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를 받을 때마다 계절이 바뀐다는 것을 알겠다.

어제 [학산문학 여름호]를 받았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떠올릴 특별한 것은 없다. 굳이 꼽는다면 '이 계절의 시인'의

신달자 시인의 사진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다. 신달자 시인처럼 나이 먹어도 웃음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좋겠다.

왠지 깊은 우물에서 솟아나오는 맑음 같은...나도 더 나이 먹으면 그런 웃음을 담고싶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잠든 당신의 등을 쓸어내리자 모래들이 쓸려 내렸다.

스르르 방바닥에 쌓이는 모래들을 손으로 움켜쥐고

나는 어찌할 줄을 몰라 간신히 숨만 참았다

이후 내 손바닥에는 까칠한 모래의 감촉이 지워지지 않았다

당신의 생애가 낙타를 닮았다고 당신 스스로 말한 적 없으나

굴곡이 진 등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아비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당신의 입 꼬리는 싱싱한 지느러미처럼 출렁거렸으므로

당신의 생애가 즐더운 음악 같았다고 오해한 적도 있었다

제 몸이 견디지 못할 만큼의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노역이 파노라마처럼 눈앞 스크린에 펼쳐졌다

하루하루가 사막을 건너가는 생이었으니

넘어도 넘어도 불쑥 나타나는 모래언덕이었으니

당신의 등은 낙타가 아니 될 수 없었으리라

아버지!라고 소리 죽여 불러보는 내 입가에 주름이 졌다

이제 나는 겨우 네 개의 모래언덕을 넘었을 뿐인데

아득하다, 아찔하다,

내 아들이 잠든 내 등을 쓸어내릴 때

녀석의 손바닥에 쓸리는 것은 무엇일지...... .

(page102 김충규의 詩 -감촉-全文)

 

 

혹시 내가 쓰고싶어하는 시가 이런 시가 아닐까 잠시 주춤했었다. 이 시 때문에 가뜩이나 무거운 가방에 짐을

보태고 몇 번을 다시 읽어보았다고 하면 내 유난스러움에 눈 흘기는 이도 있겠지만,

이 시를 읽으며 울컥아버지 생각이 났다. 다음 주 토요일은 친정 아버지 기일이다. 지난 주엔 시아버님 기일을

지냈고......이젠 그렇게 밖에 추억할 수 없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혼자 마음을 시려워했다.

 

 

너는 내 안에서 나의풍경이 되었다

내 안의 무수한 풍경 속에 네가 있다

그 많은 풍경 속의 너와

나는 함께 산다

나의 풍경 속의 너를 지우는 건

내 생애를 지우는 것과  같다

이제 어떻게 나의 생애를 지운단 말일가

너를 지우고 나의 생애를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너와 함께 나의 풍경을 지우는 일이 수월할 것이다

너와

나의 풍경이 동시에 지워져

내 안에서 너와

나의 풍경이 없어지면

나는 세상에 남아 무엇이 될까

너는 세상에 남아 무엇이 될까

네가 나의 풍경이듯

나는 너의 풍경이다

너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풍경이 되어 나는 평새을 산다

내 안에서 나의 풍경이 된 너

네 안에서 너의 풍경이 된 나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풍경이 되어

내리는 진눈깨비와 질척이는 진흙길을 걷는다

진눈깨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진흙길

그것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그 길만이 우리가 가야할 마지막 길이다

(page93-94 최일화 시 -나의 풍경-全文)

 

 

얼마 전 모 기관에서 발행한 [지도가 있는 시 속의 인천]이라는 책자에 실린 선생님의 시 '무관심'을 만난 후 

이렇게 최일화 선생님의 시를 다시 만나니 반갑다. 김충규 시인의 시도 최일화 선생님의 시도 내가 느끼기에

삶에 대한 진지함과 깊은 사색이 들어있어서 따듯하다. 맑고 담백한 시인의 눈을 시를 통해 만난다는 건

시를 읽는 기쁨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시의 취향을 고려해 봐도 나는 확실히 현실주의자다. 관념시 보다는 내가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는 시들에 더 매력을 느끼고 마음이 가니 말이다. 이런 시들을 만나면서 나는 내 시의 길을 다시 한 번 돌아

보게 되고 어질어진 손끝을 다듬어 본다. 그리고 다시 또 용기를 내는 거다.

 

그런가 하면 나는 영 써보지 못 할 시라서 마음이 쓰이는 그런 시도 만났다. 이미란 시인의 시가 그렇다.

나처럼 생활에 푹 빠져서 사는 사람에겐 도무지 꿈도 꿔보지 못 할 감성의 세계. 여전히 푸르고 사각거리는

섬세한 감성을 만난다는 것 역시 시를 읽는 즐거움이겠지.

공교롭게도 김충규 시인의 '감촉'에도 낙타가 등장하고 이미란 시인의 시에도 낙타가 등장한다. 같은 사물에

대한 이질적인 상상력을 한권의 책에서  볼 수 있다. 내가 김충규 시인의 시와 같은 길을 가고자 하면서

이미란 시인의 길을 부러워하는 이유를 두 시에 등장하는 '낙타'가 말 해주고 있다.

 

 

때죽나무 곁 그 길의 시작은 포도청이고 가시나무 곁 그 길의 끝은 변

기뚜껑 속이다 늑골 아래 세 든 저수지 물빛이 흐린 날이면 남서풍의 창

문을 읽고 가는 편두통의 바람은 슬로우 모션의 뒤통수만 보여준다

 

타클라마칸의 모래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등을 타고 앉아 왕오천축

국전의 두루마리 경전을 훔친 적도 있다 새은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

고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으로 떠나간 순례의 잠을 기다리던 밤이면

내장 깊숙이 박혀 있는 동굴의 입구엔 별이 뜨지 않았다 자물쇠가 채워

진 척추의 중심을 지나려면 캄캄한 공복의 틈 사이로 정갈한 솜씨로 식

칼을 꼳아야 했다 치사량의 위풍당당 장마가 숨겨진 애인처럼 찾아들면

출처를 알 수 없는 통증이 배꼽을 지나 자궁 벽 깊이 심어놓은 우물의

천정에 페니실린보다 독한 옛사랑의 주사 바늘을 흔적도 없이 찔러 놓

곤 했다

 

내 몸이 곧 길이다,라고 믿기 시작하면서 그 길의 끝에 다다르기 위

한 맑은 강물을 퍼 마시며 시린 모래바람에 늘어난 달빛의 혓바닥을 등

에 지고 잠드는 낙타의 긴 속눈썹을 사랑하게 되었다

(page99 이미란 시 -내 몸 안에 세상의 모든 길이 숨어 있다-全文) 

 

 

아주 오래 전부터 학산문학을 받아왔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손님처럼 그렇게 찾아오는 이 책을

그동안은 별 감흥없이 받아 읽었던 것일까. 어쩌다 드물게 내 시라도 실린 책을 받을 때면 정말

뭐라 말 할 수 없이 찾아오던 낯설음과 어색함. 내게 학산문학은 그런 느낌의 책이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그렇게 날름날름 받아서 읽기만 했다는 부끄러운 반성이 생기는 이유는

뭐 때문일까? 굳이 활자중독증이 아니더라도 우리 집에 오는 모둔 책들은 나의 뜨거운 시선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나름대로 모든 활자화 된 것들을 꼼꼼히 읽는다는 소리다.

학산문학은 확실히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다른 어떤 문학잡지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성숙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것들이 끊임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page291)

 

윤교수가 학교를 그만 두면서 그의 학생들에게 남긴 편지의 한 구절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희망이 사그라들지 않으니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있으라.(page291)는 말을 남긴다. 혹시 소설 속 윤 교수는 이 시대가 안타까워하는 석학 중 한 사람에 대한 은유는 아닐까?

 

날씨가 꾸물거린다. 인터넷 동갑 카페에 한 회원은 휴일만 다가오면 날씨가 꾸물거리기 시작한다는 글을 올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금요일이네. 이번 주도 참 바쁘게 지나갔다는 걸 문득 생각해냈다. 주말은 시아버지 제사 준비로 더 바쁠 것이다.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아들은 아르바이트를 접고 올 것이고 시댁 식구들도 나름대로의 휴일을 반납하고 모두 모일 것이다. 죽음은 사람과 사람을 무 자르듯이 나뉘는 칼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산 사람들을 묶어주는 끈이기도 하다는 걸. 아, 이런 생각을 하니 이젠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다.

남편의 차가 갑자기 말썽이다. 이른 아침 차를 손보러 나가는 남편에게 큰 고장은 아닐 거야라며 괜히 엉덩이를 툭툭 쳤다. 물론 차에 관한 한 나는 문외한 정도를 넘어 백지 그 자체다. 그런데도 큰 고장은 아닐 거야라며 심산하게 말 하는 마누라 의 말 한마디에 남편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진다. 잔뜩 긴장한 것처럼 딱딱하던 얼굴이 금새 누그러지는 걸 보니 나도 불편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다. 사는 건 그런 거다. 조금 눅눅하고 조금쯤 보송보송한 무엇. 하지만, 정작 이 책에서 만나는 건 ‘죽음’이다. 이제 우린 그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신.경.숙. 오래도록. 변함없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그녀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을 만났다.

참 이상하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비로소 신경숙의 진짜 소설을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마치 그녀가 오래도록 머물러있던 주변으로부터 훌쩍 벗어나 새로운 동네에 새로운 둥지를 튼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녀의 취향에 맞는 동네와 집을 구했으므로 낯설진 않지만,

 

사이프러스 나무일까? 검은 바닷물이 출렁이는 섬으로 들어가는 작은 배 한 척이 보였다. 아르놀트 뵈클린. 죽음의 섬, 이라고 씌어 있었다. 배에는 흰옷을 입은 남자가 흰 천에 싸인 관을 앞에 두고서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 앞에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섬은 잔잔해 보였지만 병풍처럼 무겁고 황폐한 절벽이 양쪽으로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중략) 작은배는 바다를 흘러와 지금 막 검푸른 물이 출렁이는 섬에 도착한 것처럼 보였다. 배는 막 사이프러스나무 아래의 검은 물속으로 미끄러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page190)

 

이 부분을 읽다가 다시 한 번 책 표지를 본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책표지와 이 부분은 많이 닮아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처음 보았을 때 표지의 노란색 때문이었을까 불현듯 은행잎이 생각났었다. 은행잎의 독특한 성분이 벌래가 생기는 것을 방지해 준다고 했던가. 그래서 책갈피에 꽂아두면 좀벌래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가 어쩌면 내 의식속의 은행잎이 되어줄 거라는.

 

명서와 미루. 윤과 단. 그리고 윤 교수. 이들이 들려주는 죽음의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보다 더 깊고, 푸르고, 뜨겁고, 아프다. 그래서 아름답다. 마치 미처 물기를 짜내지 않은 빨래를 집어 든 것처럼 주루룩 쏟아지는 슬픔 속에서 단단하게 반짝이는 삶의 덩어리를 보여준다. 이 책에서 만나는 슬픔들 중 단의 죽음과 윤 교수의 죽음은 사실적이라 마음이 더 아프다. 미루의 언니의 죽음과 미루의 죽음은 의외로 안개속인 양 다소 몽환적이고 애매모호 하다. 아니, 다분히 소설적인 죽음이다. 그런데 그 소설적인 죽음의 묘사 때문에 우린 서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죽음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소설의 죽음들을 한꺼번에 뭉뚱그리면 윤 교수의 죽음이외엔 ‘의문사’라는 이름으로 정리가 된다. 바로 신경숙이 건드려놓은 우리의 상처다.

 

서른셋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간 나이고 알렉산더가 거대 제국을 건설하고 죽은 나이지. 서른셋이 지나면 더 이상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요절이란 말도 서른셋이 되기 전 죽은 자들에게나 주어지는 것 아니겠나. 예술가들에겐 요절은 때로 영광이지(page77)

 

윤이 살았던 옥탑방이나 미루가 살았던 계단 끝집과 거기 명서가 심어준 백합의 향기. 명서가 기거하던 출판사 사무실과 에밀리에 대한 묘사는 다분히 소설적이다. 에밀리 디킨스도 그렇고 랭보도 그렇고 그리고 서른셋이 되 전에 세상을 떠난 저자들의 책을 모은다는 윤 교수도 이 소설을 또한 다분히 감상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런 부분 덕분에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은 마치 만져질 듯이 생생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들이네. 강 저편으로 아이를 실어나르는 자들이기도 하지.(중략)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이네. 함께 아이를 강 저편으로 실어나르게. 뿐인가.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하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나르는 존재들이네. 그러니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page63)

 

처음 내게 책을 권했던 친구의 말대로 한 번에 주루룩 읽힌 책이었지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잔영이 오래 남기 때문인 거 같다. 어찌어찌 시간이 흘렀고 감정도 앙금을 가라앉힌 채 정리가 되었고 윤 교수도 이제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어느 여름 명서가 윤에게 가지고 있으라며 주었던 갈색 노트의 맨 마지막 장엔 ‘윤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라는 말이 적혀 있다. 그렇게 윤은 명서에게 갔다. ‘내가 그리로 갈게.’라는 말로 소설속의 8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로 어제처럼 줄여서.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푸르고 깊었던 어떤 시점에 점 하나를 찍고 끝없이 이어질 새로운 선을 긋기 시작했으리라. 삶이란 그런 거다.

 

현絃의 노래

-소리가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상관이 없다 해도 살아야 소리를 내는 것이요. 목숨은 소리와 다르지 않소. (page136)

하필 [絃의 노래]를 읽는 내내 나는 좀 우울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중충함을 털어내 보려 내 나름대로는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혼자 노적산, 연경산, 문학산을 잇는 골짜기들을 흩어 돌았고  내내 피아노 연주곡으로 세상을 향한 귀를 닫았다. 혼자 산길을 걸으며 귓가에 와 닿지 못하고 부서지는 숲의 소리를 가끔 발을 멈추고 피부로 느껴보려 애 쓰기도 했다. 어느 모퉁이에선 소나무가 한창 송화가루를 털어내고 있었고 어느 오르막에선 엊그제 내린 빗물이 바위를 휘돌아 땅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숲속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야의 순장풍습이 하도 세밀하여 언젠가 모아두었던 순장에 대한 글들을 블로그에서 다시 뒤적여 보았다. 건조한 지식으로만 입력이 되었던 명사 하나가 울울창창한 감정의 숲이 되어서 내게 걸어왔다. 그 숲엔 임금과 함께 저승길을 떠난 여염의 사람들의 슬픔과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안개처럼 서려 있었다. 그 숲 자락에 선왕의 장례식 전날 도망갔던 궁녀 아라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차라리 돌아오지 말았어야 할 것을 결국 아라의 팔자는 순장되어질 팔자였을까? 아라가 살아서 묻혔어도 태자의 장례식 날 금을 뜯고 춤을 추었을 니문의 눈물도 함께 오고 일흔 살인지 일흔 두 살인지 그 옛날 아라가 묻혔던 태자의 봉분 앞에서 뜯던 늙은 니문의 옛 가야 고을의 네 줄짜리 금의 소리도 온다 . 눅눅하고 슬픈 장면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민초들이란 힘 있는 이들의 손가락질 하나에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긴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소설속의 그 아득한 시절이나 꼬집으면 아픈 이 시절이나 민초들의 삶은 다 같이 불쌍하고 애잔하다.

알 수 없는 비릿함. 그리고 비위 상함. 신라와 가야의 전투장면이 펼쳐질 때마다 나는 구역질을 했다. 그것이 전쟁터이든 민촌의 여염집이든 목숨들이 베어져 나가는 장면마다 속이 뒤집혔다. 하지만, 이 책의 어느 구석에도 잔혹하게 사실적으로 전투장면을 묘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선혈이 솟구치는 잘려져 나가는 머리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면 내가 너무 좋은 독자인 걸까? 나는 지금 작가의 의도대로 착하게 이 책을 잘 읽은 걸까?

이 소설엔 여러 삶의 모습만큼이나 여러 죽음의 모습이 있다. 신라이거나 백제 또는 가야의

군졸과 점령지의 민초들의 죽음은 그저 죽음으로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을 뿐이다. 하긴, 그들의 모습을 낱낱이 묘사한다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일 런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필력으로 그 죽음들을 묘사했다면 우린 이 책을 읽다가 토악질을 했을 런지도 모른다.

나는 줄곧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사금보다 야로보다 우륵이 목숨을 부지해야 할 명분은 왠지 빈약해 보인다. 이사금, 야로, 우륵 모두 늙은 목숨들이었다. 이사금은 전쟁터에서 죽었다. 전사는 아니었지만 오랜 날들을 목숨을 풍전인 전쟁터의 각박함 속을 살다가 갔다. 야로의 삶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준다. 가야의 백성이었지만 사그라드는 불꽃같은 가야에 목숨을 대기 보다는 신라의 활활 타오른 장작 냄새에 더 열광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이사부에게 토사구팽 당했다. 우륵. 살아야 소리를 낼 수 있으니 그는 살아서 소리를 내야 했을까. 그래서 우륵의 목숨에 대한 부분은 오히려 누추하다고. 하지만, 그 누추한 목숨의 의미를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금을 너희들에게 주마. 서라벌로 가져가라.

-너희들의 나라가 삼한을 다 부수어서 차지한다 해도 그 열두줄의 울림을 모두 끌어내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러니 늘 새롭고 낯설지 않겠느냐.

(page285)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우륵과 니문의 길은 같은 듯 다른 것이었다. 가야를 버리고 신라로 도망친 우륵을 따라갔다고 해서 니문과 우륵이 같을 수는 없다. 우륵에게 소리는 나라보다 우선이었고 니문에겐 나라가 소리보다 우선이지 않았을까. 나였다면 어땠을까? 우륵의 새로운 열 두 줄짜리 금을 이어받아야 했을까 아니면 옛 가야의 네 줄짜리 금을 지켰을까.

어쨌든,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우륵의 열 두 줄짜리 가야금은 아직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우륵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 때 황병기의 가야금 산조에 매료되어 노상 가야금 산조를 귀에 달고 살던 때가 있었다. 자라면서 고유의 악기보다는 서양 악기에 의해 음악을 배운 내게 가야금의 음색과 음의 세계는 너무 어렵고 고루했었다. 그럼에도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또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이해하는 척 하는 것보다 훨씬 까탈스런 음악 애호가처럼 느껴졌었기 때문인지 깊은 울림을 가끔은 이해하려 나름대로 어지간히 노력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유치한 발상이었는지 웃음만 나오지만 오늘은 오래간만에 황병기의 가야금 소리에 빠져 들어보고 싶다. 책을 덮은 지금도 여전히 코끝에선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책을 읽을 때처럼 마음은 우울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