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플라시보인가 할 정도로, 이 시리즈에 대해 접해보지도 않았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종종 스치듯 보는 온라인상의 글들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이 플라시보 시리즈라는 것을 익숙하다할 정도로 보게 되면서, 한번쯤 읽어 볼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내가 읽은 플라시보 시리즈 12번째 이야기인 <의뢰한 일>은 제목에서 약간의 냉소적 이미지가 풍겼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보다 아주 옅은 봄날의 연기와 같은 건조함이었다. 30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작가에 대한 존경어린 시선을 던져본다. 글을 한번이라도 써봤다면, 장편보다 단편이 어렵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한 단편 당 3페이지 정도의 짧은 단편 속에 녹아든 작가의 냉철한 시각에 소름 돋기도 했다. 이런 식의 짧은 단편에 익숙하지 않아, 읽고도 뭐지?라는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다시 읽은 단편이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굉장히 특이하면서도 조금만 시각을 넓혀보면 보편적인 주제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생각하길, 작가는 이런 짧은 단편의 소재를 신문기사 등의 지나가는 작은 사건사고들이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어 몇 분을 허공 속에 시선을 두는 일이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플라시보 시리즈의 감각(?)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때론 작가가 이야기하는 것과 내가 이해하는 것이 맞는 지 어떤지 알 수가 없어 살짝 괴롭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을 알기 위해 독서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경우처럼 두 가지 이상의 생각이 떠올라 고민하는 건 또 오랜만이라 그랬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기분 좋은 상대’에서는 좋은 사람들이 많은,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바라면서도 묘하게 꼬아놓은 것 같다. 결국은 자기 이익만을 위한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뜻하는 걸로 나름의 결론을 지었지만, 어떤 현상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사념에 의해 탄생한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움찔할 정도의 공감을 얻으면서, 부정하고 싶을 정도의 공포도 느꼈다. 물론 단순 사회현상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단어 그대로 지나가는 이야기식의, 흥미위주의 단편들도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느낀 플라시보 시리즈(단 한권이지만)는 단순하다고 하기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고, 진지하고 사색적이라고 하기엔 그 정도가 사탕수수 같은 느낌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독자가 읽음으로 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달콤한 설탕의 존재가 된다. 아직 플라시보 시리즈 중 한 권을 봤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의 세 번째 단편인 ‘초여름의 어느 날’은 내겐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다.

요즘 독서를 하면, 결과적으로 이해가 부족한 책들을 많이 읽게 됐다. 원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서 살짝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플라시보 시리즈의 한 문구를 통해 차분히 시간의 흐름을 기다려 본다.

“그렇게 정색을 할 필요는 없어. 인생이란 차분한 매일의 연속이야.”   -92p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 이 4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완결이 나오지 않은 시리즈물을 읽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읽기 시작한 건 해리포터정도인 것 같다.(그것도 아직 다 안 읽었지만) 지금 테메레르4권을 다 읽고, 온 몸을 꼬며 다음 편이 궁금해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 저자인 나오미 노빅이 조앤 K.롤링처럼 첫 소설인데 흥행 면에서 우수할 뿐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판타지 소설을 내놓았다는 게 흥미롭다.

1권에서부터 3권까지는 테메레르 속 인물과 그 관계, 역사이야기들이 펼쳐졌다면, 4권에서는 중심이 잡혔기에, 본격적으로 역사를 뒤틀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다. 그로 인한 재미가 컸다는 건 말할 필요 있을까. 그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이 4권이야말로 테메레르가 지향하는 목표의 전환점, 그 시작이 아닐까싶다. 전환점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거창한 감이 없지나마 있지만, 작가는 이 4편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그것이 반증이 아닐 런지.

4편인 ‘상아의 제국’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와 3부가 원인과 결과라면, 2부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펼쳐지는 과정을 다루었다. 그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나폴레옹이 전면에 등장하는 등, 모든 점에서 앞선 3권의 테메레르보다 조금은 새롭게 다가왔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모험은 그동안 무적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환상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무적이니 환상이니, 빗댈 어휘가 딸려서 표현한 것이고. 예를 들면 로랜스가 포로로 잡힌다든지, 고문을 당한다든지 하는 거 말이다. 거대한 용 테메레르의 막강함이 있는데 어찌 그런 일이? 읽어보시길... 로랜스가 포로로 된 그 장소를 묘사하는 것에서 예전에 타임머신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가파른 절벽에 집들이 존재하는, 꽤 몽환적으로 느꼈던 장면이었는데, 그 화면과 순간 오버랩 되면서 딴 세계에 잠깐 발을 들여놓은 나를 발견했다.

심도 있게는, 노예해방, 용의 권익을 위한 투쟁, 반역 등을 둘러싼 인간의 이중적 모습들을 보여줬던 것 같다. 당시 영국사회에 대한 회의가 들 정도로. 물론 픽션인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 나폴레옹에 대해 폭군에 대한 이미지는 덜하다. 오히려 영웅적인 면모로 기억되는데 나폴레옹의 전설이나 말 타고 있는 초상화가 한 몫 한 것 같다. 그러면서 느끼길 전쟁의 모든 시작과 끝은 일반 대중이 아닌 다수를 아우르는 일부 계층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테메레르는 순수하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할 뿐 아니라, 동료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용기도 있다. 이런 용의 성품을 가진 인간이라면 성인[聖人]이라 불릴 수도 있을까. 테메레르와 그의 친구인 로랜스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내 피부를 진정시키며 기다려 본다.    

“아무리 도덕적이고 정당하며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주장이라 해도 자시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면 사람들은 결코 수용하려 들지 않으니까.”    -35 p 

 어느 날 거울 속의 나를 볼 때 이게 나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때론 그 정도가 너무 진지해서 내가 아닌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있었다. 내 얼굴이 낯선 이 현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지금까지 자아, 특히 철학적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깊게 파고들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이 가로막을 것 같아서 겉핥기식만으로도 만족했었다. 너무 무게감 있는 책들은 보다가 그만두기도 하는, 인내심 결여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지라 철학적 관념에 대한 책을 선택할 때 신중을 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매번 그런 노력은 한낱 물거품처럼 사르륵 사라지고 말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니 이번 경우도 그에 해당됐다. 제목만으로 나를 끌기에 충분했던 이 책은 자아와 인경동일성 사상에 대한 이야기다. 자아는 그렇다 치고, 인격동일성이라고? 먼저 고백하길, 이 책의 10%도 제대로 이해했다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꽤 방대한 분량의 철학적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는 것처럼 그 무게가 사뭇 단단하게 다가왔다. 자아, 인경동일성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그에 관련된 다양한 사상들을 시대를 따라가며 강의한 느낌을 받았다. 생소한 사상가의 이름도 꽤 많이 보였다. 겉핥기는커녕, 초초한 마음에 읽은 느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상과 사상가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슬쩍 들었다. 인간이란 듣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 것만, 듣고 보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결국은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아직은 이 책을 100%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단계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게 조심스럽지만, 최대한 내가 느낀 점을 주관적으로나마 끼적여보려고 한다.

인격동일성에 대한 개념이기보다는, 조금 커다란 의미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이것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흔히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진정한 ‘나’를 발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의 기초적인 배경이 인경동일성의 한 일부분이리라. 영혼에 대한 사상가들의 판단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나뉘는 것 같았다. 영혼의 실체여부와 그 기능에 대한 판단이 유 아니면 무랄까. 아니 그거보다는, 영혼의 쓰임새에 중점을 두는 모양새였다. 영혼이라... 문득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스쳐지나간다.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면,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흘러나오는 것 같다. 어떤 사상가는 죽음은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한다. 왠지 영혼을 떠올리면 환상적인 측면이 강한 느낌이다. 이것이 인격동일성과 어떤 식으로 연관된다는 소리일까.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보자. 1분 전의 나와 1분 후의 나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재만을 놓고 본다면, 1분 전과 1분 후의 나는 같으면서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 아주 사소하게, 1분 전에는 필요했던 것이 1분 후에는 필요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걸 두고서도 그 순간의 인격체가 과연 같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 같다. 놀랍다. 일상생활에서 누가 이정도로 생각을 하겠느냐마는 읽고 있으면 그럴 듯하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내가 그걸 다시 재구성해서 꺼내는 걸 제대로 하지 못하는 느낌도 있다만. 인간과 인격체(자아)가 동일 선상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그런 게 인격동일성 사상의 한 개념인 것 같다. 이 사상은 딱 집어 말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책 자체에서도 방대한 내용으로 다가올 뿐 아니라, 약간은 좀 모호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리뷰 내용 자체도 두루뭉술하고 애매한 표현들만 잔뜩 인 것 같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영혼의 종착점은 무엇이고, 내세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 인격동일성 사상과 연관 지어 이 책속에서 등장한다. 아마 현재 이 모든 것의 최종시점은 프로이트가 아닐까. 진행 중이라는 게 옳긴 하겠지만, 현재까지의 이야기가 중요한 부분이다. 정신, 자아, 인격... 보이지 않는, 인간을 형성하는 것들에 항상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 난 오늘도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곳엔 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