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시(詩)를 읽다. 1

 

이효윤 시집(詩集) 빈집

 

 

새벽부터 시작해서 언제 쓰러졌는지 모른다 / 나에게 있어서 술은 언제나 자의 반 타의 반/

한잠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 술 한 되쯤은 있어도 괜찮다 / 계절은 늦가을이어서 창문을 흔들며 가는 / 바람 소리에 주위는 더욱 더 적막하고 /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보며 / 나는 죽어도 이름은 저 속에 남아 있겠구나 / 살아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나이요 / 늘어가는 것은 근심뿐 / 곤히 잠든 아내의 가리마에서 / 산국화 쓸쓸히 피어 있는 오솔길을 연상한다 / 술을 따르며 어두눈 세상을 일별해보면 / 역사가 흐르는 강가에 서서히 봄기운이 감돌고 / 꽃샘추위도 만만치 않으리 / 밤이 가면 낮이 오고 낮이 가면 또 밤이 오고 / 역사가 이렇게 되풀이 된다면 / 누가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싸울 것이냐 / 창문을 열어 산과 들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 시를 계속 써야할 것인가 말 것인가 / 어제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으므로 / 지금은 일요일 새벽 / 내 마음 속 스산한 풍경 속으로 마지막 술이 / 안개처럼 퍼져가며 나는 또 쓰러진다.

[이요윤 시(詩) ‘자작시를 학대하며’ 전문]

 

시집을 읽다보니 ‘철거현장에서’라는 참으로 뜨거운 시가 실린 페이지에 ‘95년 1월 4일-기다림이란 참 좋은 거다 설레임이 있어서...’라고 적어놓은 메모가 눈이 들어온다. 한동안을 나는 이효윤 시인을 가끔 만나 이런저런 시 얘기를 듣곤 했었다. 그 찻집은 아마도 내동교회에서 인하참치 쪽으로 내려오던 골목길 오른쪽 2층에 있던 미네르바라고 기억한다. 정작 내 시에 대해선 이렇다 저렇다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던 그 양반은 그저 시단 돌아가는 얘기와 당시 같이 어울려 다니던 다른 시인들과의 두주불사 행사를 연애담이나 무용담처럼 들려주기도 했으며 가끔 자신의 시를 낭송해준 후 시에 얽힌 이야기나 또는 시작과정을 농담처럼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었다. 당시 함께 시작활동을 하는 모임이 있었지만 술도 잘 못 마시고 주변머리는 더 없어서 존재감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던 내가 이효윤 시인과 오랜 교분을 나눴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구석이 있다.

신혼 초 용인에 살 때였다. 눈발이 성성한 날인데 저녁 무렵 이 양반이 전화를 하셔서는 용인 터미널에 계신다고 한다. 깜짝 놀란 거야 뭐 말 할 필요도 없고 서둘러 남편과 터미널로 달려 나갔지만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핸드폰이니 삐삐니 하는 이동통신수단이 없을 때이니 나와 연결 될 전화가 있는 집으로 다시 서둘러 들어서는 때에 전화를 하셔서는... 그래서 터미널에 나갔었느냐고...당신은 경서동 집에 계신다고... 그렇게 장난을 치실 때만 해도 아직은 술 때문에 몸이 망가지기 전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하니 그리움에 마음이 아리다.

인천시민문예대전에 작품을 내는 것도 극구 말리시더니 내 고집에 겨우 입선이랍시고 상을 탔을 때는 역정을 내기도 하시고 시문학으로 등단했노라 등단작이 실린 잡지를 가지고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도 왠지 안타까워하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어리고 젊은 마음에 저 양반이 왜 내가 발전하는 모습을 못마땅해 하시나 내심 서운하기도 했었지만 이만큼 나이 먹어서 그 양반이 살았던 시간들을 지나치고나니 알 것도 모를 것도 같다.

이효윤 시인이 나의 시(詩)선생이셨던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러고 보니 나는 그 후 시(詩) 선생을 모셔본 적도 없다. 늘 혼자 아리랑이었고 맨땅에 헤딩이라고 스스로 얘기 하며 시를 써왔다. 이효윤 시인은 내게 시를 쓰는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내게 시를 쓰는 자세를 스스로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을 보는 시각 하나를 내게 꽂아주고 가셨다는 생각을 오늘 그의 시집 ‘빈집’을 다시 읽으면서 해보았다.

너무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서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사람이다. 이효윤 시인처럼 갸름하고 얇으며 눈이 깊은 시인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외면하게 된다. 살아생전에 살갑게 지내지 못 한 아쉬움 때문일 거다. 그가 아플 때 문병을 가고 챙겨주고 했던 여자시인들이 어디 한 둘이었으려고 그들과 비교할 때 내 마음의 무게는 아주 작은 먼지처럼 가벼울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어느 겨울날 문득 보고 싶어 용인에 정말 가고 싶었노라고 그래서 전화를 했었노라고 미안해하시며 웃던 그 웃음소리만큼은 오직 나와 남편의 추억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남편과 그 옛날 이효윤 시인과의 만남을 회상해 본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이효윤 시인은 여전히 짱짱하고 창창한 젊은 시인이다. 그는 한학을 공부하신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듯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기억한다. 그의 시 중 ‘함곡관’시리즈는 세상의 부조리와 영합하지 않던 그가 초연해진 듯 오히려 더 열렬해진 듯 다듬어진 어조로 쏟아내던 숨결이라 여전히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 물론...제목뿐이지만...이효윤 시인이야말로 순결한 리얼리즘의 시를 쓴 시인이었다고 나는 여전히 그리 생각한다.

 

내가 낸 세금이 / 수천 명의 깡패들과 전경들을 동원해 / 포크레인과 해머 등으로 무장하고 / 우리들의 삶을 뿌리채 철거하러 올 줄을 / 누가 알았으리//

저마다 지붕 위로 올라 / 자신의 집을 끌어안고 / 여기서 울부짖고 저기서 울부짖고 / 눈동자들은 밖으로 튀어나와 / 성난 고양이처럼 파랗게 불을 켜고 / 여기서 뛰고 저기서 뛰고 //

사람도 살림도 사정없이 끌어내어 / 무자비하게 짓밟고 부수는구나 / 시뻘건 비명 소리는 하늘 높이 솟아올라 / 땅으로 떨어지면 / 지붕도 사람도 땅도 피투성이고 //

몸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이고 / 결사적으로 잠자리를 지키려 / 이놈 붙잡고 하소연하고 저놈 붙잡고 하소연하고 / 경찰들은 소화기를 뿜으며 / 이리 쫓아다니고 저리 쫓아다니고//

몸은 병들고 날씨는 추워지는데 / 이 넓은 세상 갈 곳이 없어 / 가설 천막 천장에 나일론 끈으로 / 목 매달아 죽은 여인아 / 여기가 지옥이냐 사람사는 세상이냐? //

[이효윤 시 ‘철거현장에서’ 전문]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 조라 닐 허스튼

 

 

1948년 열 살 된 남자아이를 추행했다는 오명을 쓰고 기소되었는데, 이 일로 조라의 삶은 심각하게 붕괴된다. 이후 프리랜서 작가로 잡지나 신문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일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가정부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간다. 이렇게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중풍을 앓게 되어 강제로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1960년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 질환으로 유명을 달리한다.(책날개-조라 닐 허스턴 Zora Neale Hurston 소개글 중)

 

작가의 생애가 소설의 스토리보다 더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책을 읽기 전 먼저 만난 작가의 생애를 읽지 않고 책을 읽었더라면 책에 대한 느낌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표지에 사용된 폴 고갱의 <망고를 든 여인>의 그림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잠깐 미술사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을 때 타히티라는 섬에서의 고갱의 생활을 학습했던 탓이리라.

 

얘야, 지금까지 내가 아는 한 백인남자가 세상의 지배자야. 어쩌면 저기 바다 너머 어딘가에 흑인 남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말고는 알 수가 없단다. 그래서 백인 남자는 자기 짐을 내려놓고는 흑인 남자더러 그걸 들라고 하지. 어쩔 수 없으니까 흑인 남자는 짐을 집어 들긴 하지만 그걸 짊어지고 나르지는 않아. 그냥 자기 여자 식구들한테 짐을 넘긴단다. 내가 아는 한 흑인 여자들이 이 세상의 노새란다. (page24-25)

 

할머니가 ‘재니’를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는 이 이야기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재니’의 인생이 더욱 드라마틱할 수밖에 없는지 생각하게 하는 단초가 된다. 흑인여자들이 세상의 노새로 취급받는 시절에 ‘내니’라는 여자 노예가 있었다. 그녀는 주인집 백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검둥이 년아, 도대체 네 아기가 잿빛 눈에 노랑머리를 하고 있다니’ 주인집 백인 여자에게 모진 매질을 당한다. 백인주인은 남북전쟁에 참전하느라 집을 비운 터였고 ‘전 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야 흑인 노예에 불과하니까요.’라고 항변하던 ‘내니’는 그녀의 아기 ‘리피’를 데리고 도망을 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아이를 데리고 웨스트폴로리다로 내려와 정착했지만 ‘리피’는 열일곱 살이던 해에 학교선생에게 강간을 당한 후 ‘재니’를 낳고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렇게 ‘재니’는 할머니 손에 키워지게 된다.

 

결혼을 해도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첫 번째 결혼. 시작과 동시에 죽을 때까지 모든 것에 꽃가루와 봄을 뿌리며 살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두 번째 결혼. 그리고 그녀의 세 번째 결혼이 있다. 티 케이크.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며 진취적이고 로맨틱하기까지 했던 남자지만 슬픈 종말을 맞이했던 사람이다. ‘재니’를 여자로 만들어준 첫 번째 결혼과 물질적 안정을 안겨준 두 번째 결혼은 ‘재니’에게 불행하기만 했던 시간이었을까. 두 번의 결혼이 있었으므로 ‘재니’는 티 케이크와 세 번째 결혼생활을 힘들지 않게 시작하고 또 안정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 사랑은 필수불가결 한 것이지만 거기에 물질의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작가의 어렵고 고단했던 생을 유추해 보건데 ‘재니’가 누린 삶은 한편으로는 작가가 살고 싶었던 삶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졌다.

 

그렇게 그녀는 무죄가 되었고 판사와 재판석의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며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백인 여자들은 탄성을 지르며 보호성처럼 그녀를 둘러쌌고 흑인들은 고개를 수그린 채 발을 끌며 나갔다. (중략)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에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준 친절한 백인 친구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page259)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시선 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소설은 내내 ‘재니’라고 하는 흑인(?)여자의 여정을 따라가고 있지만 정말 흑인여자의 시선으로 이 소설을 쓴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 의문은 키 케이크를 권총으로 쏘아 죽게 한 ‘재니’의 재판 결과를 묘사한 부분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나만 그렇게 소설을 읽은 것인가?

 

‘재니’를 적대시 하며 불리한 증인을 자청하는 습지 흑인남자들의 모습은 ‘재니’를 부정하는 집단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녀를 옹호하는 백인여자들의 지배는 ‘흑백의 지배 구조를 초월한 여성들 사이의 연대감의 표현’(page277)이라는 해설을 읽으면서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이야말로 미국문화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가 혼동을 일으킨 부분이었다.

 

물론 떠들어대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긴 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달빛을 목구멍에 비추겠다고 입을 벌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어떤 곳을 알고 싶으면 그곳에 직접 가봐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page265)

 

이제 ‘재니’는 자신의 목소리도 찾고 정체성도 찾은 것일까? 뭔가 매우 답답하지만 마음이 아프면서도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 소설이었다.

 

성채(城砦) / 쌩떽쥐베리

 

아직도 이 쌀쌀함을 꽃샘추위라고 하기엔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바람은 가끔가끔 옷깃을 여미게 하고 일 년 중 양지와 음지의 구분이 가장 확실한 시절을 건너가고 있다.

생강나무 노란 꽃망울이 쏟아질 듯 화사한 양지에 서있지만 황사덕분에 햇살의 두께는 화선지처럼 얇은 오후다.

오래된 책 한권을 찾아 펼쳐본다. 젊은 시절 얄팍한 월급을 더 얇게 저며내다시피 하여 샀던 세계문학전집이다. 카프카와 쌩떽쥐베리와 보봐르, 까뮈, 싸르트르. 세상도 모르고 그저 교과서나 뒤적이다 만 어줍잖은 청춘이 한 시대의 사상을 휘젓던 대가들의 소설을 과연 얼마나 이해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고 가끔 또박또박 뭔가 메모를 해 둔 걸 다시 볼 때마다 오늘 나의 모습이 어느 날 문득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걸 확인한다. 한 시절 내 영혼을 담그고 살았던 그 책들은 결혼을 하면서도 기꺼이 신혼집으로 가져왔고 아직껏 내 책꽂이의 한 쪽을 자리 잡고 있다. 한 때 얼마나 뒤적였었는지 유난히 낡은 책은 이제 나이를 이기지 못 하고 너덜거린다. 내지와 분리된 겉표지를 투명 테이프로 다시 손질했다. 뒤적이는 책장마다에서도 노랗게 생강나무 꽃이 피어난다. 나이를 먹은 종이에서 풍기는 세월의 매캐한 냄새가 미세한 먼지와 더불어 날아오른다. 하얀 나비 떼 같다.

 

결국 문제는 행동의 방법이다. 왜냐하면 지속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고, 그리고 한 여행자가 이 산등성이에서 저 산등성이로 걸어갈 때, 자기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다고 느끼는 것은, 그의 환상일 뿐 그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재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진보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끊임없이 새 출발을 할 것이다. 또한 나는 휴식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논쟁 때문에 그가 괴로워할 경우 논쟁의 두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를 무조건 받아들임으로써 일시적이고도 유해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앙뜨완느 드 쌩떽쥐베리는 1900년 6월29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족을 떠나 숙모와 외할머니의 집을 오가며 생활한다. 어린 앙뜨완느는 두 집을 오가면서 기차와 비행기에 많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 속에서 꿈과 환상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비행기 조종사로 활약한 그는 1935년 12월 쟈삐가 세운 파리-사이공 간의 비행기록을 끼뜨리기 위해 뜻을 같이 하던 동료 프레보 기사와 함께 사이공을 향해 출격한다. 그렇지만 카이로에서 20Km 떨어진 사막에 불시착하게 되어 닷새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헤매다가 구사일생으로 베드인 대상에 의해 구조되었다. 구조되는 순간 그는 자기를 구해 준 베두인의 얼굴에서 모든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 때 인종이나 국적에 의한 차별이 부조리한 것이라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쌩떽쥐베리의 생애는 이쯤 생략하고 그의 사후에 미망인에 의해 출간된 소설 성채(城砦)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성채(城砦)는 쌩떽쥐베리 사후 4년 만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평소 한밤중에 집필을 하는 습관이 있는 쌩떽쥐베리가 알아보기 힘든 필치로 아무렇게나 노트한 것과 녹음기에 취입해 놓으면 다음날 비서가 그것들을 정리해서 타자로 찍어 놓았던 것들을 주위의 친구들과 작가들이 그의 사후에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주로 생명을 건 모험을 통하여 얻은 명상과 비젼이다. 그러나 이 책 성채(城砦)는 이전의 작품세계와는 많이 동떨어진 세계를 보여준다. 무척 많은 양에 일정한 스토리도 없으며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이 책에 대해선 평가에서도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라진다고 한다.

이 책 속에 나타나는 테마는 복잡하고 다양하지만,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다. 전 작품을 통하여 직접 등장하는 사람은 베르베르족의 왕인 <나> 한 사람이다.

 

북아프리가 사막에 있는 베르베르 족의 한 왕자가 부왕의 가르침에 따라 왕이 된다. 전반부는 왕이 되기 전에 부왕으로부터 받은 교훈과 예지를 간접으로 전한고 있다.

‘나는 연민의 정이 인간의 정도(正道)를 그르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는 자기의 백성을 이끌고 어느 신비한 성을 공격하여 일종의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 각층의 인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지도 계급, 지식 계급, 중산 계급 그리고 하층 계급까지 관찰한다. 그가 관찰한 수상. 장관. 장군으로 등장하는 지도계층은 무력으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는다. 역사학자. 논리학자. 해설자로 대변되는 지식 계급은 직업이나 전문 의식에 얽매여 전체적인 구도를 보지 못 한다. 그렇다면 중산계급은 어떨까? 목수. 대장장이. 병사들로 이루어진 중산계급은 자기들의 직업이 의미를 갖는 때는 창조적 의지를 발휘하여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 상위 계급의 의도에 따라 그 기능을 수행할 때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무희. 걸인. 창녀. 가수로 묶어놓은 하층계급은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 하고 이전의 환경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는 그가 만난 계층의 사람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과 결점과 짧은 생각들, 그들이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고자 하지도 않는 숙명에 대해 명상을 한다. 그러면서 공허한 밤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열정과 식욕을 혼동하지 말라. 자신을 위해 갈구하는 열정은 진실한 열정이 아니다. 나무는 자기에게 아무 대가도 돌아오지 않는 과일 속에 열정을 쏟는다. 나의 경우도 그러하며 나의 백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나의 열정은 아무런 대가도 없는 과수원을 향해 흐르기 때문이다.’

 

성채(城砦)는 지극히 사색적이고 비유적이면서도 일면 비민주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비민주적인 부분을 넘어서 작품 속에서 세우고자 한 이상향적인 제국이라고 할지라도 그 제국이 인간 위에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을 세우고자 함은 인간을 이룩하기 위해서이지 제국을 위해 인간을 억제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또한 질서는 결과이지 힘의 원인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환기시켜 준다.

 

‘질서란 생명의 결과이지 그 원인은 아닌 것이다. 질서가 강력한 도시국가의 표시일 수는 있지만, 그 원인은 아닌 것이다. 생명력과 열정과 지향이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지 질서가 생명력이나 열정이나 지향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시각이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종합을 보면 인간은 직업과 가족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의 협력을 통하여 위대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매진하면서 아울러 자신의 마음속에 마음의 성채 마음의 왕국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지도자의 임무는 백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또 특히 백성의 생활에 활기와 열정을 불어넣어 주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