가 한비야 라는 사람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읽은 후부터였다. 당시 난 내 인생의 노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죽을 때 까지 현역’이라고 식구들한테도 친구들한테도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내심 알 수 없는 내 미래가 불안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벌어놓은 돈도 모아놓은 재산도 없이 그저 남의 빚이나 안지고 사는 걸 감사한 살림살이니 뭔가 나이 먹어서도 최소한 내 용돈을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주된 관심사였다.
방송대를 다니다보니 연세가 지긋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구열에 불타는 분들을 많이 만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내 나이와 사회가 생각하는 내 나이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격차가 있는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공부하는 그 분들을 보면서 난 아직 젊으니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라는 생각밖엔 못 했으니까. 우리 나이면 식당에서도 안 써준다는 소릴 몇 사람에게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젊지 않은 나의 사회적 나이에 대해 실감이 났다.
공부한 것이 문화교양이니 출판 쪽 일을 해보고도 싶었고 나름대로 자세하기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나마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이라는 것이 책 읽고 글 쓰고 그리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먹은 과외 선생은 좋아할 아이들은 없을테니 나이를 좀 덜 따지는 일이라면 외국어 선생이 좋을 것 같은데 영어는 시장이 넓다고 해도 수요와 공급이 모두 너무 치열하고 한 1년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나라가 인도와 중국이었다. 해서, 나는 중국어를 배워 중국어 선생이 되리라 마음을 먹었는데......맘은 먹었지만 결심을 할 수 없었다. 내 나이가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외우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인데 이제 새로운 말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읽고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해서, 이번 학기부터는 어설프지만 초급 중국어부터 발을 떼놓기로 했다. 내 인생에 잣대가 되어준 사람. 이제 그런 사람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나도 한비야 라는 사람을 꼽을 수 있다.
혹시 당신도 내 친구처럼 인생의 오르막길이 힘겨워 그만둘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가? 내 경험상, 안간힘을 쓰며 붙들고 있던 끈을 ‘나, 이제 그만 할래’ 하고 놓아버리면 그 순간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 같지만 곧이어 찾아오는 ‘포기의 고통’은 더욱 깊고 오래갔다. 어쩌면 그 어려움이 마지막 고비였을지도 모르는데, 그것만 넘었으면 문이 열렸을지 모르는데, 하면서 후회막심이었다. 돌이킬 수 없기에 그 후회는 더 뼈아프다. 그러니 젖 먹던 힘까지 내서 한 발짝만 더 가보는 거다. 이제 정말 그만 하고 싶을 때 한 번만 더 해보는 거다. 딱 한 번만 더 두드려보는 거다. 집주인이 문 뒤에서 빗장을 열려던 참인데 포기하고 돌아선다면 너무나 아까운 일 아닌가.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말 할 수밖에.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page 109)
원래 텔레비전을 잘 안 본다. 볼 시간도 없지만 자주 보지 않으니 대부분의 프로가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 프로에 출연한 한비야 씨를 정말이지 우연하게 보았다. 아프리카의 물 부족 사례에 대해서 그리고 비인간적인 여성 할례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눈물을 흘리며 그 프로를 보았다. 화면 속의 한비야 씨를 보면서 그 당당함이 그 똑 부러짐이 그 명쾌함이 너무 부러웠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이 책 [그건, 사랑이었네]를 만났다. 지금까지의 책들보다 좀 더 진솔한 이야기, 좀 더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하지만, 더 따뜻하고 더 명쾌한 이야기들이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 흘리고 웃게 만들었다. 110쪽의 [내 글쓰기의 비밀]과 243쪽의 [이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줄 수만 있다면]은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복사를 해놓았다. 이제 초등학생인 녀석들에게 책 전체를 읽으라면 기절을 하겠지만 이렇게 따로 떼어서 부분만 보여주면 별 무리 없이 읽어낼 것 같아서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돗물 좀 아껴 쓰라고 맨 날 잔소리를 하는데도 별 반응을 안 보이는 녀석들이 [이 아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줄 수만 있다면]을 읽고 좀 달라졌으면 좋겠다. 물의 소중함도 물론이지만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도 깨닫게 되길 바란다.
‘세계시민학교’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반갑다. 그렇게 좋은 프로그램이 고작 일 년에 100명밖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 잊지 말고 인터넷 검색으로 자세한 내용을 좀 알아보리라 밑줄을 좍~그어놓았다. 내 모든 생각의 도착점에 늘 서 있는 사람. 당연히 아들 녀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고? 사람들이 있어서 그리고 그녀와 같은 길을 걸으며 또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참 가시덤불이고 자갈밭이지만 그래도 걸어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한비야 씨는 또 새로운 공부를 위해서 유학길에 올랐다. 그녀의 삶의 열정과 애정과 지적 호기심이 너무 부럽다. 유학을 떠나는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내 나이가 결코 젊지 않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 무엇을 하지 못 할까! 중국어 정복 기필코 해 낼 수 있을 거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늦깎이라는 말은 없다. 아무도 국화를 보고 늦깎이 꽃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졌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의 속도와 시간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내공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직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철에 피는 꽃을 보라! 개나리는 봄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지 않는가.(page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