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지난 5월 1일엔 종묘에서 종묘대제가 열렸었다. 해마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종묘대제는 예전 조선시대 선왕조에 대한 예를 지키던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고 관광상품화 되었다는 느낌이 더 강해지고 있어서 아쉽다. 시간을 잘 못 알아 정작 종묘에 도착했을 땐 이미 대제는 끝나고 정리를 하느라 부산했는데 그 와중에 기념사진을 찍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광을 온 일본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거 같다. 오후엔 어가행렬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아쉽게도 어가 행렬은 보지 못 하고 인사동으로 넘어와야 했다. 몇 년 전 아들과 함께 종묘대제를 보러 갔다가 어가행렬을 본 적이 있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이은 황태자께서 왕좌에 앉아 계셨던 걸 기억한다. 종묘제례를 지켜보노라니 왕가의 사람들과 종친들은 나름대로 닮은 점이 있었다. 얼굴이 좀 길고 두툼하다고 해야 하나? 이 책의 날개부분에 실린 덕혜옹주의 13살적 사진에서도 종묘제례에서 만났던 왕가 종친들의 인상과 분위기를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신경숙의 리진, 김훈의 남한산성, 전경린의 황진이, 김별아의 미실 얼마 전 읽었던 이문열의 불멸까지 그동안 꽤 많은 팩션을 만났었다. 재미있게 읽었던 것도 있는 반면 어쨌든 완성도에서 떨어진 것도 있었다. 어쨌든 팩션이 인기이니 당분간은 이런저런 작품들이 계속 발표될 것이다.

집필은 사명감이었다. 자존심이기도 했다. 저자는 일제치하 시기를 견뎌야 했던 황제와 황족들. 청년과 여자들. 아이들의 고통과 울분을 감히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 여자의 삶만큼은 오롯이 살려내기 위해 열정을 쏟았다.

우리는 이 작품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담금질 하고, 칼날이 번뜩일 때 고개를 숙이며, 그 안에서도 분기탱천할 줄 알았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지치지 않고 탈출을 꿈꿨고, 좌절의 순간에도 매번 기적을 바랐으며, 그러면서도 조국과 운명을 같이 했던 여인. 가장 고귀한 신분을 지니고서도 가장 낮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덕혜옹주를 발견하게 된다(뒤 책날개-지은이 소개 중에서)

권비영이라는 작가는 솔직히 낯설다. 95년 신라문학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고 하니 중견작가의 반열에 세워야하지 않을까. 작가는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뒤 책날개-지은이 소개 중에서)였다고 했다. 뭔가 책의 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커다란 줄기는 이미 위에도 옮겨놓은 지은이 소개에 다 드러나 있다.

처음 친구의 서가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400페이지가 넘는 두께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읽고 있는 책도 있는데......천천히 돌려주어도 된다고 했지만 막상 다음날 책을 들고 찾아간 나를 보고 친구가 눈이 동그랗게 떴다. 그냥......책이 부실한 거 같아서......나도 부실하게 읽었어. 그래야 균형이 맞잖아......뭐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 내 말에 친구도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창 관심을 받는 책이라 왠지 안 읽고 지나가자니 전 국민이 다 보는 드라마를 나만 안 보고 지나가는 것 같은 찜찜함 때문에......우리는 그렇게 오래간만에 한 책에 대한 공감대를 확인했다.

덕혜옹주에 대한 사연들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알고 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이미 알고 있는 그 범위에서 많이 나아가질 못 했다. 대체 작가는 그 대단한 사명감으로 무엇을 연구했고 어떤 글을 쓰기 위해 고민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정말로 덕혜옹주의 삶에 대해 그렇게 마음이 아팠다면 작가는 좀 더 낮은 자리에서 이 작품을 완성했어야 한다. 좀 더 어깨에 힘을 빼고 문장을 완성했어야 하며 내용의 참신함을 위해 고민했어야 한다. 그것이 어디선가 열심히 자신의 작품을 읽어줄 독자에 대한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역사에 약간의 상상력을 추가했다고 해서 완벽한 작품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몇 점 썰어 넣었다고 해서 우리 대부분은 김치찌개를 요리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책은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 메인 화면에 올라와 있다. 오랜 시간 집중적으로 독자들을 공략하고 있다는 소리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절감한 것은 출판사의 기획력보다 한 수 위인 광고의 위력이었다. 나름대로 수준 있는 책들을 꾸준히 출판해 내는 곳이라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눈여겨보았었는데 출판사 측에도 이 기회에 조금 아쉽다는 소리를 하고 싶다.

잘 쓰여진 소설은 독자를 작품 속으로 작가가 의도하는 의미 속으로 사정없이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그 힘찬 손아귀의 마력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화려한 수식과 빈틈없는 구성을 만나면서 독자는 단순히 작품의 내용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 글을 완성하기 위해 흘린 땀과 고뇌까지 만난다. 때문에 잘 쓰여진 소설을 읽으면 그 글을 쓴 작가에게 저절로 질투와 부러움과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덕혜옹주의 불행한 일생보다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되짚어 보았다. 작가에게 미안한 부분이다. 하지만, 다음엔 좀 더 발전한 작품으로 다시 만나보게 되길 기대한다.

 

 

은교 / 박범신

한때 나는 銀자에 매료되어서 모든 이름에 銀을 넣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물론 아주 오래된 일이다. 그때 마침 조카가 태어났었는데 글쟁이 언니라고 동생이 조카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 때 ‘은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거 같다. 아쉽지만 사내아이 이름으로는 너무 여성적이라며 제부가 ‘건우’라고 결정을 했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이름에 ‘은’이라는 낱말이 들어가면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출렁되는 걸 느낀다. 이 소설 ‘은교’를 만났을 때도 어김없이 출렁거리던 그 느낌을 만났으니......알 수 없다.

‘은교’라는 이름이 주는 어감은 잠자리 날개처럼 하늘거리면서도 눈부시다. 아니 하얗다.

銀橋 隱交 恩敎 慇敎 圁橋......은교라는 이름을 한자로 이것저것 짝 맞추기를 해 본다. 이것이야말로 눈부신 언어의 유희가 아니고 무엇이랴. 은교라는 이름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소설을 읽기도 전 작가의 작명의도를 미리 가늠해본다. 물론 은교는 책의 제목이면서 주인공 이름이다. 은교라는 이름은 작가를 지난 십여 년간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page406) ‘갈망渴望'이라는 단어와 묘하게 잘 맞아 떨어진다. 내가 한참을 한자를 가지고 말장난을 했던 이유다.

지난 휴일에도 김시인과 문학산에 올랐었다. 연경산을 지나 문학산 정상까지의 등반길은 등산로를 잘 만들어 놓아서 이젠 예전에 만나던 난코스는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저 산책을 하듯 그렇게 갈 수 있는 보통의 산이 되었다는 소리다. 산 정상에서 문학경기장을 내려다보면서 우린 특별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 때 나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그저 갑남을녀로 사는 게 제일 편한 게 아니냐고 얘기했었다. 그런 갑남을녀 중 한 사람인 내가 박범신과 같은 스페셜리스트의 세계를 어찌 더듬어 따라갈 수 있을까. 쓸 데 없는 소리는 오히려 내 무식함만 도드라지게 할 뿐일 것 같다. 나 하나쯤 더 거들지 않아도 그는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고 너무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책 말미에서 만나는 ‘작가의 말’에선 왠지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더 작아지게 만들어버리는 충만한 진지함과 자신감을 함께 엿볼 수 있다. 어쨌든 그는 대단하다.

이 소설을 불과 한 달 만에 썼다. 폭풍 같은 질주였다. (중략)

다 쓰고 났을 때, 몸 안에서 무엇인가, 이를테면 내장들이 쑥 빠져나간 듯 했다. 나는 쭉정이가 되어 어둔 방구석에 가만히 누웠다. 그리고 보았다. 저만치 흘러가던 나의 젊은 날이 어느새 돌아와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5월의 물푸레나무처럼 내가 다시 푸르러졌다고 느꼈다. (중략)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읽기를 바라고 있다.

(page405-406 작가의 말 중에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여러 얼굴을 가진 소설이다. 한은교. 이적요. 서지우. 세 사람이 만드는 트라이앵글 안에서 정말로 많은 ‘갈망渴望’의 소용돌이를 만난다. 불과 한 달 만에 완성했다고 했던가. 그 한 달을 위해 준비했을 두껍고 깊은 시간들이 일시에 터진 꽃봉오리처럼 아니 갑자기 터지는 카메라 후래쉬 불빛처럼 눈부시다. 一筆揮之라고 했던가. 이 소설을 읽으며 저절로 떠오르는 낱말이다. 그러니 쉼 없이 흐르는 문장의 유려함에만 빠져있다가는 자칫 나도 길을 잃고 그 소용돌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갈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작가가 말 하고자 했던 갈망은 그만 없어져 버리고 욕망만 보게 될 텐데......무슨 소설을 그렇게 읽느냐고 콧바람을 날리는 사람이 있으려나? 그럼에도 나는 조심조심 책장을 넘긴다. 열망과 욕망,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의 모든 면면이 손금처럼 그려져 있으니 눈이 더 가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바로 그 때 숨소리가 들렸다. 소녀의 숨소리였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소녀의 맞은편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처음엔 소녀의 숨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소나무 그늘이 소녀의 턱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사위는 물속처럼 고요했다. 나는 곤히 잠든 소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열대엿 살이나 됐을까. 명털이 뽀시시한 소녀였다. 턱 언저리부터 허리께까지, 하오의 햇빛을 받고 있는 상반신은 하얫다. 쇠별꽃처럼.(page22)

노시인과 소녀의 만남은 이렇게 담백했다. 쇠별꽃처럼 하앴고 토깽이(토끼)처럼 귀여운 소녀를 바라보는 시인과 작가의 시선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말 뜨겁고 따가워졌다. 은밀한 갈망과 은밀한 질투가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줄도 몰랐으며 결국 서로를 파멸로 이끌어 갔다. 소녀 은교는 그 모든 비극의 정점에 그냥 남았다. 어느 날 문득 시인의 집 마당 살붙이처럼 여기던 시인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었던 때처럼.

이사한다고 한 날, 나는 네가 마을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은교야. (중략) 너희를 짐짝처럼 실은 트럭이 곧 햇빛 속으로 떠났다. (중략) 나는 생각했다.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본 것보다 더 뚜렷하게 나는 보았다. 트럭은, 그러자, 트럭이 아니라 아늑한 둥우리가. 되었다. 너는 의젓한 어미 닭같이 동생들을 품고 있었다. (중략) 나는 비로소 그동안 네가 가진 아름다움의 절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때까지 나는 너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지어낸 허울을 봤을 뿐이었다. (page392-393)

모든 것들은 헛되고 헛되니......작가는 이 소설에서 헛됨을 알려주고 싶었을까. 헛되기에 더 목이 마르는. 하지만, 시인이 은교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 헛됨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시인의 마음을 다급히 따라다니느라 너덜거리던 내 마음도 드디어 정리가 되는 부분이다.

영화는 영화로만, 드라마는 드라마로만, 소설은 소설로만 대하면 될 뿐이라고 말들 한다. 그렇지만 우린 알고 있다.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결국은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없다는 것을. 이 소설 속에도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세상을 떠도는 모든 욕망과 갈망의 모습들을 시장통에서 맞닥뜨리듯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전체 맥락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내가 굳이 소설의 줄거리를 정리하지 않는 이유도 이 소설을 이미 읽었거나 읽어보려고 하는 다른 독자들의 재미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주말엔 시내 큰 문방구에 나가서 ‘몰스킨’이라는 상표의 노트를 실제로 찾아봐야겠다. 시인이 남겼다는 노트다. 시인이 은교와 서지우에 대한 이야기들을 꼼꼼하게 만년필로 적어 내려갔다는. 반 고흐가 쓰고, 피카소가 쓰고 헤밍웨이가 애용한 노트(page404)라고 하니 비쌀 런지도 모르겠고 구하기 어려울 런지도 모르겠다.

 

풀밭 위의 식사

오래간만에 전경린의 소설을 만난다. 책날개에 실린 프로필 사진 속의 그녀는 이제 제법 나이를 먹은 테가 난다. 
왠지 그녀도 나와 같은 삶의 주기를 따르고 있다는 생각에 반갑고 안심이 된다. 그녀의 소설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이 <내 생애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이었다. 매우 통속적이었던 그 소설을 나는 참 재미있게 읽었고 
그 후로 나름대로는 전경린의 팬이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소설들을 섭렵했다.

소설 속에서 만나는 전경린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때로는 도발적이고 발칙한 상상력과 세련되면서도 
풍성한 그녀의 글을 만나면서 가끔 ‘인간’ 전경린이 궁금해질 때도 있지만 글쟁이는 글로 이야기 하면 된다고 했던가? 
그러니 나는 그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들여다보며 인간 전경린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녀의 사생활이 어떻든 그녀의 프로필이 어떻든 상관없이 일단, 나는 그녀의 소설을 좋아한다.

<풀밭 위의 식사>는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중 한 사람인 마네의 그림의 제목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아카데미 미술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소묘와 구성면에서는 전통적인 규칙을 잘 따랐지만 전통 명암법을 따르지 않고 
선명한 색을 사용하여 현실의 인물을 묘사한 점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라 뛰어난 창조정신이라고 존경받은 반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현대적인 의상을 입고 있는 두 남자 사이에 누드의 여인이 앉아 있는 이 그림은 당시까지 누드는 신화나 
역사적인 장면에서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마네는 라파엘로의 작품을 판화로 제작한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에서 영감을 받아 <풀밭 위의 식사>의 
구성을 만들었다.

(-(주)교원-테마로 보는 예술이야기 중 7권 빛과 인상주의-마네 편(page48-49)에서 발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와 서로 좋아하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일단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 끼어 있다고 해도 그냥 타인일 
뿐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성립되지 않겠지. 소설 속엔 그런 ‘관계’로 엮여진 ‘타인’들이 등장한다.

환하고 텅 빈 길은 광목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그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자 오랫동안 세상 바같을 헤멘 듯한 외로움과 피로가 몰려왔다. 
발자국들이 모두 가슴에 찍히는 듯했다. 이젠 생의 안쪽 어딘가로 파고들어가고 싶었다.

 “누경씨.”

 기현은 아무 작정도 없이 불쑥 이름을 불렀다. 누경이 기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현이 눈만 맞추고 있자 누경은 기현의 시선을 털어내며 나이든 누나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누경은 햇빛이 뜨거운지 검정색 파시미나를 벗었다. 반소매 옷 아래 음지식물의 줄기 같은

희고 가느가란 두 팔이 드러났다. 
기현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봉착한 심정으로 누경의 팔을 바라보았다.(page27)

누경을 사랑하고 누경과 함께 사랑하고 싶어 하는 남자 기현의 결말은 결국 누경의 ‘누나 같은 표정’이라는 말로 
그만 이 책을 다 읽기도 전 눈치를 채고 말았다. 누경이라는 여자. 누군가에게 좋아함을 받는 사람. 
‘음지식물의 줄기 같은 희고 가느다란 두 팔’ 왠지 내 눈이 먼저 시려오는 이 구절 앞에서 잠시 막막해 하다가 
누구를 좋아하는 사람에 밑줄을 쫙 긋고 기현이라고 쓴다.

누경과 서로 좋아하는 사람인 서강주보다 차라리 기현의 사랑을 받아주었다면 누경의 삶은 조금 더 따뜻하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해 본다. 누경은 기현의 눈물을 훔쳐주며 말 한다. 좋은 사람이지만......특별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너무 쉽고 당연해서 오히려 잊고 살던 정의들이 소설 속에서 갑자기 불이 켜진 전구처럼 환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맞아. 사랑의 감정은 이렇게 누군가에 대한 특별한 감정의 발로여야 하는 구나.

꽃들이 진다. 다시는 이런 해가 없을 텐데. 그와 나는 함께 봄꽃을 보지 못하고 이렇게 지나간다. 
그 예쁜 말들과 눈빛들은 허망한 봄꽃이고, 우리 몸에서 나온 찬란한 기포였을 것이다. 그의 몸에서 
피어난 봄꽃들 앞에서 난 잠시 신발을 벗고 머물렀을 뿐이다. 이제 지나간다. 내 마음을 냉각시켜두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유리처럼 식어가기를, 차갑게 굳어서 단단해지기를 기도한다. 
삶에 순순히 패배하는 것이 부끄럽다. 무정한 그는 어떻게 지내는지......(page184)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매우 감성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깊은 밤 아파트 광장을 휘돌아 5층까지 단숨에 날아올라
오는 바람의 소리에 오래도록 귀를 기울였다. 잠들기 전 의례히 틀어놓는 클래식 방송의 낮춰진 볼륨을 조금 더 
높였고 잠이 안 올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늦은 밤에 머그잔 가득 뜨거운 커피를 홀짝였다. 늘 팍팍하고 건조한 
일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 마치 내 사랑인양 내가 소설속의 누경이가 되어서 그의 사랑을 만나러 다녀오곤 했다. 
이제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맘껏 즐겨보는 즐거움. 진정 소설 읽기의 재미가 아닐까?

소설 속으로 들어가 누구와 서로 마주보며 사랑을 하고, 또 다른 누구의 사랑을 받고 하지만 새로운 누구와의 
만남에 불현듯 마음을 빼앗겨 버릴 수도 있는 사랑의 방정식을 풀다보니 사랑은 아니, 사람이 참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이기적인 존재에 대한 깨달음. 비로소 마네가 <풀밭 위의 식사> 속에 숨겨두었던 
진실들과 전경린의 <풀밭 위의 식사>가 줄긋기가 된다. 클로드 마네와 누경이 그리고 누경과 그림속의 누드 여인이 
그 여인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두 남자와 소설 속의 기현과 강석주가 함께 있는 듯 다른 시선으로 그리고 같이 사랑
하는 듯 또 다른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