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

미실이 등장하는 드라마 선덕여왕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다. 고현정이라고 하는 당대 최고 배우의 연기가 아니더라도 ‘미실’이라는 인물은 드라마만 보더라도 매력적인 여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텔레비전을 보는 편은 아니라 얼마 전 우연히 본 케이블 방송에서 재방송으로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후일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 오랜 궁외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공주로 등극하는 부분이었는데 처음 보는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었다. 친구 책방에 들렀다가 서가에 꽂힌 김별아의 ‘미실’을 만났다. 제1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미실의 붉은색 표지는 드라마 속의 고현정의 얼굴과 오버랩 되어무척 고혹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드라마 속의 미실과 소설 속의 미실은 많이 다르다. [화랑세기]에 전하는 미실의 모습은 이 두 모습과 또 다르리라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속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권력을 탐하는 모습은 같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드라마 속의 미실이 훨씬 더 음전하게 그려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는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드라마 속의 미실은 신라 최고의 제사장 또는 무녀다. 소설 속 미실은 대원신통의 맥을 3대째 잇는 인통이었다. 대원신통이란 왕과 그 일족에게 색공(色貢)했던 혈통으로 오도-옥진-묘도-미실로 이어지며 인통이란 왕과 혼인할 여자나 색공 할 여자를 배출했던 모계 혈통을 말하는데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을 지칭한다. 그런 미실의 지위 덕분에 소설 속에선 아주 진한 성애의 장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문득, 하루키의 소설들을 보려면 왠지 얼굴이 뜨거워져서 책상 위에 펼쳐놓지 못 하고 조심스럽게 읽던 기억이 나서 이 책을 읽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하루키 소설의 외설스러움과 이 소설의 색스러움이 비교가 될까? 하루키가 이런 저런 군더더기 없이 있는 대로 상황을 그려냈다면 김별아는 모든 행위를 은유처럼 또는 그려내고 있다. 그 많은 성애장면들을 한결 같이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표현해낸 작가의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이 책을 본 중3 녀석이 “미실이다. 선생님 이 책 빌려주시면 안 돼요?” 라고 물어본다. “그 책 19금이다. 넌 좀 더 커서 봐. 제대로 읽으려면 국사시간에 졸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둬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소설책 한 권 읽는데 무슨 역사공부를 하느냐고 녀석은 속으로 툴툴 거렸을 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저 성애장면이 많이 담긴 좀 야한 역사소설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또 다른 이야기들 때문이다. 이름도 좀 낯설고 상황도 좀 낯선 듯하지만 가만히 되짚어 보면 어디선가 많이 듣고 읽은 이야기들. 바로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들이 교묘하게 모양을 바꿔 미실의 이야기 속에 들어와 있다. 화랑과 원화의 이야기. 비형랑과 도화녀 같은 설화들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딱 들어맞을 때 아하! 하고 눈이 반짝인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한창 드라마에 재미를 붙였을 시청자들에게 야단을 맞으려나? 하지만, 미실이 살았던 시대를 되짚어 볼 때 미실과 선덕여왕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미실은 진흥왕-진지왕-진평왕의 시대를 살았던 여인이다. 지평왕의 다음 代가 선덕여왕이다. 혹시 만났다고 해도 미실은 이미 늙스구레한 중년이었을 것이고 선덕은 귀저기를 빼지 못 한 아기였을 것 같은데 말이지. 내 계산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보려는 시선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소설 ‘미실’을 읽으면서 신라시대의 결혼풍습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내가 잘 알지 못 하는 부분이기에 소설의 사회적 배경이 얼마만큼 역사를 따르고 있는지 얼마만큼이 작가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사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실’에게만 이 남자 저 남자를 탐하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당시 사회가 남매혼 또는 중혼 등 성에 관해서 전반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인지 도무지 구분을 할 수 없었음이 아쉽다. 소설 속의 결혼 풍습이 실제 신라 사회와 비슷한 모습이라면 1인1처제 사회를 살고 있는 내겐 그야말로 충격이다. ‘축첩’제도는 이미 많이 들었고 읽었고 배웠지만 지금으로선 불륜이니 패륜으로 입에 담지도 못 할 사회 모습이 놀라운 건 숨길 수 없겠다.

역사를 공부함에 겉으로 들어난 역사야 당연히 공부해야 하지만 그 뒤에 흐르는 것들도 공부를 해야만 우리에게 알려진 역사나마 제대로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사야 당연히 중요한 것이고 그 외에 文化史, 複式史 처럼 ‘00사’로 지칭되는 흐름에 대해 주목해야 할 이유를 이 소설을 읽으며 깨달았다.

 

 

사랑하기 때문에

프랑스 문학은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도 낯설다. 마치 평행선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나의 감정들과 가까워지지 않는 이질감. 프랑스에서 오래 계셨던 불문과 교수님께 프랑스 문학 작품이 영 가까워지질 않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어느 나라든 어느 민족이든 나라마다의 고유한 풍속과 습성 때문에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프랑스의 사고는 우리와는 영판 다른 것 같아 특히 더 그 이질감이 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미있는 예를 교수님이 들어주신 것 중에 하나. 우리는 하나 둘 손가락으로 수를 셀 때 엄지손가락부터 구부려가며 세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새끼손가락부터 센다고 한다. 아주 간단한 예이지만 그들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그간 몇 편 읽은 프랑스 문학 작품에 대한 인상은 대체로 난해하다는 것이었다. 사실주의적이기 보다는 관념적인 경향이 더 강했던 작품들이 많았다. 처음 기욤 뮈소 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 독자들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여서 그의 작품이 무척 궁금했다.

1974년생인 기욤 뮈소는 프랑스 앙티브에서 태어났다. 니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고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평은 ‘기욤 뮈소는 하나의 현상이다’라는 수식어를 달아주며 찬사를 보낸다고 한다.

비쥬얼한 측면을 강조하는 그의 소설은 영화의 한 컷 한 컷을 연상시키는 서사구조와 영화적 긴장감이 녹아들어 있어 독자들이 나른해 할 틈을 주지 않는다.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 답게 그의 소설은 영상세대 젊은이들이 가진 감성화 취향, 기초에 절대적으로 부합하며......

 (책날개 작가소개 중에서)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제목인 ‘사랑하기 때문에’가 왠지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야기 흐름에 비해 너무 통속적인 제목이 아닌가 하는......또는 전체의 흐름을 너무 뭉뚱그린 것은 아닌 가하는 의구심이 생기면서 정말 기욤 뮈소가 처음 붙였던 제목도 ‘사랑하기 때문에’였을까? 아니라면...원 제목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물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아쉽게도 내가 불어를 읽을 능력이 없으니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할 텐데...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내게 불어로 제목을 알려줄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차로들에 신호등이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page9)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 들어섰으니 언제 어느 순간 사고가 일어날런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소리인 걸까? 그러니 부지런히 좌우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소린걸까?

이 책은 각 장마다 명언들을 한 구절씩 실어놓았다. 본문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절묘한 선택의 명언들을 읽는 재미도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라고 하겠다.

불운했던 어린 시절부터 우정을 나누는 커너와 마크, 가난 때문에 엄마를 잃었던 에비의 이야기. 대 재벌의 상속녀지만 교통사고를 낸 후 엉망으로 망가진 앨리슨, 그리고 마크의 아내 니콜과 마크의 잃어버린 딸 라일라.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 뉴욕이 아니더라도 이 소설은 다분히 프랑스 적이라기보다는 헐리우드 적이라고 나는 느꼈다. 몇 년 전

부르스 윌리스가 주연했던 영화 식스 센스를 보는 듯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이려나?

특별한 반전도 없고 작가가 깔아놓은 복잡한 복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책을 편 순간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책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면 그에 대한 평단의 말처럼 비쥬얼한 측면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들이 영상세대들이 가지는 감성과 취향에 정확하게 부합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크는 딸을 잃어버리고 피폐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뉴욕의 지하철 밑으로 숨어들어가 노숙자로 산다. 2년 후 우연하게 아내 리콜이 강도들과 맞닥트린 순간 그녀를 구했지만 잃어버린 딸 라일라에 대한 생각으로 다시 집을 나오고 만다. 며칠 후 딸을 찾았다는 아내의 핸드폰 메시지를 받고 미친 듯 자기의 자리로 돌아온 마크는 병원에서 보호받고 있는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뉴욕 행 비행기에 오른다. 우연인지 마크의 옆자리에 앉게 된 에비와 같은 비행기에 탄 앨리슨. 생면부지인 이 사람들이 비행기 안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 와중에 앨리슨이 교통사고로 죽인 아이가 바로 마크의 딸 라일라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지만 이 모든 일들이 현실이 아닌 정신 세계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된다. 커너는 이 세 사람 마크와 에비와 앨리슨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짜고 최면 트랜스 상태에서 그들을 고통의 세계로 내몰았던 두려움의 실체와 직면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현실 세계로 돌아온 이들은 깊은 내면의 세계까지 물들이던 상처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물론, 이 소설은 해피 앤딩이다. 나는 그 상큼한 해피 앤딩이 맘에 든다. 마음이 울적해질 때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본다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리진

며칠 전만 해도 정말로 지구가 더워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낮이든 밤이든 열기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는데 처서가 지나고나니 어쩜 이렇게 세상이 달라지는지 모르겠네요.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담장에 아파트 담장의 밤나무에 어쩜 그리 탐스럽게 밤송이들이 여물어가고 있던지 맨날 지지고 볶고 시끄러운 건 인간들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연을 닮는다는 게 어떤 뜻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더군요.

잘 지내시지요?

마침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를 읽은 김에 몇 페이지를 복사해서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 돌려 읽기를 해봤습니다. 한비야의 글쓰기 법과 아프리카 아이들이 물 때문에 겪는 고통을 적은 부분이었어요. 눈으로 읽는 것과 소리 내어 읽는 것이 틀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리 내어 읽는 남의 고통도 자박자박 나의 고통으로도 다가올 수 있는 걸까요? 아이들이 갑자기 숙연해 지는 것 같더군요. 아프리카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말과 물을 아껴 써야 겠다는 다짐들로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한비야씨의 문체는 쉽고 편하게 읽힌다는 특징이 있어요.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글쓰기 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진지한 문체가 읽는 사람까지 그렇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갑자기 숙연해졌던 이유도 생각해보니 한비야씨의 문체가 한참 개구락진 녀석들에게도 진지하게 읽힐 만큼 편하고 진솔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좋아하는 소설가를 꼽으라면 저는 우선 ‘신경숙’을 꼽는데요. 이유는 그분의 진지한 문체가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목소리가 높지도 않으면서 강하게 빠르지, 않으면서 지루하지 않아 그분의 작품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거 같아 자칭 ‘팬’이라고 내세우기도 합니다만,

‘리진’은 오래전부터 읽어야지 라고 마음만 먹고 손을 못 대고 있던 책이었어요. 책방에 들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새 책을 망설임 없이 뽑아들면서? 책이 출간될 당시 무슨 열풍처럼 역사소설이 앞 다투어 출판되었지요. 유명 작가들은 오랫동안 시간 속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을 들쑤셔 깨어내서는 역사소설이라는 이름의 옷을 입혀서 사람들 앞에 내세워놓았습니다. 그런 열풍과 유명작가라는 유명세까지 합해서 제법 많은 책들이 읽히고 팔리던 때였어요. 어느 날 신문에 실린 ‘리진’의 광고를 보면서 저는 ‘이 양반이 돈이 궁한가?’라는 생각을 하며 괜히 불쾌해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세에 이끌려가는 게 아닌가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구요. 암튼, 그런 이유로 처음 책이 출판될 당시 미뤄두었던 것이 금방 이 책을 만날 기회를 놓쳤던 거랍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죽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 사람은 나였는가. 지극히 가까운 몇 몇 사람 외에는 그녀의 죽음을 아는 이 없이 그녀는 쓸쓸히 잊혀졌다. 조선은 왕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궁으로 돌아오면서 대한제국이 되었다. 뒤늦게 이제 왕비가 아닌 황후의 국장이 치러지고 겨울이 지난 봄날 리진의 무덤 앞에 두 손이 없는 사내가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들으면서도 콜랭은 리진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홍종우가 리진의 무덤 위에 얼어 죽은 채 붙어 있는 사내의 시신을 리진 옆에 묻어주었다고도 했다. 콜랭은 죽음을 택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리진의 존재를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만 했다.(중략)

 벽난로의 불기에 얼굴이 붉어진 콜랭이 리진의 사진을 뺨에 대었다. 이 사진을 품고 그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고대하던 조선에서의 날들이 거친 물살을 이루며 밀려들었다. 공사간 마당의 벽오동나무 밑에서 그녀의 처소에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던 날들. 능소화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아 있던 나비가 저기로 날아가는 것과 같이 아름답게만 여겼던 사진이었다.(page308-309 에필로그 중에서)

읽는 내내 특별히 가슴이 졸이던 부분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장면이었어요. 내 나름대로는 역사에 대해서 제법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야사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에 대해서도 교과서뿐만이 아니라 제법 다양한 자료들을 접하면서 상세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 그려진 명성황후 시해 장면은 마치 내가 그 치욕스럽고 아픈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소름이 끼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 저절로 눈물이 나오더군요. 솔직히 이 책에서 만나는 명성황후의 모습들은 드라마와 책을 통해서 알려진 그 모습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후로서의 모습이외에 어미로서 그려지는 명성황후의 모습들이 왠지 역사를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았다면 사람들 마음속의 모성에 대한 동질감을 부추김으로써 역사 속 인물에 대해 현실감이 배가되었다고 보면 되는 걸까요?    

리진은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기 좋은 책이에요. 여성학적으로 볼 수도 있을 테고 사회학적으로 분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책에 함께 수록된 서영채 한신대교수의 [뒤늦은 애도, 한 고결한 죽음에 관하여]라는 작품해설과 작가노트를 별도로 복사해서 다시 읽어보기도 했답니다. 소설 내용에 대한 것보다 이 책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이 궁금했었기 때문이지요. 맺음말에서 서영채 교수는 루카치의 말을 빌려 ‘장편소설의 작가가 지녀야 할 최고의 미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겸손함을 지목했어요. 겸손한 주체에게만 장편서서가 지녀야 할 총체적 은총과도 같이 다가오는 것’이라고 했더군요. 그렇다면 신경숙이야말로 그 겸손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작가라고 말씀 드린다면 선생님께서 저의 대책 없는 외사랑에 대해 살짝 눈 흘기실 것 같아 걱정이 좀 되기도 합니다만,

‘내가 리진을 알게 된 것은 사년 전이다.(중략) 조선에 처음으로 파견된 블란서 외교관이 조선의 궁중 무희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와 함께 파리오 건너갔다는 내용이었다(2권 page342 작가노트 중)

소설을 읽는 동안은 신경숙이 이 작품을 쓰기 위하여 나름대로 바쳤을 노력들이 눈에 띄지 않았어요. 그 노력들은 책을 덮은 후 왜 이 책이 그렇게 술술 잘 읽혔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팠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쯤에야 비로소 아~하고 한꺼번에 터지더군요. 겸손하기 때문에 진지하고 그래서 술술 잘 읽히던 문장들이야말로 신경숙이 작품에 공들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요?

선생님.

이즈음 들어 저는 ‘글’에 대해서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걸 느낍니다.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에 몇 군데 인터넷 서점과 독서 카페에 책 후기를 올리기 시작한지 이년이 다 되어가는 거 같습니다. 남에게 보여지는 부분에 대한 부담감이 나를 좀 더 긴장시키고 글을 다듬게 하리라고 기대해서 시작한 일이었어요. 다행히 내 성격의 답답한 부분들이 이 일과 잘 들어맞는지 계획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게 목표를 달성했고 올해도 목표 달성을 향해 최선을 다 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내 글의 質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최근에 여러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을 쓰는 분들의 부지런함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누가 소설을 허구로만 이루어진 거라고 했던가요? 소설 한 편에 들어가 있는 작가의 자료수집 노력과 문장을 다듬느라 노력한 흔적을 대할 때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게으른 인간인지 저절로 부끄러워집니다. 특히, 소설들을 읽다가 시보다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오는 걸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문장 한 줄 그 문장 안에 들어가 있는 토씨 하나도 다듬고 고민했을 작가의 고뇌가 느껴지면서 나는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진실 되게 글을 쓰고 있는 지 저절로 반성하게 되고 좀 더 좋은 글을 쓰려면 좀 더 부지런해지고 좀 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아울러서 기왕에 나 혼자 끄적거리고말 글들이 아니라면 블러그나 카페 등 온라인상의 어느 곳에 남기든 내 흔적 하나하나에도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혹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써버린 나의 글 때문에 누군가 불편해한다면 그 건 내 글이 어떤 쪽으로든 치우쳐 공정성을 잃었다는 소리일 테니 말이지요.

신경숙의 글을 읽으면 늘 생각이 많아집니다. 나 같은 무지한 독자로 하여금 자꾸만 생각의 가지를 펼치게 하는 것.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한가지이기도 하구요. 소설 [리진]과의 만남. 다른 독자들에 비해 많이 늦었지만 신경숙에 대해 또 우리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본 좋은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