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그림이 나를 그리고, 그 그림이 내 그림자가 그린다.
그림으로 세상 속에 들어오고, 그림으로 세상 밖에 나간다.
그림은 살아서 나를 가두고, 죽은 뒤에는 나를 세상에 꺼내 놓는다.
그림을 그리는 건 삶의 그림자를 그려내는 것……
그림이란 무엇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그리는가?
지금의 화가들은 조선시대 환쟁이로 그림을 천업으로 여기고 산 중인 내지는 그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자기식대로 살았고, 자기 식대로 그림을 그려 작품을 남겼으며, 한 시대를 바람처럼 왔다가 갔다.
어제도 그릴 수가 없었고, 오늘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마음이 열리는 길한 날을 택하여 선생님의 축수를 위해 바칠까 합니다. 난초 하나 바위 하나가 별을 따기보다 어렵습니다. 참담하게 애를... 애를 써보지만 허망함만 느낍니다. 비록 그리지 않았으니 그린 것이나 진배 없습니다.<정민, 죽비소리, 개심>
우리 책에도 언급되는 조선후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던 조희룡이 한 말이다. 누군가 그에게 축수의 그림을 청해 왔던 모양이다. 그리기는 해야겠는데, 도무지 흥이 오르지 않는다. 공연히 벼루에 먹을 갈아보지만 도저히 붓을 들 수가 없다. 붓을 들었다 놓기를 수 십 번에 겨우 붓을 끼적거리 보지만, 종이만 허비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가들은 붓하고 종이만 있으면 저절로 글씨가 써지고 그림이 그려지는 줄 안다. 하지만 착각이다. 그 사람들은 화가들의 이런 마음을 잘 모른다. 흥만 돋으면 붓끝이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삽시간에 몇 장이고 후다닥 그려질 그림이 몇 날 며칠을 끙끙대도 난초 하나 바위 하나 그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오죽 괴로웠으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했을까?
소위 유명한 화가들이 남긴 작품이 아름답고 세인들에게 관심과 주목을 받는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냥 대충 막 그린 게 아니라, 그 그림, 글씨 속에는 혼이 들어가 있고, 정신이 들어가 있다.
제목이 독특한 <그리메 그린다>는 짐작대로 화가, 그림에 관한 이야기 책이지만, 보통의 예술인들이 그리는 일반적인 그림이 아닌, 혼이 들어간 그림, 정신이 담겨 있는 그림을 그렸던 조선시대 화가들의 이야기이다.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 조선 최고의 화원이었던 단원 김홍도, 그리고 또 한명의 천재 화가 미인도의 주인 혜원 신윤복, 화단의 아웃사이더 이자 풍운아 오원 장승업, 부모에게 혼이 나는 와중에 눈에서 난 눈물로까지 그림을 그렸다던 그림에 미친 이징,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 애꾸눈의 화가 최북, 추사의 애정을 듬뿍 받은 소치 허련, 조선을 그렸던 겸재 정선 등등 이들은 모두 종이에 조선을 담았던 화원들이었다.
- 삐딱한 취화선(醉畵仙) 오원 장승업
“대체 이 그림을 누가 그린 것이냐?”
“제가 그만……!!”
“내 앞에서 다시 그려 보거라.”
승업이 그림을 마치자 이응헌은 기가 막힌 듯 천장을 올려보며 생각했다. 고아로 떠돌며 글도 모르는 하인 놈이, 그림 그리는 사라들 어깨너머로 배워서 이 정도에 이르다니! 어찌 신이 돕지 않고서야……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림을 한번 제대로 배워 보거라.”
오원 장승업은 원래 이응헌의 지물포에서 일하는 하인이었다. 그가 붓을 잡게 된 배경은 이러했던 것이다.……승업은 하루 종일 시달린 몸으로 밤이면 등불 밑에 쭈그리고 앉아 남이 쓰다 버린 몽당붓과 여백의 종이로 죽어라 그렸다.……뜰에 핀 목단이면 멀리서만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까이 가서 쭈그리고 앉아 관찰하여 꽃을 뇌리에 새겼다.…… 장승업의 재능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오원은 유숙에게 그림을 배웠는데, 어느 순간 실력이 스승을 능가하게 되자, 자신만의 강한 개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조국원曰: “게의 엄지 발가락은 두 개인데, 어쩐 일로 이 그림 게 발가락은 세 개인가?”
오세창曰: “내가 이 그림을 받을 때, ‘어째 게 발가락을 세 개를 그리셨소?’ 하니깐, 오원이 하는 말이 ‘다른 게 있어야지, 같으면 볼 재미가 있나’한단 말이야.”
이처럼 장승업은 소탈하고 장난기 많은 화가였다. 오원의 화풍을 이어받은 제자는 조석진과 안중식인데, 훗날 그의 제자들이 각각 서울대와 홍익대에 동양학과를 만들게 된다. 즉 한국 현대 동양화의 뿌리가 장승업인 것을 알 수 있다.
-임금의 그림 벗, 이징
윤광심이 펴낸 <병세집>에 보면, 이징이 어려서 다락에 올라 그림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집에서는 그를 찾아 사흘 동안이나 돌아다니다가 겨우 찾았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종아리를 치자 눈물이 줄줄 흘리면서도 흘러내리는 눈물로 새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 이는 가히 그림으로 영욕을 잊었다고 할 만하다.
이징은 어려서는 흐르는 눈물을 찍어 그림을 그렸고, 어른이 되어서는 임금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이징은 인조 임금이 매우 좋아했던 화원이며 그림 벗이었던 것이다.
-맛난 만남... 소치 허련 추사에게 그림을 배우다.
초의는 추사를 찾아가 허련이 그린 그림 몇 점을 보였다. 당대 최고의 거목은 뭐라고 했을까?
추사曰: 어찌 이처럼 뛰어난 인재와 손잡고 함께 오지 못하셨소.
이 인연으로 전남 진도 시골뜨기 허련은 서울로 올라와 당대 최고의 거학(巨學)인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그림 수업을 받게 된다.……소치는 추사의 적극적인 가르침에 온몸으로 화답했다. 소치의 면전에서 “자네는 천 리 길에 겨우 세 걸음만 옮겨 놓은 것과 같네”라고 했지만, 위당 신관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허치는 참으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화법이 우리나라의 누추한 습관을 깨끗이 씻어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을게다.”라고 하며, 그의 그림에 대해서 극찬을 했다.
<그리메 그린다>는 ‘조선 화가 기행집’답게 조선 대표 화가들과 그들이 그린 그림에 대한 읽을거리, 볼거리가 풍성한 책이다. 다만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림이다.
그림이 흑백이 아닌 컬러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 봤다. <바람의 화원>, <취화선>, <미인도> 등의 영화와 드라마를 재밌게 보신 분들께 조심스레 권해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