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우리가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는 풀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헛간도, 가로등도
그리고 밤새 인적이 끊긴 작은 중앙로들도.
(Love Poem / 로버트 플라이)
로버트 플라이의 시 love poem이야말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으로 가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도록 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랑까지도 공유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결혼이라는 절차를 거쳐 남편과 아내로 태어난다. 그럼에도 다음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비극이다. 가장 빨리 후줄근해지고 가장 쉽게 피로해지는 길이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웃지 않곤 배길 수 없는 희극이다.(page113)
김별아의 ‘식구’는 두 번이나 읽은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을 즈음의 내 마음은 마치 겨울나무에 걸린 연처럼 사정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나의 ‘식구’들이 몹시도 견디기 힘든 장벽처럼 답답했고 손톱 밑에 끼어 빠지지 않는 가시처럼 아팠다.
그 다음엔 이 책을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사주고 싶어서 다시 한 번 더 읽어보게 되었다. 이제 푸르른 스물 한 살의 아가씨. 결혼 따위엔 관심도 없을 아들의 여자 친구가 나는 마치 내 딸처럼 너무 예쁘다. 인터넷 유머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미친년’이라는 말엔 ‘며느리를 딸이라고 착각하는’이라는 내용도 들어있어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는데, 뭐 그런들 어떠랴. 그런 마음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끼리의 이야기로 내치면 되는 것을. 나는 내심 저런 애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면 어떨까 라고 욕심을 내다가도 너무 어리고 여린 그 애를 보면서 그 아이가 너무 쉽게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진심이다.
이 책은 나한테는 그냥 말이 잘 통하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난 것처럼 개운했지만, 그 애한테는 외계어처럼 도통 마음에 가 닿지 않을 런지도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그 애에게 굳이 이 책을 사주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혹시 잘난 척 좋아하는 까탈스런 시어머니를 연습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조심스럽긴 하다.
아들만 하나를 키우다 보니 아들에게 이다음의 며느릿감에 대한 어미의 기대를 피력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는 며느릿감의 조건 중에 하나는 기왕이면 아들도 있는 집안의 딸이었음 좋겠다는 거다. 딸만 다섯이었던 친정은 남자라고는 아버지 한 분 뿐이셨다. 아버지가 곧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었으니 남자들에 대해선 달리 아는 게 없이 자라고 남편을 만나고 시집을 갔다. 내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의 문제는 남자들 입장을 고려하는 데 서툴다는 거였다. 다들 어리고 또 젊었을 때는 몰랐지만 내가 이만큼 나이 들으니 모이면 가끔 우리의 문제를 끄집어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럴 때 결론은 자식은 아들도 딸도 있어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마무리가 되기 마련인데 이 책 ‘식구’를 읽으며 나의 생각이 꼭 틀리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와 딸 사이에는 혈연으로 얽힌 친밀감과 함께 이성간의 긴장이 동시에 존재한다. 아이 아버지에게서 ‘남성’을 학습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딸도 아버지에게서 ‘남성’을 배운다. 그가 주는 사람의 달콤함과 그가 가진 권위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갈등하면서 앞으로 만날 남성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짓는다.(page72)
아들과 남편은 심하게 닮았다. 가끔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이들 부자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싱크로나이즈 선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즈음은 남편의 어떤 행동들을 보면서 문득 아들이 떠오른다. 노인네들이 ‘씨 도둑질은 못 한다’라고 하시던 말뜻을 알겠다. 그래서 남편이 미우면 아들의 남편 닮은 짓도 같이 미워지는 건 아닐까. 그 미움 속엔 남편에 대한 미움을 가득 담아 아들이 남편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기왕이면 남편과 아들 사이가 늘 돈독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아들한테 남편의 흉을 보지 않는다. 아들한테 아버지가 존경받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내가 남편의 아내로 사는 이상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바램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남성’을 학습한다. 가족 속에서 자신이 감당해야할 역할을 배우고 그를 흉내 내는 사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중략)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그만큼 자신도 존경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해’가 없는 존경이란 무의미한 도식이다.(중략)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 내가 만난 유형은 딱 두 가지였다. 존경하거나, 혹은 미워하거나 (중략) 아버지와 아들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관계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상징으로부터 구체로 우리 곁에 하강할 것이다.(page77-78)
문학산에 가면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다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가렸으니 아는 사람이 스쳐가도 알아보지 못 할 것 같다. 그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도 친정엄마는 용케 알아보는데 가끔 친정엄마는 아는 체 하는 딸을 데면데면하게 대하신다. 그럴 땐 나도 ‘친구’같은 모녀사이가 잠시 부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는 엄마와 내가 적당히 멀고 또 가까운 사이임에 만족하다. 엄마 나름대로의 세계를 인정해 드리는 것 그리고 이미 오래전 하나의 가정을 이뤄 독립한 객체로 존재하는.
사실,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존재는 딸의 눈에 더 확연히 드러난다. 딸은 어머니를 통해 자기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를 예상한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와 정 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까봐 두려워한다.(중략)어떤 어머니와 딸은 다정한 ‘친구’를 넘어서 거의 일란성 쌍둥이 같다(중략) 어머니는 딸의 매니저이고 딸은 어머니의 영원한 어린아이다.(중략) 하지만, 비밀이 없는 사이는 성숙한 사람의 인간관계가 아니다. 사람 사이에는 엄연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은밀한 영역 속에서 휴식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중략) 어머니와 딸 사이에는 친밀감과 함께 적당한 경쟁심이 자리해야 옳다.(page82)
공부방을 한 지 벌써 14년차이다. 그동안 많은 아이들과 엄마들이 우리 공부방을 거쳐 갔다. 참 많은 엄마와 아들들의 모습을 보았다. 물론, 그 속에 나와 우리 아들도 들어있다. 엄마와 딸의 관계와 달리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아버지와 엄마의 관계에 의해 많이 좌우가 된다는 생각이다. 유난히 아들에 집착하는 집의 속사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남편으로부터의 결핍을 아들로 채우려는 엄마의 집요함이 숨어있다. 때문에 엄마와 아들 사이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작가도 이야기 했을까.
하지만, 오히려 그 ‘다름’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더욱 집착한다. 단순히 보부아르의 ‘거세 콤플렉스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향의 남성을 아들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중략)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아버지나 남동생. 또는 남편과 달리 그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에 빠진다. 어쩌면 여성으로 태어난 내게 불친절하고 가혹했던 세상에 대한 복수나 보상의 심리도 있을지 모르겠다.(page87-88)
이 책의 내용은 가족에 대해 아주 적나라하고도 솔직하다. 그 솔직함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프고 그리고 위안을 받는다. 이만큼 담담하게 그리고 이만큼 객관적일 수 있도록 글을 갈무리하려면 작가는 또 얼마나 마음의 단련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긴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만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불현듯 튀어나와 발을 헛디디고 마음을 쓸어내리게 하던 상념들을 이제는 놓아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내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페이지 한 귀퉁이에 한 사람씩 적어보았다. 결국 그들은 내게 ‘식구’라고 불러지는 사람들이었다.
가족이란 결국 절대 절명의 가치나 인류 최고의 제도이기 이전에 ‘관계’이다.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주고받고, 밀고 당기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엎치락뒤치락 하는 관계에 다름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네가 나와 같으려니 하는 것이다.(page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