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학실록 / 이성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세종대왕이다. 역시 우리 역사에 가장 빛나는 인물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세종대왕과 함께 등장하는 장영실에 대해 짧으면서도 깊이 있게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잘 모르던 장영실의 일생을 조금 더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세종실록엔 장영실이 원나라 출신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장영실의 본관인 아산 장씨의 세보에 의하면 아산 장씨의 시조인 장서는 중국 송나라의 대장군 출신이라고 한다. 뜻이 맞지 않아 고려 예종 때 망명하였다 한다. 예종이 장서를 아산군에 봉하고 그의 후순들은 본관은 아산으로 하게 했다고 하는데 장영실은 아산 장씨의 족보에 장서의 9세손으로 기재되어 있다. 장영실이 노비의 신분이었다 하는 것은 동래에 파견되어 있던 부친 장성휘가 그 지역의 기생과 인연을 맺어 장영실을 낳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아버지의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어미의 신분을 따르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장영실뿐이랴. 역사적 사건과 과학적 지식의 줄긋기가 어쩜 이리 재미있게 그어질 수 있는 것인지 지은이의 역사적 지식과 과학적 상식의 해박함에 저절로 감탄을 하게 된다. ‘흙비’와 성종 때 임사홍의 이야기는 젊었을 때 소신 있고 학문에도 두루두루 능통했으므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한 사람이 최고의 간신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재미도 있었지만 삶의 태도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메뚜기는 산의 옛말인 ‘뫼’에서 뛰어노는 곤충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순우리말이다.(중략) 약 1톤 되는 메뚜기 떼의 경우 사람 2천500명분의 식량을 먹어치운다고 한다. 이런 메뚜기는 주로 사막에서 발생한다. 사막에 비가 내려 풀이 무성해질 경우 메뚜기는 평소보다 많은 수의 알을 낳는다. 그러다 사막이 다시 건조해지고 풀이 죽으면 메뚜기 알들은 부화조건이 맞을 때까지 휴면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적당한 기온과 습도가 되면 일제히 부화하여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page108-109 발췌)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영화의 한 장면이 저절로 생각났다. 영화니까 가능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문득 아, 영화 속 장면이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었군 이라며 납득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흙비라 표현된 황사도 메뚜기떼의 출현도 조선시대엔 매우 심각한 재난이었다. 하여 왕들이 이런 재난에 대처하는 상황을 책으로 만나는 것도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다. 이적지 학교에서 배우던 역사시간엔 만날 수 없었던 임금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휘(避諱)에서의 ‘휘(諱)’는 본래 죽은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살아있는 높은 사람의 이름도 휘라고 한다. 즉, 피휘란 이런 이름을 피한다는 뜻으로, 임금이나 부모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는 제도였다.(중략)

피휘는 본래 당사자가 죽은 후에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중략) 후대로 내려오면서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피휘를 하고, 음이 같거나 두 글자 이름에서 각각의 글자 모두 피휘의 대상이 되었다.(중략) 이에 조선의 왕들은 정조의 경우처럼 거의 쓰임이 없는 글자를 선택하여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page135)

 

스물두 편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한결 폭넓어진 역사의 장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세세하고 깊이 있는 과학 지식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끝.

봄날 시(詩)를 읽다. 3

 

박제영 시집(詩集) 식구

 

 

과꽃 같은 명옥씨, 냉이꽃 같은 명옥씨, 모진 세월 긴 긴 세월 시들다 시들다 어느 봄이 꽃피는 계절이었던가 기억조차 시든 명옥씨, 더 지기 전에 이 봄날 가기 전에 봄꽃 같은 시 하나 써주고 싶었는데, 개나리꽃, 진달래꽃, 유채꽃, 천지사방 꽃, 꽃, 꽃이 폈어요 애꿎은 꽃만 부르다 엄마의 봄날은 갔다 미안하다 명옥씨

결혼50주년 기념일 가족들 모여 읽어드렸더니

-아들, 나 아직 청춘이야!

명옥씨, 꽃처럼 웃더라

우리 엄마, 꽃처럼 울더라

[박제영 시 ‘명옥씨’ 전문]

 

지난 한식 때 부모님 산소를 돌보기 위해 내려간 우리를 위해서 영주 시작은아버님은 겨우내 밭에 묻어두었던 무를 파내시고 밭 한때기 가득 심궈 둔 대파를 몽땅 뽑아서 실어 주셨다. 소일 삼아 밭농사를 조금 지으시는 시작은아버님 덕분에 여름이면 감자에 가을이면 고구마도 얻어먹고 소박한 호강을 한다.

 

시작은어머니는 된장과 고추장을 한 항아리씩이나 퍼주셨다. 마트에 들러 적당한 통을 사오라고 하셨는데 내 눈짐작이 잘 못 되어 중항아리는 될 커다란 통을 사가지고 들어갔던 것인데 그 통에 가득 고추장과 된장을 담아주시며 먹고 또 가져다 먹으라고 하신다. 주책없이 사들고 들어간 큰 통 때문에 민망하던 참인데 그런 말씀을 들으니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여, 올해는 새로 된장을 담글 거라고 하시기에 된장 담글 때 꼭 배우러 오겠노라고 말씀을 드리고 왔다.

 

우리 시작은어머님은 유독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장류와 장아치를 담그는 솜씨가 유별나시다. 된장 색깔도 어쩜 그리 예쁜지 사다 먹는 된장은 빛깔은 비스므리하게 흉내는 낼지 몰라도 맛만큼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깊은 맛이 있다. 시골서 올라온 된장 고추장은 쳐다만 보고 있어도 부자가 된 듯 기분이 좋다. 덕분에 한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안 좋다면 이상한 거다.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디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을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박제영 시 ‘식구’전문]

 

오늘에서야 시골서 가지고 온 파와 무도 정리를 했다. 파는 어찌나 많던지 한나절 까고 다듬어서 살짝 데쳐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우리 집은 여름이면 닭계장과 육개장을 자주 끓여먹으니 좋은 식재료가 될 것이다. 무는 바람 든 것은 골라내고 깍두기도 좀 담그고 채장아치도 좀 달글 생각으로 다듬어 놓았다. 남으면 시기가 좀 맞지 않지만 무말랭이도 만들어야지.

누군가에겐 대단하지 않다면 대단하지 않을 이런 것들이 나는 참 귀하고 감사하다. 뭔가 주고 싶다는 건 분명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 것이기에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누군가 챙겨주면 나는 기꺼이 감사하고 행복하게 받는다. 더군다나 시작은집에서 챙겨주시는 귀한 먹거리인데 얼마나 더 감사하랴.

지난겨울 박제영의 시인의 시집을 받고 난 후 한동안 내가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많이 들춰본 시집이었을 거다. 정말로 진솔하면서 재미있고 그러면서도 뭉클한 감동이 있어서 박제영의 시를 읽다보면 헝클어지고 보푸라기 일어난 마음이 순해진다. 모르긴 몰라도 그는 삶에 있어선 누구보다 깊고 두꺼운 내공을 지녔을 것이다. 그의 시는 단단하고 뜨겁다. 그러면서도 요란하거나 잘 난 척 하지도 않는다. 그저 생긴대로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듯 읽는 이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킨다. 시집을 덮고 나서도 다시 한 번 들춰보게 한다. 무서운 시다.

 

식구들 먹다 남은 밥이며 반찬이 아내의 끼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타박도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버리고 하나 사라 얼마 된다고 빤스까지 꿰매 입나

핀잔을 줘도 배시시 웃는데야 더 뭐라 할 수도 없다

지지리 궁상이다 어쩌랴

엄마의 지지리 궁상이 아버지 박봉을 불리고 자식 셋을 키워낸 것이니

아내의 지지리 궁상이 내 박봉을 불리고 자식들을 키울 것이니

그래서다 고백컨대

우리 집 가계는 대를 이은 저 지지리 궁상이 지켜낸 것이다

[박제영 시 ‘거룩한 계보’ 전문]

봄날 시(詩)를 읽다. 2

 

서양숙 시집(詩集) 너무 오래 걸었다

 

가끔은 오래된 저 여관에 들고 싶어

엉거주춤 일어나 형광등 끈을 잡아당기는 그 연애

이불 밑 깊숙이 손을 넣고 앉았는데 어느 새

쥐가 들어와 입술을 깨물어 깠다는 거짓말 같은 연애

벌건 목덜미에 붕대를 감은 그 핑계의 연애

나보다 더 수줍어 주전자 슬쩍 내밀던

내 또래 아가씨의 푸릇한 그 연애

내 이름 써야 할지 미운 놈 이름 써야 할지

고민할 것도 없이 숙박계에 내 이름 한 번

크게 또박거리며 쓰고 싶어

그래, 가끔은 비디오도 음악도 없는 그 낡은 연애

지퍼 사이에 블라우스 단추가 함부로 끼어드는 그 연애

두루마리 화장지 베고 누웠던 그 연애

깨진 타일 벽 나무 대문의 저 여관

저 벽을 열고 다시 그곳에 들고 싶어

서양숙 [오래된 연애]-전문

 

성님. 이렇게 불러놓고 나면 나도 모르게 풋~웃음이 터진다. 남들은 ‘언니’라고 부르더구만 굳이 ‘성님’이라 불르는 내 심사가 조금 별스럽다고 느꼈던가 어느 날 성님은 그예 김시인에게 자신을 ‘성님’이라 칭하는 내 속내를 궁금해 했던 것도 같다. 나도 모를 일이다. 처음 인연이 되었을 때부터 당연히 ‘성님’이었던 것 같으니까. ‘언니’라는 호칭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 같으니까. 그런대 다시 생각해보면 서양숙 시인한테는 ‘성님’이라는 호칭이 왠지 착 들러붙는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잘 다려놓은 차처럼 무덤덤하면서 또한 담담한 사이지만 그렇다고 소식을 듣고 영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사이는 아닌데 어쩌다 보니 소박하고 오롯하게 치른 출판기념회에도 가질 못 했고 여름 볕 아래 잠시 만나 짜장면 한 그릇 맥주 한 병 나눈 후 또 한참을 못 보고 세월을 지나가고 있다. 귀한 시집을 받았으니 인사도 해야할텐데 나는 언제나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며 살려나 모르겠네.

블로그에서 페이스 북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서양숙 시인의 짧은 글을 만날 때마다 어떤 시를 쓰는 사람일까 참 궁금했었다. 선생이라곤 없이 순 날 것으로 혼자 좌충우돌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윤학 시인과 이어진 듯 학습의 냄새가 나는 서양숙 시인의 시는 당연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잘 다듬어지고 정제된 시어를 만나게 되리라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었고 통통 거리는 사고의 확산도 궁금했다. 물론, 그 기대와 궁금함이 쓸 데 없는 것은 아니었음을.

시집 속에서 만나는 우리 성님은 생강처럼 아리다. 성님의 시를 읽으며 가끔가끔 마음에서 불어나오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조금 삭막하고 조금 쓸쓸하고 그렇지만 그 바람 끝 어딘가에 아직 내 놓지 않은 수맥을 안고 있는 듯한.

아무쪼록 우리 성님이 내내 건강하길 기원한다. 이즈음 자꾸 어디가 덜 좋은 듯한 안부를 올리셔서 조금 걱정이 된다. 언제 같이 미조 한 번 가야할 텐데. 나처럼 주변머리 없는 사람도 그러려니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살갗게 대하려 하지도 마음을 터놓으려 하지도 않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성님. 우리 술 한 번 해야지요? 봄날이 가고 있슈~

 

논냉이꽃 점점이 핀 화원을 걸어 들어간다

꽃무늬 팬티를 걷어 손 다림질을 하고 있다

줄기 끊어진 논쟁이 꽃이 보인다

색 바랜 꽃잎이 있다

꽃 이파리 떨어져 나간 꽃도 있다

누가 이 화원을 다녀갔는가

빨래줄 얹어있던 자국

손바닥을 밀어 다려본다

몇 번을 삶아 느슨해진 고무줄

오래된 화원 울타리 헐어져 있다

다녀간 흔적이 숨어있다 다시 피어 오른다

논냉이꽃 다시 피어난다

손 다림 지날 때마다

봉오리 톡톡 터트리고 있다

팬티 가득 냉이냄새 진동한다

서양숙 [화원]-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