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 / 박동규. 박목월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 박목월 시인과의 인연을 참 오래 전부터 글로 쓰고자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해 머리에 흰머리가 돋아 났노라며 아버지의 큰 우산 안에 살았던 자신의 행복을 반추해보는 노교수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은 개인의 정서를 넘어 이 삭막해진 시절의 한 때를 마음 따뜻하게 녹여주는 불씨가 되어 준다. 평생 박목월의 아들로 살아왔으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의 가족사를 사사롭게 그러나 ‘감사의 고백’이라 표현한 이 책은 의외로 아주 소박하고 간결하다. 아들의 기억 속에 살아계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 아버지가 젊은 시절 적었던 일기가 구성의 거의 전부다. 그럼에도 집안의 내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해보았다. 박동규 교수가 전하는 가족의 의미와 행복이 새삼스럽지 않은데도 다정다감한 이유다.

 

가족은 오로지 세상에서 생명을 함께 하는 유일한 행복의 샘이다. 맑은 생명의 물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가 있기에 살아 있음이 증명되는 모든 것의 중심인 것이다. 그러기에 일상으로 해서 무디어진 감각을 다듬어 생명의 샘에 목을 축이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박목월 시인은 아들인 박동규 교수를 낳기 전 경주에 있던 금융조합에서 출납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런대 실수로 고객에게 너무 많은 돈을 지불해 돈을 물어내야 했다고 한다. 결국 매달 월급에서 3분의 2를 3년 간 제하는 조건으로 해결을 보았는데 이 일 때문에 박목월 시인의 집안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어려운 생활을 했다.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집까지 걸어서 출퇴근을 하던 박목월 시인은 어느 여름 그 날도 벌판을 걸어 해가 산마루에 걸릴 즈음 논둑길로 들어섰는데 걷다가 우연히 뒤돌아보니 젖어서 미끈거리는 흙이 덮인 논길 위에 맨발바닥이 그대로 찍혀 있었더란다. 분명 신발은 신었지만 밑창이 다 닳아 헤져서 발바닥이 그대로 찍힌 것이었다. 너무 절망해 논둑에 그대로 앉아버렸던 그 마음이 바로 ‘나그네’라는 시였다고 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멀어서 남도 300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나그네]

 

그동안 알고 있던 낭만적인 정서와는 사뭇 다른 삶의 고뇌와 아픔이 이 시에 서려있었다. 고단한 일상에서 훨훨 벗어나 털어버리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털어버리지 못 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더 소중하게 끌어안고 고뇌하던 사람이 바로 박동규 교수의 ‘아버지’ 박목월 시인이었노라는 회상에는 또한 우리들의 ‘아버지’도 중첩되어 백번 공감이 갔다. 시절이 변하고 세상이 변해 아버지의 위상도 이제 옛날 같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다 한들 ‘아버지’가 변할 수 있을까.

 

내 아버지와 나는 같은 길에 서 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나서 지하철 의자에 앉아 누가 놓고 간 신문지를 들고 흝어보면서도 집 현관에 서 초인종을 누르면 “아버지, 고생하셨지요” 하고 뛰어나올 가족의 목소리만 귀에 쟁쟁하다. 비록 한쪽으로 무너진 구두 뒤축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몇 년 전엔 박동규 교수를 아침 대담 프로에서 자주 뵐 수 있었다. 그 분에 대해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참 애틋하다는 것이다. 특히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 박목월 시인을 따라 불국사에 소풍 갔던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는 목이 메어 차마 말을 잇지 못 하던 모습이 쉽게 지워지질 않는다.

 

동규는 친구 가족들과 불국사 구경을 가게 된 아버지를 발버둥을 쳐서 결국 따라가게 되었다. 밑창이 다 닳아빠지고 뒤축이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있던 동규는 어머니가 밤새 만들어주신 비단 덧신을 신고 아버지를 따라 불국사 경내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자꾸 벗겨지는 덧신이 불편해 벗어 던지고 맨발로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 다녔는데 일행 중 한 모녀가 동규에게 맨발이 괜찮느냐고 자꾸만 물어보았다. 처음 아버지께서는 이 상황을 모르셨던 모양이지만 토암산을 오르는 중에 결국 그 모녀가 동규에게 건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동규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날 동규는 아버지 등에 업혀 토암산을 올랐고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역에서 내려 다시 집으로 가는 논길에서도 아버지는 동규를 등에 업었다.

“아버지, 논길은 물렁해서 발바닥이 안 아파요”해도 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었다. 등 뒤에 업혀서 아버지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려 목을 잡고 있는 내 손등에 떨어졌다.(page34) ‘찢어지게’라고 표현하던 가난한 시절의 그 절절한 에피소드들은 이 책에도 실려 있다.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가슴이 찡해지는 대목들이다.

 

나는 어렸을 때 셋째 이모를 유난히 좋아했다.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이모는 시댁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살았는데 눈치도 없이 자주 그 댁으로 이모를 보러가는 걸 좋아했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어느 토요일 학교가 파하고 어김없이 이모네로 놀러간 나는 그날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다 저녁 때 무서운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한참 동안의 난리가 지나가고 나니 시간이 꽤나 늦어있었다. 지금 같으면 전화 한 통화면 되겠지만 그 때는 전화도 없던 시절이었다. 별 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집에 당도하니 집안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이모네 간 것을 몰랐던 가족들이 애를 태우며 나를 기다렸던 거다. 아버지. 아버지는 벽을 바라보고 앉아계셨다. 야단맞을 것이 걱정되어 잘 못 했노라 용서를 구하는 내 눈에 불현듯 아버지의 젖은 얼굴이 보였다. 평생토록 내게 아버지는 너무 무섭고 어려운 분이셨지만 마음 한 편엔 딸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다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를 잊을 수 없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자니 불현듯 주변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마음이 쓰인다. 뉴스에서 전해지는 상황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집에 돌아가면 평범한 아버지겠지. 괴롭거나 힘든 상황에 처한 남자들도 아버지일 것이고 좋은 일을 겪고 있는 이들도 아버지일 것이다. 부자 아버지도 있지만 그렇지 못 한 아버지가 더 많으리라는 예상이 어렵지도 않은 시절이다. 밖에서의 일이야 어떻든 나는 그들이 모두 집에서만큼은 좋은 아버지, 대접받는 아버지이길 기원한다. 그런 아버지가 많아지면 행복한 가족이 늘어날 것이고 더불어 세상도 행복해지리라고 믿고 싶다.

국가론 이펙트 / 사이먼 블랙번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서양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이며 저술가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에 ‘아카데메이아’라는 학문의 전당을 세웠다. 아카데메이아에서 수학한 그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플라톤의 사상은 크게 다섯 영역으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데아. 윤리. 정치. 영혼의 불멸성. 예술철학이 그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신의 선물이다. 따라서 항상 눈에 보여야 한다. 또한 그 아름다움은, 비록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다르게, 더 좋게 인식하는 것으로의 상승의 출발점은 될 수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상승의 출발점은 아니다.(중략) 플라톤이 제시한 견해는, 진정한 사랑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그 사물 안에 있는 불멸의 특질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적 경험의 패러다임은 초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곳의 현세적인 것으로, 감각이 상상력과 통찰력으로 확장될 때 우리가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인식하는 바로 이 세상이 그 대상인 것이다.(page166)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기본개념이다. ‘본질’ ‘실재’등의 의미로 쓰인다. 플라톤은 좋음 아름다움 용기 우정 등의 일반 개념에 상응ㅎ는 어떤 존재가 마음 밖에 있다고 보고 이런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다. 이데아는 개별사물과는 다른 특성들을 갖는다. 개별 사물은 감각의 대상이 되는데 반해, 이데아는 순수한 사유능력인 지성 또는 정신의 대상인 누스가 된다. 개별사물은 생성. 소멸하고 변화하는 특성을 갖는 반면, 이데아는 영원불변 하는 특성을 갖는 것으로서 참된 존재, 즉 실재이다. 더 나아가 이데아는 개별 사물들의 근본이 되는 완전한 존재이며 개별 사물들은 이데아를 모방한 불완전한 존재라고 플라톤은 보았다.

플라톤 철학에서의 윤리학은 ‘모든 사람은 행복을 바란다’라는 명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플라톤은 행복이란 영혼이 건전한 상태일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영혼의 건전함을 가져오는 것은 덕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덕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책의 14번째 장 ‘무질서한 도시들, 무모한 사람들’편에 깊이 매료되었다.

 

민주 공동체는 “자주와 언론의 자쥬가 보장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체제이다. 이 공동체는 다채로눈 다양성을 만들어내며,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다양한 법칙과 제도를 실험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사회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 “실제료는 동등하든 동등하지 않든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유쾌하고 느슨하고 변화도 많은 정치체제”의 청사진이 바로 민주 공동체이다.(page196)

 

그러나 방종은 금세 예속과 굴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 일은 이렇게 벌어진다. ‘수벌’ 계층에는 강경하고 범죄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포함된다. 그런 사람들이 파벌을 형성하면서 점차 민주의회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반대파를 침묵시키고, 서민을 불쾌하게 하는 사람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빼앗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인심을 쓴다. 반대의견이 커지고 소송이 봇물 터지듯이 벌어지면서 자칭 ‘민중의 수호자’라는 민중 선동가가 출현하게 된다. 그런데 그 민중의 수호자가 일단 피 맛을 보게 되면 불가피하게 참주 정치 체제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된다.(page200)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이론에 기초한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영혼론을 바탕으로 이상국가에 관해 기술했다. 플랕ㄴ은 국가나 사회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했다. 사회를 지배하는 철인 통치자와 질서를 유지하거나 사회를 지키는 수호자, 그리고 사회의 물질적 필요를 제공하는 농부, 상인, 장인들의 시민이 국가를 구성한다. 철인 통치자는 지성을, 수호자는 의지를 일반 시민은 욕망을 각각 대표한다. 플라톤의 이상사회는 철인 통치자가 수호자의 도움을 받아 시미들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올바른 영혼과 비슷하다.

 

플라톤은 이미 몇 번이나 읽기에 도전했던 부분이고 실재로 어떤 때는 제법 많은 부분까지 읽어나가다가 책을 덮기도 했으며 더러는 부분부분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가며 읽기도 했다. 즉, 돌아보건대 처음부터 끝가지 모두 읽어낸 적은 없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몇 번의 반복이 마치 다 읽어본 듯 한 착각을 만들어내며 플라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국가론 이펙트]를 읽으며 마치 높은 산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듯 플라톤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구석구석에 숨어서 잘 보이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부분들을 확인했으니 이제 찾아가 세밀하게 관찰하기도 훨씬 쉬어지 것 같다.

 

내가 매료 되었던 14장엔 플라톤이 아테네 몰락을 서술한 글을 옮겨 놓은 부분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사회가 안타깝게도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조목조목 설명했던 그 무서운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에는 국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국가를 위해, 국익에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조언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그 국민들의 의견이라는 것이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을 어떻게 수월하게 하느냐, 그것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만이 의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고, 또 그런 사람들이 현명하고 국가를 위하는 훌륭한 국민으로 존중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하고 무모한 일을 서슴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국민에게 온건하고 신중한 조언을 하는 사람은 겁쟁이로 간주되었고, 국민의 힘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힘에 위해가 되는 존재로 생각되었다. 물론 놀랄 일은 아니다. 상당히 번영을 누리던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 자신을 덜 사랑하게 만드는 조언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page210)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것들 / 빈센트 스태니포스

 

 

우리들 때문에 크게 노하거나 좌절한 적이 있으셨나요? 그때 어떻게 하셨나요?

Did you ever feel complete anger and frustration at your children?

How did you deal with it?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나는 유난히 셋째 이모와 이모부를 좋아했었다. 아마도 외갓집에 종종 이모를 만나러 오던 군인시절의 이모부가 참 멋있게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어쨌든 두 분이 결혼 후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치 없이 토, 일요일이면 이모를 보러 훠이훠이 이모네 집을 찾아가곤 했었다. 그 여름날도 그렇게 생각 없이 이모네 집에 갔던 것인데 난데없는 폭우를 만나는 바람에 꼼짝도 못 하고 이모네 집에 있다가 아주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는 전화도 흔치 않던 시절이니 집에 연락을 할 수도 없었고 늦은 밤 집에 도착하니 집안이 홀딱 뒤집어지다시피 난리가 나있었다. 엄마는 뭐라 뭐라 야단을 치셨지만 그 때 아버지께서 우시던 모습을 처음 보았었다. 늘 무섭고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께서 나를 걱정하셔서 눈물을 지으셨다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던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나는 벌써 어른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How did you deal with your dad's death?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것들]은 제목만으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읽어보고 싶었다. 지은이는 갑자기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후에야 아버지께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만이 있는 책을 처음엔 그냥 어? 하고 가볍게 읽어버렸고 그 다음엔 나도 우리 아버지께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있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과 같은 물음에 표시를 해가며 읽어보았다. 어느 날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에 가방에 넣어가지고 가서는 불현듯 남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들춰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마음이 또 남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었나요?

As a boy, what did you want to be when you grew up?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근동에 소문난 서당 훈장님이셨다고 한다. 물론 재산도 많으셨지만 당신만 생각하셨지 자식들의 교육엔 인색하셨던 분이셨던 거 같다. 가끔 아버지는 새벽에 조치원역까지 나가셔서 서울로 오는 기차를 타셨다고 하셨다. 그야말로 ‘빤스’바람에 객지로 나오셨다는 얘기를 하시면 나는 그 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조치원’이라는 지명이 왜 그리도 아득하던지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시던 그 새벽의 공기가 너무 생생하게 피부에 와 닿기도 했었다.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늘 그리운가요? 언제 특별히 더 그러신가요?

Do you ever think about your mom and dad?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가 5학년이었던가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와 보니 할머니께서 계셨다. 그 전까지 할머니를 뵌 적이 없었던 나는 이상하게도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할머니와 친해질 수 없었는데 아버지도 할머니께 다정다감한 아들은 아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렇지만, 아버지도 당신만 아셨던 할아버지와 쌀쌀맞으셨던 할머니를 그리워 하셨겠지.

 

 

여백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라는 것을 이 책을 만나면서 새삼스럽게 느꼈다. 아무 것도 대답해주지 않음에도 스스로 대답을 찾게 하는 책. 상담에서의 첫 번째 조건이 내방인의 말에 경청하는 거라고 했던가.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얘기하게 유도해주고는 성실한 상담자처럼 독자의 얘기에 귀 기울여 준다.

말 없음으로 더 많은 말을 해주는 책. 말 없음으로 더 많은 의미를 스스로 찾게 만드는 책.

오늘 마음의 조임쇠를 조금 풀어놓아도 좋은 편안한 책 한 권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