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위로하다 / 오거스터스 네이피어. 칼 휘태커 공저

 

 

왜 가족은 변하고자 하는 진정한 욕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래 상태에서 기존의 역동을 고수하는 것일까? 만약 가족이 변하고자 반복적으로 노력하는데도 고통과 실패를 맛본다면 또 다른 시도는 두려운 것이 된다. 가족이 모두 용기를 내어 가족치료를 시작했다가 진심으로 노력했는데도 또 실패한다면? 그러면 완전한 절망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가족은 겁이 나 움츠러든다. 따라서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page 365-366)

 

올 해 나는 방송대 가정학과 공부를 시작했다. 전공은 가정 관리학. 가정 상담 쪽으로 공부를 할 계획이다. 마침 유아 보육교사 관련 과목도 수강과목에 들어가 있어서 두 가지 공부를 함께 하고 있다. 힘은 들지만 가정학과 공부를 시작한 후 가족에 대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결론들을 많이 수정하게 되었다. 처음엔 자격증을 따서 활용해 볼 작정이었지만 막상 공부를 하고 있는 지금은 이 공부를 계속하면 나도 좋은 할머니, 좋은 시어머니에도 도전해 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이젠 성인이 되었다. 할머니도 시어머니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내 자신의 모습이지 않은가. 아들한테도 또 나 스스로도 행복하게 살아야한다고 말 해왔는데 좋은 가족관계를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을 공부하고 있으니 내가 원하는 미래에 한 발자국 가까워진 것이라고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 그러던 참에 읽게 된 이 책 [가족을 위로하다]는 내 공부에 대한 자긍심과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으며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그 목표를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족들은 그들에게 작용하는 여러 가지 영향력으로 인해, 그리고 가족 스스로의 결정으로 인해 체계화된 일정한 삶의 모델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그 가족만의 독특한 것이고 다른 어떤 것으로든 대체할 수 없다. 가족은 일정한 감정의 기복을 경험한다. 가족원들은 행성의 궤도처럼 서로 일정하게 움직인다. 가족은 하나의 세계이고 하나의 태양계, 즉 소우주이다.

(page 166-가족 내 스트레스, 갈등, 분쟁, 혼란- 중에서)

 

우리 집안이 그리 풍족한 집안도 아니고 성공한 인사도 없이 그저 평범한 편이라 며느리를 들이는 데 딱히 어떤 조건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들에게도 아들이 사랑하는 아가씨면 엄마도 무조건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기왕이면 하고 바라는 것은 있다. 부잣집 딸이 아니어도 되고 좋은 학벌에 좋은 직장이 아니어도 괜찮고 외모가 뛰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부모가 이혼하지 않은 집의 딸이었음 좋겠다는 거다. 나도 결혼해서 살고 살다보니 또 이혼을 생각할 만큼 위기도 있었지만 자식을 둔 사람들의 이혼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복잡하고 상처가 크다. 부부 당사자의 상처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입는 상처가 무척 크다는 거다.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고 해도 흔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부모의 이혼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자녀의 결혼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이 책은 가족을 ‘각 개인의집합체가 아닌 유기체처럼 조직화된 하나의 체계“(page107-가족은 심리적 유기체)로 보고 있다. 어쨌든 “부부문제가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page 117-가족은 심리적 유기체)고 정신분열증 환자 가족의 임상실험의 예를 통해 얘기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조건은 청소 미화원이라도 괜찮으니 일 하는 아버지를 둔 집안의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 열심히 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모든 성실한 삶의 잣대가 되어줄뿐더러 가장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배웠다는 소리가 될 거다. 마지막 한 가지는 기왕이면 딸도 아들도 있는 집안의 딸이기를 바란다는 거다. 나는 딸만 다섯인 집안의 장녀로 자랐다. 남자에 대해선 아버지 이외엔 학습할 기회가 없이 성장했고 변변히 연애를 해보지도 못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다보니 50을 바라보는 지금도 남자(남편)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공부방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보면 딸만 있는 집의 딸들과 남동생이든 오빠든 남자 형제가 있는 집안의 딸들은 생각도 행동도 조금 다르다. 때문에 나는 우리 아들이 남자 형제도 있는 아가씨를 배우자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는 거다.

 

대개 결혼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의 필요와 갈망을 모두 채워줄 수 있는 이상적인 인물-부모, 치료자, 연인, 친구, 동료-이 되어줄 거라는 꿈을 안고 시작된다. 특히 성장이라는 어렵고 완성되지 않은 임무를 완수하도록 배우자가 도와주길 바란다. 그리고 확실히 연인은 서로를 돕는 존재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중략)

놀랍게도 결혼에는 치료효과가 있다. 결혼한 사람은 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평균적으로 수명이 더 길다. 이는 삶이라는 짐과 스트레스를 공유할 사람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혼은 사람들이 변화하게 한다. 더 세심해지도록, 더 배려하도록, 더 책임감을 가지도록, 배우자의 욕구를 더 인식할 수 있도록 말이다.(중략)

하지만, 결혼생활을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두려워하며 배우자가 모든 걸 해결해주길 바란다. 배우자가 마법의 토템, 즉 안정감을 제공해주길 바란다. 또한 배우자가 환희, 동료애, 실질적인 도움,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해주길 원한다. 우리는 결혼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page 236-237-배우자를 부모에 투사하는 부부-중에서)

 

나는 늘 결혼할 당사자도 중요하지만 그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부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때문에 우리 부부도 완벽할 수 없지만 최소한 삐뚤어진 부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지껏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런 생각들에게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생소한 개념일 수 있는 ‘가족치료’의 임상경험을 정리해놨지만 참 의미심장한 내용들이다. 미국의 중상층 가정의 상담내용이라 우리 문화와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읽어보니 우리의 모습과 다른 점이 없다. 미국의 가정도 우리의 가정과 똑같은 문제로 아파하고 갈등한다는 거다. 자식과의 문제도 그렇고 부부사이의 문제 역시도 마찬가지라 의외로 내가 가지고 있던 ‘관계’들을 정리해보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것은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과 부모의 문제일 것 같았지만 부부에게로 대부분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은 남편과 아내라는 뜻일 거다. 부부가 문제와 갈등에 고민할 때 발생하게 되는 문제들을 되짚어 보여주고 있는데 읽는 내내 나의 모습을 반추해보기도 하고 주변의 인물들의 삶을 유추해 보기도 했다. 특히, [11장의 부부위기와 외도]부분은 배우자의 외도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솔직하면서도 아프고 또 시원한 해답을 줄 것 같다.

 

부부가 문제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독창적인 전략들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 있는 방식은 바로 외도이다. 외도는 부부가 결혼의 교착상태를 깨기 위한 절망적인 몸부림이며 부부를 재난의 위기로, 또는 재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중략) 외도에 대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논리는 꽤 간단하다. 불륜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저지르는 ‘나쁜 짓’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이러한 도덕적인 설명은 아주 복잡한 사건을 심각하게 왜곡시킨다.(중략) 부부가 더 많은 에너지와 흥분을 갈구하는 방법이 성관계이긴 하나, 사실 그건 단순히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좀 더 종합적인 탐색이다.(중략) 외도는 부부가 과거에 나눴던 대화보다 훨씬 깊은 대화를 요구한다. 초기 ‘폭발’은 ‘모험가’가 ‘무고한 희생자’에게 제멋대로 왜곡시켜 내보내는 강력한 메시지다.(중략) 외도는 배신이라는 쓰라린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상처로 남아 잘 치유되지 않거나 전혀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다. 부부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잠재 가능성이 있다 해도 말이다. 종종 외도는 결혼의 종말로 이어진다. 부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이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죄책감과 결백을 논하며 끔찍한 싸움에 휩싸여 분열된다. ‘모험가’는 깊이 상처를 받은 ‘무고한 희생자’에게 비난을 받고, 둘 다 속으로는 은연중에 이해받고 용서받고 받아들여지길 울부짖지만 서로의 자존심은 단호하고 확고해진다. 부부는 겁에 질려 자기방어를 하느라 점점 자신의 입장만 고수하게 되고 험악하기만 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둘 사이의 불화는 점점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충동적으로 시작된 외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쓰라린 결혼생활의 매력적인 대안처럼 보이고,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이혼은 고통의 종식을 약속하는 듯 보인다.

(page297~319 -11. 부부위기와 외도-에서 부분 발췌)

2012-04 웃는마음 / 이철수

 

 

염주끈이 풀렸다

나 다녀간다 해라

먹던 차는

다 식었을 거다

새로 끓이고,

바람 부는 날 하루,

그 곁에 다녀가마

몸조심들 하고

기다릴 것은 없다.

(page 189 坐脫)

 

무엇인지 모를 열망에 휩싸여 있었던가. 아님, 오래도록 벗어버리지 못 하는 일 욕심이거나 일용할 양식에 대한 근심이었거나 암튼, 나는 내내 조바심을 하고 있었다. 이철수 작가의 ‘좌탈坐脫’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돈다. 내내 괴롭던 편두통이 가라앉았다. 참 효과 있는 두통약을 만났다.

 

지천을 환하게 밝히던 꽃빛도 그 색이 바랜 느낌이다. 세상은 바야흐로 초록의 세상. 아침마다 어제보다 조금 더 진해진 초록을 만나는 재미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 속에서 나만 봄을 타는 것인지 내내 시름거리며 기운을 못 차리고 있다. 봄을 타느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짧은 계절에 대한 여운도 아니고 그렇다고 계절이 주는 삶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 때문도 아니니 그저 스스로에게도 조금 민망하다고 해야 할까. 남들은 봄을 어찌 타려나 모르겠다. 나야 늘 이 계절을 한바탕 이렇게 앓고 지나간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후 생긴 계절병이다. 시험이 끝나고 아이들이 바뀐다. 자식처럼 마음을 주고 공들였던 아이들이 후루룩 날아가고 쭈빗거리며 새로운 아이들이 찾아와 자리를 잡기까지 내내 이렇게 맘을 잡지 못 한다. 벌써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은 시간이건만 늘 초보처럼 당췌 길들여지지 않는 시간들이 올해는 유난히 더 힘들다. 힘들고 그리고 외롭다.

 

일요일엔 길상사엘 다녀왔다. 오랜 벼름의 끝. 빽빽이 걸린 연등이 마당 가득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는 절집을 돌아보며 한 발자국만 내려가면 와글와글 들끓고 있을 세상을 잠시 생각했다. 조금 비껴 앉는다는 거 별거 아닌 그 일이 절집을 둘러보며 새삼 참 용기 있는 일이다 싶었다. 즐기는 것과 누리는 것 그리고 향유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절집에서 마주친 모든 것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들을 향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건물도 나무도 사람도 하다못해 한낮의 태양까지도. 오래도록 가보고 싶었던 절집을 다녀오면 마음이 다소곳해지리라 기대했건만 마음을 여전히 고집 부리는 송아지 같다. 마음이 문제다 마음이.

 

이것이 내게는 재앙이고 종기이고 화이며, 질병이고 화살이고 공포이다. 이렇듯 모든 욕망의 대상에는 그와 같은 두려움이 있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page29/법정 옮김/(주)도서출판 이레]

 

혼자서 줄을 그어가며 읽던 이 불교경전이 내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더운 날 손에 든 부채처럼 싱그러운 바람을 마음속으로 불어넣어준다. 감사하다. 이 책 ‘웃는마음’에서 이철수 작가는 불교인이 아니라고 말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과 글에서 풍기는 선(禪)의 냄새는 참 맑고 향기롭다. 법정스님의 향기도 이철수 작가의 향기도 솔잎향이 난다. 맑다.

 

‘마음으로 웃어야

웃는 거지요.’

 

책에 함께 든 하얀 손수건을 펼치니 이 글귀가 나온다. 핀으로 벽에 손수건을 걸어놓고는 바라보며 빙긋 웃어본다. 아주 담백한 그림이다. 마음으로 웃는다는 거. 그럴수만 있다면야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으려고. 왠지 책 내용도 담백하겠지 하는 기대가 생긴다. 그렇게 이 책은 나와의 의미 있는 만남을 시작했다.

 

일단 이철수 작가의 판화그림부터 실컷 봐야지. 작년이었던가. 이철수 작가의 판화로 제작된 달력을 사고 싶어서 몇날 며칠을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렸다. 새해가 되면, 연초가 지나면 세일이라는 걸 하겠지 그럼 그때 사야지 뭐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에 무슨 대단한 안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살림이 격조 있는 살림살이도 아닌 터라 어느 정도의 금액을 치러야 구입할 수 있는 달력이 가지고 싶은 마음만큼 비쌌다. 결국 아쉽게도 달력은 구입하지 못 하고 말았다.

오늘 책 속에서 만나는 판화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그야말로 달달해져선 식탁위에도 펴놓았다가 거실바닥에도 펴놓았다가 컴퓨터 책상에도 펴놓았다가 책을 가지고 옮겨 다니며 그 달달함을 만끽했다. 빌빌거리던 내가 그나마 눈을 반짝거렸던 시간이다.

 

“영혼이라는 것도 살아 있을 때의 얘기라고 생각해요. 죽음 이후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산산이 흩어져갈 뿐이라고 생각해요. 완전한 무(無)! 그런 거.”

"살아 있는 지금, 하루하루를 절정으로 사는 일이 중요하지요. 낱낱의 삶이 소중하고 존귀하다는 생각, 그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애써 살면 되겠다 싶어요. 그저 ......”

(page191)

 

지금을 사는 거. 절정으로 사는 거.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삶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하지만, 표현하기엔 조금 단단하고 무거워서 남의 앞에 ‘퍽’하고 내려놓아야 하는 말 아닐까. 이철수 작가가 참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는 것에 나는 안심이 된다. 그가 생활인이어서 좋다. 자신의 삶이 모범적이지 않다고 말 하는 겸손이 좋다. 그가 농부라서 좋고 판화작가라서 좋고 그리고 그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그의 구도자세가 좋다.

작품이 아니라 ‘말’을 했다는 사실이 곤혹스럽다고 작가는 얘기했지만 작품을 보는 사람은 작품을 보는 대로 그의 ‘말’을 읽는 사람은 읽는 사람대로 살면서 잠시 숨고를 시간이 되리라.

 

벚꽃 하얗게 핀 날,

지나던 동네 아낙 한마디.

창경원이네유!

그 자리에,

창경원 벚꽃

하얗게 쏟아지는 소리!

[page42-43 '벚꽃봄날’]

 

똥 푸다.

진한 구린내!

-똥 선생 본적이 어디시오? 물으면

똥이 내 이름 대지 않았겠는가?

그 냄새!

독한 사람 냄새.

[page 72 내 똥]

 

위의 글들은 판화와 곁들여서 봐야 제 맛인데 글로만 표현하려니 아쉽다. 그의 판화가 가지고 있는 재미. 그의 판화에 담겨 있는 철학. 무엇보다도 그의 소박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품들인데 말이다.

책을 읽고 정리를 하고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정돈되었다. 텃밭에서 남편이 내 손바닥만하게 자란 상추를 솎아왔다. 야들야들한 이파리를 만지니 투명판 풋내가 핏줄을 타고 도는 거 같다. 기운이 조금 난다. 숫타니파타는 그랬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그리고 이철수의 ‘웃는마음’에선 이렇게 조근거린다.

 

넝쿨콩 한 알이

목욕탕 타일 바닥에서

혼자 싹을 틔웠다

생명은 ‘내재율’이다

얻을 미래가 없어도

오늘 당장 시작한다

[page 100 콩싹]

 

마음에 잔뜩 욕심을 담아 무엇 하리 살아있으니 좋은날이다.

 

 

2012-02 하이퍼시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함(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즘)을 형성한다. 다시점의 이이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김규화.심상운-편집자 발간사 中 일부 발췌 page 5-6]

 

발간사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구현방법을 읽어보고서야 책에 수록된 시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이브리드. 링크. 네트워크. 敍事. 초월. 變換. 이중구조. 연출자’ 하이퍼시를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추려내 본 낱말들이다. 무척이나 초현대적인 단어라는 느낌이다. 문학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뉘앙스가 더 많이 풍긴다고 해도 틀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 특히 敍事라는 낱말에 머릿속이 명징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그동안 왜 하이퍼시는 길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시의 운율보다는 자칫 산문적인 느낌으로 읽히는 시를 읽으면서 줄곧 풀지 못 했던 문제였다. 초월의 이미지도 따라가기엔 너무 보폭이 크고 넓어서 영 어렵기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9가지의 하이퍼시 구현방법을 읽고 나니 비로소 내 문제의 답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 같다. 아무튼, 나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 더 알아보려는 착한 학생의 마음으로 하이퍼시의 문 앞에 서 보았다.

 

내가 하이퍼(hyper)시를 처음 만난 건 월간 시문학을 통해서이다. 매달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 시론을 읽으며 하이퍼 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배움이 부족해서일까 하이퍼시는 여전히 내겐 너무 어렵다. 한국하이퍼시클럽 동인들이 작품집 ‘하이퍼시’를 출간했다. 하이퍼시에 대해 궁금해 했던 참이라 반가운 시집이다. 물론, 이미 시문학에 게재되어 만나본 시도 있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시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시집을 읽는 재미 이외에도 새로운 시를 공부하기 위한 텍스트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고 나는 본다.

 

잘 익은 부사를 깍는다/ 둥글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에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글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 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 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등’// 내가 갂아낸 부사,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송시월-사과를 깎으며 全文 page95]

 

눈을 뜨고 잠을 자다 소복한 여인처럼 시장골목 여기/저기 종종 걸음으로 넘쳐나 돌아치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죽이고 엎어져 있다 왜들 그러냐고 묻지 마라/ 입을 다물고 산자락에 꽃뱀처럼 똬리를 틀다 거리에 춤/추다 어디에서 숨바꼭질을 하는지 누구 가슴에 숨어 울/다 잠들다 작은 소리로 징징거리다 기우뚱거리며 실룩거리다 늪에 빠져 이내 조용하다 채송화 봉선화 벌겋게/피었다 흘러내리다 주막집 끝자락에 연분홍 바람 한줌/매달다.

[정연덕-유월의 낮달 全文 page164]

 

시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든 시를 매개로 한 시인과 시를 읽는 독자와의 교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쓴 시인의 생각이 시를 읽는 독자와 모두 일치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시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해독불가의 암호 문자가 되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시인이 독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일단 어떤 매체로든 독자와의 만남을 의도한다면 독자에 대한 배려 또한 시작과정에서 어느 만큼은 안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할 때 입에서 꽃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네/ 그런 사람의 가슴에는 꽃밭이 있지/

당신도 그런 하늘이었으면 좋겠네/ 저기 푸른 물고기가 뛰노네/ 만지면 붉은 잎맥이 전달되는 꽃이 있네/ 꽃의 눈에는 연못이 있지/ 그 연못이 해를 들어올리네/ 초인종 소리 느리게 떨어지는 저녁/ 가시연이 하늘을 떠다니네/ 바람에 턱을 괴고 있던 별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스멀스멀 일어나 꽃이 되네//

[김은자-꽃과 물고기 정물 全文 page71]

 

시 공부를 위해서 시를 많이 읽는 편이지만 시는 텍스트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공부를 위한 시 읽기로 시작해서 문학과 예술로서의 시 읽기로 끝이 나서 난감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시란 ‘정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독자로서의 나는 시를 복잡한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퍼시는 얼핏 불친절한 시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하이퍼시가 가지는 특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보니 하이퍼시가 의외로 유쾌하고 재미있는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는 아래로 내리고 바람은 누워서 불어 비와 바람이 마주치는 비바람소리에//숲속의 새들은 날개를 접고 풀슾을 헤치며 놀던 아이들도 발걸음 줄이며 함께 내리는 소리가// 어울려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Z Z Z? // 손가락으로 밀며 보는 스마트폰 안에서는 킬힐 신고 춤추는 잡가에 판소리에// 건물 옥상에서 나오는 울음 타는 소리, 초가집 구들장 무너지는 소리// 없이 고양이가 쥐를 잡는다는 소식, 소리소문없이 나는 소리

[김규화-소리에 링크하기 全文 page32]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꽃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 全文 page119]

 

사전을 찾아보아도 hyper라는 말의 의미는 참 어렵다. 나는 그동안 나름대로 하이퍼시를 컴퓨터 용어로서의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의 의미에 더 비중을 두고 이해하려 했었다.(hyper-컴퓨터 용어. in nonsequential manner 비순차적으로 연결된// hypertext-정보란을 마음대로 만들거나 연결시키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비순차적으로 기억된, 데이터의 텍스트) ‘낯설게 하기’로 설명 하는 ‘은유’와 ‘하이퍼’의 차이점을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즈음의 문학잡지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뭔가를 주장한다. 어떤 문학잡지는 ‘정신’으로의 회기를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잡지는 ‘탈관념’을 부르짖기도 하고 ‘순수’를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순수하지만도 않은 문학잡지들의 주장 속에서 ‘하이퍼시’는 근래의 문학잡지들이 표방한다고 하는 그 주장 또는 지향점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하이퍼시가 지닌 색체는 일단 범접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시론을 요약해보면, 하이퍼시에 대한 개념 정리가 조금 더 명료해지고 텍스트로서의 하이퍼를 비로소 시의 하이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퍼(hyper)라는 말은 과도(過渡)한, 과다(過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3차원보다 더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연결어입니다. 사전에 hyperpoetry라는 말은 보이지 않으나, hyperacid(위산과다증), hyperactivity(극단적으로 활동적인), hyperacute(아주 과민한, 초과민한) 등의 용어가 보입니다. hyperpoerty라는 말은 미국의 브라운대학 교수인 P.란도의 저서 [하이퍼텍스트 3.0]에서 보입니다. 처음엔 하이커텍스트를 발견하였으나 뒤에 하이퍼시(hyperpoetry)를 발견하여 이 말로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퍼’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세계를 넘어선, 저쪽 너머의, 또는 초월의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틈이 있는 두 세계(일상적 의식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속 연결되는 형식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고, 문학작품 특히 시의 경우엔 하이퍼적인 것이 도입되어 비로소 시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문덕수-하이퍼시 개관 中page193-page194)

 

지난 며칠. 갑자기 착한 학생이 되어선 나름대로 열심히 하이퍼시에 대한 공부를 했다. 과월호 시문학을 꺼내놓고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이 책 ‘하이퍼시’에 실린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았다. ‘디지털리즘’에 소개되었던 작품들도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하이퍼시’가 대중들에게 다가서기엔 다소 시간이 걸릴는지도 모른다. 내 나름대로의 결론대로라면 하이퍼시는 매우 고급스러운 시의 한 표현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