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 / 어울문학동인

 

어울 문학동인은 방송대 국문학과 출신이 주축이 되어 1998년도에 창단된 인천에서 활동 중인 문학동인이다. 총 회원은 14 명이고 순수시 창작을 지향하며 인천지역 문화 발전에 기여를 신조로 삼고 있다.(월간(月刊) 시문학 3월호 동인지 순례 10. 어울 문학동인 편에서 발췌)

 

나에게 어울 문학동인은 이혼한 전남편의 시누이처럼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익숙한 관계로 다가온다. 그들은 이젠 남남이니 내가 보이는 관심이 불편하다는 어색함으로 나를 대한다. 물론 나 역시도 돌아볼 일이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어딘가에 습관처럼 박힌 무엇이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될 때마다 대체 깔끔하지 않은 이건 또 뭐지? 라고 스스로를 책망하곤 한다. 원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진 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아파트로 얼굴을 바꾼 재개발지역처럼 그저 추억 속에서만 남은 남의 동네를 서성이듯 어울 문학동인의 동인시집을 읽는다. 관계의 부재는 오히려 담담하며 평평한 시각을 가지게 하는가?

 

동인 모두가 참으로 바쁘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13번째 동인지를 출간한 그들의 저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올해 다시 회장의 자리를 맡은 김미옥 시인의 말처럼 ‘지역문화의 척박함과 순수시가 홀대받는 요즘’ 그들의 쉼 없는 전진에 같은 시인으로서 그리고 시의 독자로서 감사함을 전한다.

 

세상은 뻔한 이치투성이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잘한 일 중 하나/ 집을 갖는 일/ 레일을 벗어나 방황도 하겠지만/ 마음은 불을 향해 있는 것 (김미옥/ ‘커밍 홈’中)

 

어울 문학동인의 개개인이 마음속에 향하고 있는 불은 다름 아닌 시(詩)일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겠지.

 

모두가 꿈틀대는 맛/ 은근히 오르는 맛/ 낚시에서 돌아와 그가 펼쳐놓을 너스레 맛과 회 맛/ 김칫국 미리 떠먹는 맛까지/ 하나 더 보탠다 (김민채 / ‘맛’中)

 

13집 ‘냉담’엔 12명 동인의 시가 담겼다. 지금 어울 문학동인은 한창 물오른 나무처럼 날로 푸름이 더해가고 있는 듯하다. 문학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이런 맛 저런 맛을 음미하고 있으려나. 암튼, 발전적이라는 건 더 없이 좋은 일이다.

 

아직도 곰삭지 못 한 시간들이/ 떨어져 나온 비늘 위로 소복하게 쌓이고/ 파도 등줄기 따라 한 생애가 물결무늬로 새겨진다 (유정옥 ‘조기’中)

 

더러는 독창적인 문체로 더러는 비슷한 목소리로 제각각 다른 색깔로 그러나 한 울타리 안에 자리 잡은 그들의 시는 다양함으로 우선 재미있다. 누구는 치열하게 시를 쓰고 있구나. 누구는 여전히 자기에게서 못 벗어나고 있구나. 누구는 공부가 필요하겠네. 누구는 무엇이 그를 뒷걸음치게 만들었을까. 누구는 왜 이렇게 잔뜩 힘이 들어간 거지? 누구는 그저 안타깝네. 이런 나름의 잣대는 오히려 그들을 나의 시(詩) 선생의 자리에 앉혀 놓는다.

 

긴/ 기다림/ 줄기 끝에 올려 놓고// 바람 불면/ 목 길게 빼고/ 두리번두리번/ 해 따라 치는 물결// 해바라기 무리// 어디서 부른다 한들/ 마주볼 수 없는 그대로/ 한 곳으로만 향해// 못 들은 척/ 웃고만 있다.(장원준 ‘해바라기’ 全文)

 

오랜 지인이신 장원준 선생의 시 ‘해바라기’를 읽으며 같은 듯 각기 다른 모습의 어울 문학동인들을 생각해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품으며 그들은 ‘모두 한곳으로만 향해’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독자로 관객으로 그들의 다음 결과물을 기다려볼 참이다.

 

당신의 무늬 / 김진초

 

 

제법 오랜 세월을 같은 인천문인협회 회원이지만 김진초 작가와 순수하게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볼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나의 두 번째 시집이 나왔던 해의 초여름 동암역 앞의 어느 호프집에서 한담을 나눈 것이 처음이었고 그 후로 문협 행사에서 간혹 마주쳤을 뿐 또 다른 만남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같은 해에 등단했다는 시간적 동질감과 본명이 나와 같은 ‘선옥’이라는 동지의식이 내 의식 속에서 그녀를 낯설지 않도록 이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여름 호프집의 한담에서 그녀는 내게 테마를 가진 시에 대한 조언을 했었다.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시를 써보라고 그리고 그녀 역시도 김치를 테마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해 여름 학산문학에 실린 그녀의 단편소설인 ‘벼락김치’를 만나고는 반가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무엇인가 붙잡고 시로 옮겨보고 싶은 세상 것을 만나지 못 했으므로 갖가지 소재와 주제로 시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출간된 그녀의 소설집 ‘당신의 무늬’를 읽으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김진초 소설의 특징은 그녀의 세속 나이에 걸맞게 능청스러우며 괜히 멋을 부린 척 현란한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거다. 문장은 백김치처럼 담백하지만 갖가지 채소를 절여서 만들어놓은 피클처럼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이번 소설집 [당신의 무늬]의 테마는 무엇이었을까? 작품해설을 쓴 주지영 평론가는 ‘죽음’이 전체를 가로지르고 있다고 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절반이 넘는 작품에서 ‘죽음’과 관련된 사건이 작품의 중요 모티브로 기능하고 있다.(중략) 작가는 왜 ‘죽음’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일까. 대체 그 ‘죽음’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인가.(작품해설/자유와 방탕, 그 ‘사이’를 가로지르다-주지영 중)

 

 

그러나, 나는 전체적인 기둥을 이루는 것은 죽음조차도 아우르고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소설 속에서 정말로 여러 성향의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나처럼 집안퉁수인 사람은 미처 쳐다보지 못 했던 세상의 여자들도 있으며 문 열고 나서면 마주치게 될 것 같은 보통 여인네들도 있다. 처음엔 ‘여자’였던 한 인간이 세상과 발 맞춰 살면서 가지게 되는 관계들은 총 망라된 듯한 그러니 가기 다른 소설 열 여덞 편의 단편 속의 여자들을 만나러 떠나는 노정만으로도 인생의 미처 몰랐던 부분을 보게 된다.

 

 

슬픈기둥. 7/ 엄마간 간다. 29 / 백단심 지다. 117 / 배터리를 뺀다. 197 / 거울보는 여자. 302 / 야식. 367(숫자는 페이지)

 

‘여성’을 넘어선 ‘여자’로서 남자들의 삶 못지않게 세상과 부딪히고 세월에 닮아가는 소설 속 여자들을 보면서 누추하고 비루한 모습에서조차도 부스러트릴 수 없는 삶의 희망을 보게 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 ‘열 여덞 무늬의 거짓말 한 상’이라고 소설집을 소개하고 있다.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라고 얘기하는 작가에게서 나는 오히려 진실된 한 인간의 고백을 듣는 느낌이다.

 

 

열 여덞 편의 작품이 모두 고르고 짜임새 있길 바라기엔 열 여덞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다. 하여 키를 재 듯 좀 더 큰 녀석도 있고 작은 녀석도 있으며 제법 단단하고 실한 녀석도 있고 왠지 문열이 같은 녀석도 있었음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독자로서의 솔직한 발언이라면 작가께 누가 되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초 소설가의 팬이기를 자처하므로 나는 벌써 새로운 작품을 기다리고 있으니 아무쪼록 건필하시길 바란다.

 

꽃들은 어디로 갔나 / 서영은

 

 

사랑하는 당신!

이제야말로 나는, ‘나를 사랑한 당신, 당신을 사랑한 나’라는 삼생(三生)을 이어온 관계가 어마어마한 축복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나의 무명을 깨우쳐주기 위해 평생 수고한 당신의 그 애끓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후생에서 우리 만나게 되면 확인하게 될 거예요. 전생의 빛 때문이라면, 이제 그만 나의 이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핏빛 진달래처럼 즈려밟고 편히 가세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말이 마지막임을 맹세합니다.”(page 284)

 

지금 내 눈길이 머무는 곳은 내 책상 맞은편 한쪽 벽을 빼곡하게 채운 책꽂이다. 공간이 부족해 안쪽과 바깥쪽 두 줄로 책이 꽂힌 책꽂이 안쪽의 어딘가에 1983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꽂혀 있을 터 그리 먼 옛날도 아니건만 아주 먼 역사의 유물을 발굴해내 듯 책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 1983년은 작가 서영은이 ‘먼그대’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던 해이다. 흑백 사진 속에 오롯이 담겨있던 서영은의 모습은 아무리 새로운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그다지 예쁜 모습은 아니었다. 간장이 가득 담긴 항아리 같은 아니, 손을 집어넣어 속을 헤집어 볼 수 없는 목 긴 물병 같은 모습 그리고 짧은 컷트 머리 뒤로 오히려 더 선명하던 안개의 이미지. 그녀가 김동리의 아내가 되었다는 소식과 더불어 그 뒤 몇몇의 소문을 끌고서 물속으로 가라앉듯 잊혀졌다. 중간에 ‘사막을 건너는 법’을 발표했었지만 ‘먼그대’에서 느꼈던 그 애틋한 물기를 가을볕에 잘 말린 고추처럼 날려버리고 바스라질 듯 서걱거리던 문체가 영 맘에 안 들어와 책을 덮었던 기억까지. 그럼에도 돌이켜 보니 나는 무척이나 오랫동안 작가 서영은의 팬이었다.

 

작가의 자전소설인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참 담담해서 더 애틋하다. 굳이 작가의 자전소설임을 염두에 두고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긴 세월의 물살에 잘 씻기고 다듬어진 무엇인가를 보는 듯 말끔한 소설 속으로 나도 모르게 걸어 들어가게 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현란한 문장도 없고 감성을 두드리는 멋들어진 표현도 없이 그저 담담한 이 소설이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행간에 담긴 세월과 그 세월을 잘 갈무리 한 작가의 진정한 마음이 우러나기 때문은 아닐까.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김동리의 소설들을 그 소설 속에 느껴지던 힘의 원천에 대해 이해했다. 무엇보다도 젊은 한 때 멋들어지게만 읽었던 서영은의 ‘먼그대’를 제대로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건너뛰어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자리에 그녀를 되돌려 놓게 되었다.

 

“사랑은 목숨 같은 거야. 목숨을 지키려면 의지를 가져야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니 목숨을 지킨다고 생각해라.”(page68)

 

젊은 아내 호순과 서른 살 나이 차가 나는 박 선생 그리고 박 선생의 아내인 방 선생. 그들의 사랑은 소설 속에서 또 현실 속에서 참 진진하고 눈물겹다. 왜냐하면 어떤 형식으로 그들이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위해 행동했든 그들에게 사랑은 목숨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