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디자인 산책

우리 집. 나는 우리 집을 기능에만 충실한 집이라고 부른다. 군더더기는 전혀 없어 썰렁한 집. 이런 우리 집에 대해서 일 때문에 집 밖에 나와 있는 시간이 더 많다는 나름대로의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나도 예쁜 그릇, 잘 꾸며놓은 집, 멋지게 지은 건물, 아름다운 공원처럼 눈을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다듬어주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 프로방스풍으로 아기자기 하게 꾸며놓은 인테리어도 좋고 젠 스타일로 깔끔하게 다듬어 놓은 실내도 좋아한다. 10년정도 인테리어 관련 잡지를 정기구독 했을 정도로 집꾸밈 뿐만이 아니라 소소한 집기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유명 제품이나 디자이너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관심은 있으되 소위 말하는 명품과 유명 디자이너에 대해선 일부러 무관심했던 듯 아니면 굳이 유명 제품으로 실내를 꾸며야만 멋진 집이 된다는 듯 인테리어 잡지에서 소개하는 고가의 집기들에 대한 거부반응이 좀 심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해본다. 덕분에 아직까지도 내가 아는 유일한 유일한 디자인 브랜드는 ‘이케아’ 하나뿐이다.

일단 ‘핀란드’라는 나라가 낯설다. 북부 유럽의 간결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떠올리며 만난 핀란드의 디자인은 기대했던 대로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재미가 느껴진다. 본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만나게 되는 필란디아 홀의 사진은 마치 순도 높은 얼음 덩어리를 도시 한 복판에 옮겨 놓았나싶게 사진만으로도 무척 색다르다. 어둠 속에서 비춰지는 빛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니 그 변화가 궁금하다. 이 밖에도 이 책은 사진과 글이 반반씩 사이좋게 나뉘어져 실려있다. 물론, 저자의 사진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사진선정에도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핀란드라는 나라를 디자인이라고 하는 그릇에 정말 잘 담았다.

책은 핀란드 사람들의 전반적인 생활을 소개하면서 더불어 그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디자인 정신에 대해 소개한다. 아주 소소한 일상과 생활습관에서부터 공공건물의 건축과 옛건물의 보존에 이르기까지 핀란드 사람들의 문화와 정신까지를 함께 설명한다.

문득, 핀란드라는 나라가 부러워지는 것은 우리나라도 핀란드처럼 훈훈하고 따뜻한 인정과 문화가 있는데 외국 사람들에게 누군가 이런 책을 써서 소개하고 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닿았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러시아 사이에 위치하는데 지형은 낮고 평평한 준평원으로 되어있고 빙하 지형이 많다. 특히 빙하 침식으로 호수가 많이 형성되어 ‘호수의 나라’로 불린다. 국토의 약 10%는 습지와 호수고, 약 70%가 삼림으로 침엽수림 지대다.

기후는 위도에 비해 비교적 온화하나 북부는 타이가 기후이고, 남부는 습윤 대륙성의 하계 냉온 기후다. 여름철의 백야는 거의 전국적 현상이고, 북부 지역에서는 겨울에 오로라(극광) 현상이 때때로 나타난다.

핀란드는 농경지가 주로 남서부 해안에 분포하는데, 밀. 감자. 라이맥 등의 식료 작물과 목초. 오트밀. 보리 등의 사료 작물을 재배한다.

핀란드 경제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임업으로 남부 내륙의 호수가 많은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발달했다. 주요 수출품은 목재. 펄프. 종이. 합판 등이다.

공업은 천연 자원인 삼림을 바탕으로 목제 공업이 주를 이룬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빠르게 발전하였으며, 기술 집약적 공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민은 우랄 알타이 계의 핀 족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그 외에 스웨덴 족과 라프 족이 있다. 수도 헬싱키는 항구 도시로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계몽사 학습 대 백과 사전 참조-page340)

핀란드에 숲이 많고 사람들이 숲을 귀하게 여긴다니 무척 부럽다. 그렇지만 핀란드라는 나라는 70%가 산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그들에게 숲과 나무는 아주 친숙하고 가까운 존재이다. 그들의 생활 속에서 자연친화적이며 소박한 디자인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태도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소개도 참으로 부럽기 그지없다. 시장에서 파는 채소나 과일을 씻지 않고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니 요즈음의 우리가 처한 환경 속에서는 너무 먼 이야기라서 정말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 다시 한 번 책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사우나 문화와 크리스마스 파티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사우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핀란드의 사우나에 대한 부분을 읽다보니 뜨거운 열기가 푹푹 나오는 사우나로 달려가 흠뻑 땀을 흘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나라 사람들처럼 사우나를 하고 맑은 호수로 가 몸을 담그는 일이야 있을 수 없겠지만 왠지 여지껏 느껴보지 못 한 개운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사우나에 대한 언급 없이 핀란드 사람을 이야기 할 수 없고 사우나 없이 핀란드란 나라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란 말은 핀란드 사람 스스로 하는 이야기다......핀란드 인구는 현재 약 5백만이 조금 넘든다. 사우나 수는 거의 2백만 개가 된다고 한다......도심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 건물 지하에도 사우나가 있어, 요일을 정해서 돌아가며 사우나를 하거나 대중 사우나를 이용하기도 한다. 지금 현대식으로 짓는 아파트에는 평수가 작더라도 샤워실 옆에 사우나가 있다......대중 사우나는 옛날 가난했던 시절, 샤워시설을 미처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몸을 청결하게 하던 장소로 도심의 주거단지 내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사우나는 옛날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질병을 치료하던 장소였으며, 때론 오래 저장할 고기들을 말리는 곳으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중략)

사우나는 보통 사람들이 정신을 다스리는 공간이라고도 한다. 단순히 열기를 흡수하고 식히기 위해 육체들이 오가는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한 심오한 수행자의 공간이라고도 한다. 사우나는 개인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사업상 혹은 어떤 중요한 정치적인 사안을 결정할 때 사용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 핀란드 사람들은 사우나에서 더욱 평등하다.

(page248-252)

이 책은 핀란드의 생활 모습을 디자인이라는 그릇을 빌어 이야기한다. 그들은 옛것을 있는

그대로 보존한다고 한다. 헬싱키의 오래된 노동자 아파트에 여전히 사람들이 산다는 부분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고택들 대부분 문을 잠가두고 빈집으로 놔두는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외관은 손대지 않고 헐은 부분만 보수하면서 내부는 조금씩 개조해가면서 사람이 살고 있고 사람이 사는 그 옆에 그 건물에 대한 박물관이 함께 있다는 것도 신선하고 부러웠다.

에필로그에서 지은이는 광화문 거리를 지나 새롭게 만들어진 청계천변을 거닐었던 듯 싶다. 옛길에 심어져 있던 나무들은 모두 뽑혀 버리고 새로 생긴 물길과 대낮에 어색한 놀이터로 변해버린 안타까움을 잠깐 토로한다. 또한 서울에 올 때 묵었던 집의 나무 한 그루를 통해 산업화 이후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내려 있는 ‘빨리 빨리“의 습성을 살짝 질타한다.

디자이너가 어떤 공간 디자인을 해야 한다면 디자이너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곳을 먼저 생각하고 마음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에서 진정으로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움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좋을 만큼 겸손해야 한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늘 통하기 때문이다.

(page324)

저자는 지금 핀란드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보다는 핀란드와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핀란드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가득 배어있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내 알 수 없는 부러움과 질투심을 느꼈다. 질투......뭐랄까 내가 좋아하던 바이롤리니스트 정경화가 영국남자와 결혼했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그 서운함과 배신감 같은 감정이었을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자는 진심으로 핀란드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고 핀란드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한 마음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 같다. 저자가 생태주의자인지 자연보호론자인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책에도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자연에 대한 소중함에 잠시 마음이 무겁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누군가 이 저자처럼 우리의 문화를 소소하게 쉽고 편안하게 외국인들에게 소개한 책이 있으리라고 믿어본다. 우리의 문화도 돌아보면 핀란드에 버금가지 않을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마침, 배우 배용준이 우리 문화를 알리는 책을 출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책도 이만큼의 깊이와 애정이 담겨있는지 읽어봐야 겠다.

  

 

괴짜 사회학

언젠가부터 나는 사회학 분야 전반에 걸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는 어느 정도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음을 의미했다. 정평 난 사회학자들의 다양한 사회 방편들이,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고통들을 예방하는 데는 전혀 무력하다는 사실에 점점 화가 치밀었다. 동료 사회학자들이 주택, 교육, 고용을 위해 개발하고 있는 추상적인 사회 정책들은 가난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회학자들이 제시하는 반듯한 처방전들에 비해 주택단지 안에서의 삶은 아주 거칠고 혹독하며 또한 혼란스러웠다. 사회학자들의 처방들은 아직 학교를 떠나지 않은 젊은이들을 납득시킬 때 부분적으로 도움 될 뿐이었다. 거리에서 더 큰돈을 벌 수 있는데 저임금의 시시한 직업을 젊은이들에게 권유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page 241)

아무리 제목에 괴짜라는 조금 가벼운 수식어가 붙여져 있다 하지만 ‘사회학’서적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사회학...이라고 하면 1학년 1학기 인간과 사회 과목이 생각나서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했건만 최악의 성적을 받았던 그 기억이 ‘사회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되살아나서 우울해진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제껏 내가 만나왔던 사회학 책들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걱정했던 대로 딱딱하지도 않을뿐더러 죽어라고 외워지지 않던 사회학자들의 이름 따위는 눈 씩고 찾아보려고 해도 안 보인다.

다만, 수디르 벤카테시라고 하는 사회학자를 만나볼 수 있다. 컬럼비아 대학 사회학교수이다. 이 책은 그가 박사과정 시절 도시 빈곤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기 위해서 시카고의 황폐한 공영 주택단지에 들어가서 겪은 일들을 엮은 것이다. 그는 시카고의 마약 판매 갱단과 가깝게 지내면서 갱보스와 친구가 되고 그 후 10년이라는 세월을 공영 주택단지에서 보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갱보스가 되어보기도 하고 갱단의 비밀 장부를 입수하게 되어 [괴짜 경제학]의 저자로 유명한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과 함께 마약과 갱단의 지하경제에 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 책 소개엔 그의 이런 이력과 연구 성과를 ‘살아있는 사회학’이라고 소개한다. 그렇다면 과연 살아있는 경제학이란 무엇인지 책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책 속을 아무리 뒤져도 우리가 책상머리에서 배웠던 그 어떤 사회학 용어도 사회학적 정의나 개념도 없다. 그저 수디르라고 하는 대학원생과 만나게 된다. 그의 행동과 그가 처하는 상황들은 한 편의 영화를 연상하게 한다. 갱단이 등장하니 [대부]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고 하면 될려나? 하지만, 수디르는 백인이 아니다. 솔직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의 태생을 짐작할 수 없었다. 우리 눈엔 모두 검게만 보이는 그들도 사실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나야말로 인종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수디르는 인도인의 피가 흐르는 것도 같은데 남미 계통의 조상을 가진 사람인 모양이다. 어쩌면 그가 백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가 10년씩이나 빈민가 사람들과 친구로 가까이 살아갈 수 있었던 조건도 된다고 하면 또 한 번 인종주의자라는 질책의 눈길을 보낼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내 예감이 더 확실해졌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인종 갈등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골이 깊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수디르가 갱단의 중간 보스인 제이티와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후 10년의 세월을 줄곧 제이티와 수디르는 가깝고 또 멀게 함께 한다. 그 10년의 시간동안 수디르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과 그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이고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 일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곁에도 존재하는 이야기이고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그래서 무책임하고 또 방종한 듯 보이는 이들. 그렇지만 그런 판단을 조금 더 유보해야 한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배웠다. 세상의 수많은 계층과 계급 속의 사람들을 판단할 때 우린 과연 얼마나 공정한 잣대를 가지고 정의와 바름과 모범을 계량 했던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걸 이 책은 가르쳐 준다. 이래야 해. 저렇게 해야 해. 아무런 질문도 대답도 없이 그저 수디르의 시간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알고 저울질 하던 그 안목들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화려한 도시의 변두리 낡고 헐은 그 공간에도 사람들이 산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모두 주어진 삶을 허비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산다. 그들이 모인 곳에도 법이 있고 질서가 있고 예의가 있다. 그들은 사회 통념적인 법이나 권력으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어 정당한 보호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극한의 경계선에 서있을 수도 있다. 바로 거기서 그들은 나름대로 법을 만들고 질서를 지키고 서로 도와가며 산다. 가난하고 무식하고 낡고 거친 공간에 거주한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폭력적이고 무질서하며 무책임하다 못 해 자존감도 없다는 편견을 가졌던 것은 아닌지를 심각하게 반성해보게 한다. 조금씩 모양새는 다를런지 모르지만 어느 사회든 존재하는 이 사회를 조금 멀찌기 바라보면 그리 낯설지 않은 모양새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의 배경이 시카고라는 것을 가끔씩 주지할 필요가 있다. 수디르가 관찰하는 마약 거래 루트는 지하 경제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을 감안하고 읽어야겠지만 그저 ‘나쁜 약물’이라고 단편적으로 치부해버리기엔 ‘마약 거래 루트’와 빈민가의 경제는 아주 복잡한 함수관계임에 틀림없다. ‘마약거래루트’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라서 좀 놀랍지만 ‘지하경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소제를 달리해 이도 역시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파라마운트사에서 영화로 만든다고 한다.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는 내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스팩터클 하다. 영화화 된다면 주인공은 누구일지 혼자 헐리웃의 스타들을 떠올려가며 잠시 즐거워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중에 하나다. 나는 '던젤 워싱턴‘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말이지.

 

아름다운 인생

삶이 가장 아름다운 이유는 삶은 언제나 시작이며 항상 모든 순간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page190-191 글.체자레 파베세)

나는 죽는다. 죽어서 태평을 얻는다. 죽지 않고선 태평을 얻을 수 없다.

(page195 글.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여름 내내 나는 좀 아팠던 것 같다. ‘아팠다’가 아니라 ‘아팠던 것 같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팠음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 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인 것 같기 때문이다. 초봄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집을 떠났다. 녀석이 없어서 허전함을 느껴보기도 전 봄에 일터를 옮기고 두 달 후엔 집을 옮겼다. 사이사이 아이들의 시험과 내 시험과 이런저런 가정대소사와 읽어야 할 책들에 둘러 싸여 나는 늘 바쁘고 번잡스럽고 시끄러웠다.

어느 날인가부터 여즉 잘 해왔던 일들이 심드렁해지고 게을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이 밀려서 그런 거라고 심각하게 나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파왔지만 늘 해오던 컴퓨터 작업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그 당시 한창 재미를 붙혀 잠깐씩이나마 몰두하곤 하던 게임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여름 끝 무렵 기침감기로 심하게 앓고 나서 소소하지만 몸보신이랍시고 몸을 추스르고 나니 손가락 마디마디의 통증이 사라져있었다. 예전의 칼칼한 성질로 되돌아가서는 집에 있을 때면 걸래를 들고 남편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나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 때서야 비로소 그동안 내가 아팠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몸이 안간힘을 쓰며 이야기를 했건만 정작 나는 그 외침을 무심히 넘겨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건강 때문에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난 이즈음에야 나는 겨우 잘 사는 것에 대해 눈을 돌리고 생각을 좀 모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웰 다잉 안내서라는 이 책을 만났다. 아름다운 인생이라더니? 우선은 반가움에 덥석 손을 잡는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잘 사는 방법인 웰빙(well-being)이 대단한 유행이다. 몸에 좋은 것으로만 골라 의. 식. 주를 해결하려는 사람들 덕분에 무농약, 무방부제, 무색소, 무자극... 웰빙을 표방하는 無자 붙은 상품들이 지천으로 넘쳐난다. 無자가 붙은 상품만으로도 모든 의. 식. 주가 해결되는 세상이니 우린 이제 잘 살다가 잘 죽는 일만 남은 복 받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하려나?

이 책엔 [죽음]에 대한 여러 정보들이 들어있다. 저자가 갑자기 아버님을 여의고 나서 겪었을 충격들을 되 뇌여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들을 전하고 싶었던 듯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슬픔을 가라앉힌 차분한 어조와 진심어린 충고들을 만나게 된다. 흑백으로 실린 사진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만나는 따뜻하고 해맑은 사진들을 보면서 좀 더 가까이 저자의 진심 속으로 다가가볼 수 있다. 물론 사진 만으로도 훌륭한 사진집을 한 권 엮을 수 있지 않으려나싶다.

사진과 함께 실린 단상들 때문에 이 책은 죽음에 대해 다소 감상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저자의 글들은 죽음에 대해서보다는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삶에게 할애하고 있다. 삶의 아름다움과 진지함에 대한 쉽고 소소하지만 진실한 목소리들. 여백으로 남겨진 공간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써 볼 수 있는 자리들이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만나는 죽음에 대한 ‘정보’들이 마치 시험공부 할 때 요긴한 요점처럼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정작 명확하게 알고 싶어 하지 않던 죽음에 대한 여러 용어들. 그리고 절차들. 이 책을 보면서 죽음의 실체와 맞닥트린다. 뇌사와 안락사에 관한 정리(page 84-85)는 막연하게 알던 부분을 다시 정확하게 되짚어준다. 전통적인 상례 절차와 종교로 구분하는 상례절차도 알아두면 혹시 상가에 문상을 갔을 때도 절차를 잘 몰라서 결례를 범하는 일을 줄여줄 것 같다. 그 외에도 장기 기증에 대한 것. 유언 관련 법률 상식,  상속에 따른 법률 상식. 재산상속에 따른 세금 납부방법 등  장례 이후의 절차에 대한 것들도 조목조목 알려주고 있다.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이런 절차들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지만, 살아서 미리 정리를 해 놓으면 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줄여줄 수 있다고. 그것도 웰 다잉의 한 방법이라고.

그러니까 웰 다잉이란 잘 먹고 잘 살다가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이기도 하지만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해서 평소 삶을 정리하는 것까지도 통 털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웰 빙은 곧 웰 다잉이지 않을까? 잘 살아야 잘 죽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한층 엷어진 가을 햇살 아래서 이 책을 덮는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모두가 덧없지만 그래서 모두가 다 귀하고 소중하다. 죽음과의 만남이라서 삶을 더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책과의 차분한 데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