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

햇살이 맑은 겨울 아침이다. 오래간만에 영상으로 올라간 기온도 두껍고 무거운 겉옷을 벗어버리고 싶게 만든다. 우리 집 아래층은 이사를 가는지 아침부터 분주하다. 누군가 또 떠나고 누군가는 또 오겠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데면데면한 성격 탓에 이동네로 이사 온 지 벌써 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옆집 사람의 얼굴조차 정확히 모르고 산다. 이삿짐을 계단에 내 놓느라 문이 열린 사이 잠시 주인의 얼굴을 보았다. 나와 동년배쯤 될 것 같은 사람들. 어쩌면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며 인사도 나누고 정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겠다 싶다.

집에 막 들어서는데 가까운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갑작스런 아버님의 부음을 전한다. 그 황망함 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냉정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여기저기 연락을 하고 장례절차를 밟아갈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다. 궂은일에 먼저 달려가서 위로하고 도와줘야 할 텐데 그럴 수 없는 내 생활이 참으로 답답하다. 이래저래 마음이 스산해졌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끼리 서로 등부비며 사는 게 어떤 걸까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에 잠시 마음이 길을 잃고 서성였다.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내가 제법 자주 꺼내서 눈을 맞추는 책이다. 오 헨리의 소설들은 대부분 따뜻한 사랑이 흐른다. 병든 젊은 화가에게 삶의 희망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린 늙은 화가의 이야기 [마지막 잎새]도 그렇고 사랑하는 약혼녀가 실종되자 그 약혼녀가 세 살던 방에 들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자취를 더듬다가 결국 그녀의 뒤를 쫓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셋방]도 사람들 마음속에 오롯이 들어있는 따뜻함과 애수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들의 배경은 주로 뉴욕이다. 그의 소설이 뉴욕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담아내는 데는 다정다감했던 오 헨리의 성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학교를 중퇴하고 여러 일을 전전하는 등 어려운 형편에서 성장한 오 헨리는 공금횡령으로 기소가 되었을 때 친구의 도움으로 온두라스로 도망을 갔지만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다시 돌아온 오 헨리는 아내의 임종을 지키다 결국 잡혀서 감옥에 가고 만다. 그는 딸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감옥에서 오 헨리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고 그가 석방되었을 때 이미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거칠고 황량한 삶을 극복하기 위해 달콤하고 낭만적이면서도 가슴 시린 소설들을 썼던 것일까? 그의 소설들은 상투적이고 고정된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도시 소시민들의 심정을 아주 잘 표현했음으로 해서 여전히 많이 읽히고 있다.

  

물론 내 책꽂이에도 오 헨리의 단편 모음집도 따로 있다. 그러나 내가 주로 눈을 맞추는 것은 교원의 명 단편 시리즈이다.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엮어진 이 시리즈에서는 클라우디오 가르뎅기 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삽화가가 그린 그림이 마음을 더욱 따뜻하게 해준다. 연필과 색연필로 그려진 책의 그림들은 연필의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선과 색연필의 투명한 색감이 어우러져 이야기의 분위기와 주인공들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내는 거 같다. 사실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기 위해 가장 아끼는 것을 처분한 주인공 부부의 처사가 내 맘에는 안 들기도 하지만 가끔 이야기 대신 책 속의 그림들이 헝클어진 마음에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아직은 11월이지만 며칠 후면 곧 12월이다. 감사와 축복의 계절이라고 이 불경기 중에도 도심의 백화점에선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선물을 고르느라 바쁠 것이다. 나도 다음 주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해놓을 예정이다. 올해에는 어느 잡지에서 보았던 크리스마스 준비처럼 매일 매일 소소한 선물들을 한 가지씩 장만해서 트리 아래 놓아두고 싶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식구끼리 모여서 선물을 개봉해 볼 수 있도록 양말 한 켤래, 초콜릿 한 상자, 예쁜 볼펜 뭐 이런 것들이 담긴 선물상자를 장만해 놓으면 어떨까?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방금 언젠가 후원금을 보내주었던 복지원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후원을 부탁한다. 얼마 되지도 않는 후원금을 내고 꼬박꼬박 선생님 호칭을 듣는 것도 불편하고 미안해서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말았다.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은 시절이니 많은 액수를 보낼 수는 없다. 그저 시늉이나 하는 수밖에. 이럴 때는 내가 돈도 좀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부금도 팍팍 내고 후원금도 시원하게 보내주고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향유할 수 있다면 내가 너무 욕심이 많은 걸까? 오늘은 내 마음이 자꾸만 오 헨리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밖엔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   

    

 

 

이제사 나는 푸른 잠자리의 눈빛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양준호

아침에 길을 나서려니 찌뿌둥하던 하늘에서 비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눈이라도 오려나 내심 기다렸는데 아쉽다. 대신 비가 그치고 나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찬바람이 불고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뿌옇게 흐려진 유리창 너머로 훨씬 더 헐거워진 앞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시를 읽기에 좋은 날씨다.

선생님.

보내주신 귀한 시집 잘 받았습니다.

저한테까지 선생님의 작품집을 볼 차례가 돌아오다니......감사합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의 시세계는 지난 번 ‘강물속의 해바라기’ 때 보다 더 푸르러지고

예리해지신 것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뭉툭해지고 둥글해지기 마련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거꾸로 가는지 더 젊어지신 정신과 詩語가 정말로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며 페이지마다 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새파랗게 눈을 빛내며 나를 들여다보는 詩語의 초롱한 눈망울들이 우리들의 단순한 생각과 그 멋없음을 꾸짖고 있는 거 같아 졸렬한 시가 몹시도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내가 깔고 앉았던 바다를 공중변소 휴지통에 구겨버리고 온 날, 뜰 앞의 노오란 민들레는 눈멀어 종일 바닷새가 回航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뜨는 나뭇잎의 9월 全文-

위의 시 ‘눈뜨는 나뭇잎의 9월’이 실린 페이지에 연필로 써놓은 짧은 메모를 옮겨 적어보았다. 어느 날인가 양준호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적어 놓았던 모양인데 양 시인께서 시문학회 사무국장 일을 보실 때 간사를 맡아보았다는 인연으로 그동안 출판했던 시집을 모두 챙겨 보내주셨다. 덕분에 나는 편하고도 감사하게 시를 읽고 감상 할 수 있었다. 책을 읽을 때 연필로 밑줄을 그어놓는 습관이 있는 나는 시집을 읽을 때도 마음이 가는 구절을 늘 표시해둔다. 이 시집 ‘이제사 나는 푸른 잠자리의 눈빛을 사랑하기 시작했다’에도 밑줄을 긋고 그 때 그때 감상과 생각들을 적어놓은 걸 보니 꽤나 열심히 시집을 읽었었던 그 때가 새삼스럽다.

白紙 속에 숨겨 논 여자는 지금 잘 있느냐

새가 새를 찾고 있다

아무래도 새가 앓나보다

그리고

누가 죽어가나 보다

계단을 올라가본다

女子Ep 달빛을 털어내고 있다

호젓하다

손바닥을 부딪치며 어제로 간다

-白紙 全文

위의 시 白紙가 실린 페이지엔 아래와 같은 메모가 적혀있기도 했다.

선생님.

한동안 섬진강 시인의 시집을 읽었습니다.

내가 쓰는 시가 껍데기뿐이라는 둥 어렵다는 둥 관념적이라는 둥 거기에다가 시건방지다는 소리까지 흠씬 두들겨 맞은 끝이라 내 인생 한창 때의 문화를 추억하면 가슴 한 쪽이 따듯해지듯이 그저 편안한 시가 그리웠었나 봅니다. 솔직히 ‘잘 나가는’시인의 요건이 무엇인지도 분석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최영미 시인을 메이저 출판사에 소개시켰다니 그의 인간적 안목이 궁금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마음에 드는 싯구절 마다 밑줄을 그으리라 잘 깎은 연필을 준비했습니다만, 그리 오래지 않아 연필이 필요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은 많았지만 고기가 살지 않는 냇가에서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

무엇이든 집중하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습관은 지금도 어느 한 시인을 선택하면 그의 시집을 모조리 찾아서 읽는다. 이 메모가 적힐 당시엔 섬진강 시인이 한창 유명세를 탈 때였고 그 유명세가 궁금해 그의 시집을 줄기차게도 읽기도 했는데 아마도 그 열광의 끄트머리쯤에서 이 메모가 씌여졌을 터, 그리하여 나는 또 한동안을 또 양준호 시인의 시들에 코를 빠트리고 살았었다는 기억을 시간을 더듬어 찾아냈다.

나는 오래전부터 시가 잘 되지 않을 때엔 소설을 읽는다. 이럴 때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한강이나 배수아 같은 젊은 작가들이다. 소설 형식과 언어에서 다소 파격적이기까지 한 이들의 소설을 읽으며 시적 표현에 대한 자신감을 얻눈다. 그리고 내 시어들이 낡은 고무줄처럼 직직 늘어날 때는 양준호 시인의 시집을 펼쳐든다.

한국 시단의 일반적인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이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시단의 주조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할 경향이라고도 하겠다. 1930년대 이상의 모더니즘에서 비롯하여 광북 후 조향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그러한 흐름의 일단이 양 시인에게 까지 접맥이 되어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시집 기지촌의 수족관 서문-문덕수 에서 발췌)   

양준호 시인도 벌써 예순의 나이를 넘기셨다. 그 분의 시는 여전히 젊고 푸르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는 듯 나날이 파랗게 불꽃을 키워가는 시어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얼마나 게으른지 나의 시어들은 얼마나 뭉툭한지 저절로 다시 한 번 되돌아봐진다. 또한 생경하지만 신선한 양준호 시인의 시어들을 보면서 새로운 시작 방법을 모색해보게 된다. 

언젠가 아주 오래간만의 전화 통화에서 벌써 할아버지가 되셨노라며 웃으셨는데 아무쪼록 오래오래 나이 들지 않는 그 분만의 시어들을 생산해내시길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해본다.

  

어느 날의 명도 속을 먹구름이라 불리우는 장중한 畵龍

이 초가을 황조롱이의 마음처럼 누워 있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발가락이 으스러지게 방문을 걷어차던 오십대적 추억의

그 나이를 지나가면......

맨드라미 피를 토하다가

하늘이 여자를 받아들이듯 벌개진 입술로 다시 햇살을

내뿜기 시작한다.

-이제사 나는 푸른 잠자리의 눈빛을 사랑하기 시작했다.全文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김명기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

가급적 아주 먼 길을 돌아가 본 적 있는지

그렇게 도착한 집 앞을

내 집이 아닌 듯 그냥 지나쳐 본 적 있는지

길은 마음을 잃어

그런 날은 내가 내가 아닌 것

바람이 불었는지 비가 내렸는지

꽃핀 날이었는지

검불들이 아무렇게나 거리를 뒹굴고 있었는지

마음을 다 놓쳐버린 길 위에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날

숨쉬는 것조차 성가신 날

흐린 달빛 아래였는지

붉은 가로등 아래였는지

훔치지 않은 눈물이 발등 위로 떨어지고

그 사이 다시 집 앞을 지나치고

당신도 그런 날 있었는지

-김명기 ‘그런 날 있었는지’全文-

후배한테서 이 시집을 받았다. 시집의 제목에 들어 앉아있는 체 게바라가 자꾸 걸린다. 그리고  시인은 제목에 ‘체 게바라’를 올림으로써 이미 그의 시가 나가고자 하는 방향을 독자에게 까발리고 말았다. 우리도 알지 않는가? 체 게바라가 어떤 사람인지.

시집에 소개된 프로필에 그는 1969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마흔 한 살이라는 소리겠다. 마흔이라는 나이. 푸릇한 청년의 색깔보다는 깊이 있는 무채색으로 바뀔 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시집 속의 시들은 나이에 비해 젊다. 여전히 삶에 대한 투정과 어리광이 눈에 띄는 것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시를 쓴다고 하면 매사에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시각이다. 그렇지만, 막상 시인을 만나다보면 감성보다는 이성의 영역이 더 큰 시인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나도 감성보다는 이성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향 테스트를 해보니 예상대로 분석적, 논리적 성향이 훨씬 우세해서 조금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김명기의 시를 이야기 하면서 나는 왜 이성을 주절거리고 있는가. 그의 시를 읽으며 나의 시는 어떤지 새삼스러운 고민을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문학이 삶을 조금 느슨하게 살아도 되는 방편이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어쩌면 이것은 당장 생활에 목이 메어 변변히 시를 위해 고민할 여유를 가지지 못 하는, 그래서 시다운 시는 쓰지 못 하는 내 핑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시인노릇보다 사람노릇이 우선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이 점에 대해선 누가 무어라 꼬집는다 해도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여즉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평소 생각이 에세이집을 낸 시인에게 돌팔매로 날아간 적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눈물 콧물을 같이 쏟아내며 극찬하던 그 에세이를 난 지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이 과년한 아들이 혼자 사는 늙은 어미를 못 모셔 이모 집으로 보내며 터미널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는다. 그 아들의 그릇에 괴기를 덜어주는 노모 때문에 눈물을 쏟았다며 ‘눈물은 왜 짠가?’ 되묻던 그 아들. 난 그쯤이면 시를 버리고 당연히 어미를 위해 막노동이라도 나가는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삶이 더 시인다운 게 아닐까? 김명기 시인의 시를 읽으며 하릴없이 ‘눈물’의 그 시인이 생각나서 내내 나의 마음도 김명기 시인의 시도 불편했다.

발기하지 않는 성기처럼 무기력한 일상.

지붕 낮은 스레이트 집에 사는 남자. 그 남자의 집 마당엔 분명 우람하게 자라지 못 한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을 터,

나는 이 시집의 시들이 그가 아주 오래 오래 전에 써놓은 것들이기를 바란다. 그 질척거리는 시간들을 열심히열심히 다져가며 한 편 두 편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것들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하여, 이제는 아니 지금쯤은 사각거리는 햇살에 종일 내 말려 뽀송 거리는 솜이불처럼 그의 삶이 포근하길 기원해본다. 그렇게 기원해보다가 문득 아~이런 기원조차도 얼마나 시건방진 일인가 싶어서 다시 한 번 그의 시집을 넘겨본다. 아무쪼록 좋은 시 많이 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