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 문덕수 시집 ‘아라의 목걸이’

 

 

옛 아라가야 도항리 고분에서/ 만삭된 여항산이 제 모습 찾아 걸어나오고/ 뒤따라 남강南江이 한 궁녀宮女의 반물치마끈에 묶였다가 풀린다// 제 자리 찾아 발돋움한 여항산/ 770미터 높이로 고개 들어 분지를 내려다보니 악양루도 보인다/ 아슴푸레 변두리를 더듬는 남강 南江이 불꽃무늬굽다리접시의 운두형으로 몇 굽이 휘니 북녘이고/ 내려와 허리 푸는 시늉을 하니 낙동강과 합수한다// 옛 아라가야 잠자는/ 도항리 고분 안방들 텅 비었지만 금빛 무쇠의 허공/ 무도 문고리 잡고 나와서 들과 강물로 이어지고/ 구릉 넘어 숲 속엔 신읍臣邑들 넉넉하다// 굽다리접시의 파편들 밤마다 반딧불처럼 날고/ 짧은목항아리는 옆으로 누워 받치고/ 둥근고리칼, 토기, 그릇받침들은 빈 채로 꼿꼿하게 서서/ 받들고 있다 아라가야의 하늘을...[도항리 고분 全文 page78]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는 20년 전쯤엔 내게도 깊은 인연이 있던 곳이다. 거의 잊고 살지만 가끔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내 젊은 시절의 한 때가 오롯이 한 점으로 찍히는 이름 가야. 당시 조용하고 맑은 읍내엔 목욕탕 건물이 가장 큰 건물이었고 아이와 목욕을 나갔다 들어오는 길엔 일부러 꽤나 먼 흙길을 걷곤 했었는데 그 길가에 낮은 구릉처럼 펼쳐져 있던 고분들은 또 왜 그렇게 마음을 시리게 했던지 그 때 내 등에 업혀 말상대가 되어주던 아들은 군복무 중인 장정이 되었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오늘 문득 문덕수 선생님의 시집 ‘아라의 목걸이’를 펼쳐놓고 잠시 상념에 젖다보니 지나가버린 그 어느 한 때의 시간들이 이젠 그립다.

 

 

가야(伽倻：加耶, 伽耶)·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이라고도 한다. 한때 가야사는 4세기 후반 무렵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이를 식민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說)로 왜곡되기도 했다(→ 색인 : 임나일본부설). 그러나 그후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축적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억설을 극복하고, 현재 가야사 자체의 독자적 발전과정이 체계화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가야사는 대체로 5세기 후반을 경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김해지역의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후기는 고령지역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의미한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아라가야(阿羅加耶)는 삼국지에 전하는 변한 안야국을 기반으로 함안지역에서 성장, 발전한 가야이다. 아나가야, 안라국, 아시라국으로도 불렸으며, 가야 전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남아 있었던 세력이다. 바다와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함안지역은 교통의 요지로서 가야의 모든 지역들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곳이다. 아라가야는 통치자들의 거대한 무덤을 따로 만들었으며,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전쟁을 할 때 이에 대항하여 싸울 만큼 힘을 갖추고 있었던 큰 세력이었다.

 

아라가야의 최전성기 때의 영역은 현재의 함안군 일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남강 연안의 의령, 진주지역까지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후기는 6세기 전반대로서 이전 단계까지 산발적으로 축조되어 왔던 덧널무덤이 자취를 감추고 앞 단계에 유행한 대형구덩식돌덧널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무덤양식인 옆트기식돌방무덤의 축조가 성행한다. 토기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나 불꽃무늬굽다리접시가 완전히 사라지고 뚜껑접시, 한 줄의 네모진 굽구멍이 뚫린 손잡이굽다리접시와 고령지방 양식의 토기가 유입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시기는 고령의 대가야와 함께 후기 가야연맹의 핵심적인 존재로서 남부 가야지역에서 맹위를 자랑하던 아라가야는 말이산고분군의 지속적인 축조로 보아 독자적인 정치체를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라가야는 6세기 이후 가야세력에 대한 신라의 계속적인 압박에 대항하기 위하여 안으로는 가야세력의 결속을 꾀하고 밖으로는 백제, 왜와도 손잡아 부흥에 앞장서게 된다. 그러나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강력한 정복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사라지고 만다.

[출처: http://myungjul.new21.org/doja...에서 부분 발췌]

 

 

시를 읽는데 형식이나 00이즘이 중요할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비평을 위한 시 읽기가 아니라면 형식이나 00이즘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마음속으로 쏙 들어오는 시, 노래 듣듯 편하게 읽히는 시들은 시를 읽을 당시의 독자의 정서와 맞아 떨어지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때로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읽어보면 예전의 그 감흥을 되살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처음엔 잘 읽히지 않았지만 훗날 다시 보았을 때 눈이 확 떠지는 거 같은 놀라움도 시의 독자라면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내가 이 시집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도 ‘함안’이라고 하는 특정한 지역에 대한 내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덕수 선생님의 고향이 함안인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아라의 목걸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아라가야’를 떠올린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라국의 궁터 가야 도항리 33호분 고분에서/ 2천연이나 잠자던 목걸이가 지렁이처럼 눈뜨고 나왔다/ 불그레한 마노는 왕후의 목덜미빛이요/ 토기 굽다리에 뜨거운 무늬를 뚫은 불꽃이다/ 파란 유리 구슬은 안라국 어린 공주님 눈빛이요/ 왕궁 지붕마루에 내려와 앉은 하늘이요/ 여덟 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장수말이 마신 물빛이다/ 저 자잘한 비취빙 수정알의 바늘귀에는/ 지금도 후기 가야 여러 나라 맹주의 숨길이 흐른다/ 아라가야 궁터 도항리 33호 고분에서/ 2천년이나 꿈꾸다가 눈을 뜬 저 목걸이는/ 지리산 숲속에서 구불구불 흘러내려 안라땅을 적시는 남강이요/ 한티 재를 넘어 마산 남쪽 바다로 통하는 바람길이요/ 여항산 멧부리 남동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다/ 아라가야를 지금도 두르고 있는 무성한 성벽이다//

[안라국의 목걸이 全文 page79]

 

 

 

 

 

 

 

이승용 시집 ‘춤추는 색연필’

 

 

비 오고 난 뒤라서 그런가 오늘 햇살의 결이 참 섬세하다. 공부방 베란다에서 건너편 청량산을 바라본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로 정말로 손바닥만큼 보이는 그 초록의 숨소리도 오늘은 한결 색이 짙어진 느낌이다. 출근하면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이승용 시인의 시집을 가방에 넣었다. 지난 주 출판사에 주문해서 받아놓은 것이다. 왠지 오늘 같은 날에 읽으면 좋을 시들이 들어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월간 시문학 시집 소개란에서 이승용 시인의 새 시집 ‘춤추는 색연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한동안 준비 중인 새시집의 제목을 정하지 못 해 고심했던 때문이지 이승용 시인의 편안한 시집 제목이 내심 부러웠다.

 

 

나이 마흔 아홉/ 젊은 날 뜨겁고 차가웠던 열정/ 다 살랐다고 생각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은 밤까지/ 하루 몇 번을 달구고 또 차갑게 한다//

연모하던 뱀처럼 뒤척이는 몸부림/ 연서 한 장 보내지 않았는데/ 오그라드는 달팽이처럼/ 수줍어 붉어지는 얼굴//

애달픔도 지워졌다 했는데/ 불면의 밤은 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잊고자 하는 기억 지우려 애써는데/ 이제 와 깜빡깜빡 잘도 잊는다//

갱년은 이렇게 남모르는 어둠 한 자락/ 덮고 살아가는 일인가 보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배우며/ 더듬이 키우는 일인가 보다//

[갱년의 문턱 全文 Page42]

 

 

이승용 시인은 나를 기억하지 못 할 거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단 한 번이었던 이시인과의 만남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시문학 시인들의 문학기행에서 이시인과 나는 같은 방을 썼다. 나는 어찌 등단은 했지만 변변하게 문학 수업도 받지 못 했던 생짜 초보 시인이었다. 오죽하면 등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인사마저도 어찌하는지 몰라서 우왕좌왕이었고 하필 유일하게 몸담고 있던 문학 동인과의 인연도 개운하지 않게 끝낸 상태였던 때라 의기소침한 상태였고 기라성 같은 시문학의 선배 시인들께는 잔뜩 주죽이 들어있었던 참이었다. 문학기행 첫 날 저녁 있었던 시낭송회에서 나는 나의 졸 시를 한 편 낭송했다. ‘들개’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이런저런 내 상황에 감정이 복받쳤던 모양인지 시낭송 도중 잠시 목이 메었다. 그날 저녁 숙소에서 이시인이 내게 그렇게 감정조절을 못 해서 어쩌느냐고 좀 야단을 쳤던 거 같다. 연배야 나와 그다지 차이가 나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나보다 한참 등단 선배인 이시인의 야단 앞에서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로 시인의 감정 표현은 과연 어때야 하는 건지가 나름의 숙제가 되기도 했었다.

만약에 지금 그 때와 똑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대처를 했을까. 잘 조율되지 못한 감정이 유치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거 그것은 최소한 솔직한 시를 쓰고 있다는 소리이니 부끄럽지는 않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이승용 시인도 나처럼 갱년의 문턱에 발을 얹었거나 이미 넘어선 나이가 된 듯하다. ‘남모르는 어둠 한 자락을 덮고 살아가는 갱년’의 나이. 사람도 시도 변한다는 것을 이 시집에서 오롯이 읽어낼 수 있으니 ‘춤추는 색연필’은 마치 한 사람의 연대기를 보는 느낌이다.

 

 

그는 가끔/ 어느 사막 끝에라도 다녀왔을/ 모래바람을 일고 다닌다/ 아침해 떠오르는/ 골진 시간을 찾아/ 낯설게 돌아오는 그의 몸엔/ 화산처럼 거대한/ 불구멍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가끔/ 북구해라도 다녀옴 직한/ 칼바람을 휘두르고 다닌다/ 고체의 밤이 내리는 저녁강을 따라/ 냉소 띤 얼굴로 돌아오는 눈동자엔/ 얼음처럼 차가운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가 가끔 환태평양을 지나/ 그리움 지는 시간 속으로/ 고단한 손을 흔들며 돌아오는 날엔/ 현기증 나도록 자유로웠던/ 붉은 가슴과 눈부신 어깨/ 힘껏 껴안으면/ 축축한 온기 흠씬 베어나왔다//(1989년)

[골진 시간을 찾아 全文 page81]

 

 

가끔/ 몸이 우는 소리 들리네// 울음은 속으로 속으로/ 애써 아닌 척 하던 지난날// 울지 못한 그 밤을/ 이제야 우네// 울음이 때로 약이 된다는 걸/ 고여서 상했던/ 슬픔을 털어내고 있네// 순하디 순한 그때 마음이/ 이제야 소리를 털고 있네// 가벼워지는 몸/ 소리내는 몸/ 살아나는 몸//

[몸이 우는 소리 全文 page27]

 

 

시집엔 ‘골진 시간을 찾아’와 같이 연대를 밝힌 작품이 있는가 하면 굳이 연대를 밝히지 않은 작품들이 있다. 시의 분위기를 보건대 연대를 밝히지 않은 작품들은 근래의 신작일 거라는 느낌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승용 시인의 시도 많이 달라졌다. 호흡도 달라지고 어조도 달라졌다. 한결 견고하고 차분해진 시인의 시선과 숨결을 시를 읽으며 느낀다. 때문에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이승용 시인의 시적 연대기도 함께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거다. 다음 시집에선 훨씬 더 견고한 모습을 보여주겠지? 내가 이승용 시인을 주목하게 된 이유다.

 

 

 

정윤천 시집 - 십만 년의 사랑

 

경첩

 

정윤천

 

 

너를 열고 싶은 곳에서, 너에게로 닿고 싶을 때

아무도 모르는 저 은밀한 애제의 지점에서

쇠나비 한 마리가 방금 날개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그의 차가운 두 닢이 바스락거리기라도 하듯이

한번은 펼쳐주어야만, 나는 너에게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너를 한번 열어, 너에게로 간다는 사실은

어딘지, 너 이전의 지점 같기도 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긴 날개의 쇠나비 한 마리가

비로소 활짝 펼쳐주었다는 일이다

사랑의 경계에는 한사코 쇠나비 한 마리가

접은 날개의 기다림으로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대합실 부근

 

정윤천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내 마음이야 어디서든 태워주거나 내

려줄 수도 있었겠지만. 몇 대 쥐어박아보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

았겠지만, 이제는 끝난 일이야! 어금니를 깨물어도 보는 거지

만. 정류소를 빠져나와 꽃가게 앞을 지나고, 정자네 해장국집 옆

골목을 돌아서다가. 거기 가슴팍 다친 승냥이 한 마리로 너도 그

렇게 서성거려본 적이 있는.

 

십만 년의 사랑

 

정윤천

 

1.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년의 해가 오르고

십만 년의 달이 이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려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년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2.

어쩌면, 십만 년 전에 함께 출발했을지 모를

산정의 별빛 아래

너와 나는 이제야 도착하여 숨을 고른다

 

지상의 사람들이

하나둘 어두움 속으로 물을 걸어 잠그기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우리는 이런 비탈진 저녁 산기슭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는가

여기까지 오는 데 십만 년이 걸렸다

 

잠들어 가는 지상의 일처럼 우리는 그만 잠기어도 된다

더 이상의 빛을 따라나서야 할 모든 까닭이 사라졌다

 

3.

천 번쯤 나는 매미로 울다 왔고

천 번쯤 나는 뱀으로 허물을 벗고

천 번쯤 개의 발바닥으로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으리라

한번은 소나기로 태어났다가

한번은 무지개로 저물기도 하였으리라

 

4,

물방울들이 모여 물결을 이루는

멀고도 반짝이는 여정을 우리는 왔다

 

태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난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불려지던 나비처럼

날고 또 날아올라서 여기까지 왔다

 

바다인들 거슬러 오르려는 거꾸로 붙은 비늘처럼

금빛의 역린같이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창마다 설치한 채양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한 밤이다. 문만 닫아걸면 세상천지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는 집이건만 유독 빗소리에만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토독거리며 띄엄띄엄 떨어지던 빗방울이 곧 우두둑 우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가 싶더니 콩을 쏟아 붓는 것처럼 쉴 새 없이 퉁퉁거린다. 이쯤이면 가뜩이나 잠귀가 밝은 나는 잠을 접고서 밤 새 뒤척이는 수밖에.

 

책상 위에서 며칠. 그리고 가방 속에 또 몇 날인가를 넣어가지고 다니던 정윤천 시인의 시집 ‘십만 년의 사랑’을 꺼내다 다시 읽는다. 가끔 정 시인께 팬임을 자처해가며 알아주십사 말도 안 되는 떼를 써보기도 하지만 정말로 정윤천 시인의 시는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다. 절절하지만 담백한 감성과 찐하지만 싫증나지 않는 감정의 분출 그리고 독특한 정시인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시어들이 오랜 시간동안 정윤천 시인의 시 속에 즐겁게 머물게 하는 이유이다.

 

오래간만에 정윤천 시인의 안부를 들은 것도 반가운데 새 시집까지 만나고 보니 기쁨이 배가 되고도 남는다. 한희원 화가의 그림과 절묘하게 어울어진 이 시집은 일변 화첩 같기도 하고 일변은 시집 같기도 하다. 일전에 정시인과의 통화에서 아무래도 대박 날 조짐이 보인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이 시집엔 책을 펼치기 전부터 사람의 마음을 끄는 어떤 장치가 있다. 바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파란 밤마다와 그 바다를 떠가는 배 한 척이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배 안의 누군가도 별 같은 등불을 들고 있다. 그가 지금 막 십만 년의 사랑을 찾아 멀리 보이는 해안으로 다가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는 이제 막 사랑 하나를 내려놓고 돌아선 길일까. 시인의 감성이 그림을 통해 절절하게 시를 읽는 이에게 넘어오는 순간이다. 이 감성의 소통은 시집을 읽는 내내 여일하게 이어진다. 시도 그림도 모두 맘에 쏙 박힌다.

 

시를 쓰면서 또한 참 많은 시를 읽는다. 그리고 어지간히 많은 시집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시를 쓰는 여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밤마다 배개맡에서 조근조근 읽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시집이었다. 물론, 근래 들어 엄청나게 고단해진 내 일상이 아직까지 그 일을 시도해 볼 여력을 허락하지는 않지만 머지않아 곧 이 일을 실행해 볼 참이다.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고 하려나? 그렇지만 정윤천 시인의 시집 ‘십만 년의 사랑’을 읽다보면 눈으로 읽기보다는 소리 내어 읽어보고 싶어지고 그리곤 자꾸자꾸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 나름의 숙제를 한 개 만들어 마음에 새겨두고 비오는 한 밤을 내내 뒤척인다. 퍼붓는 빗소리의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그 여자의 남편은 물론 코를 골며 단잠을 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