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으면서도 쉬운 책이었다. 여기서 쉽다는 건 가볍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해하기에 생각보다 쉬웠다는 이야기다.(은근히 긴장했다.) 이후는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른 것 같다. 신화총서라고 해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며 단순히 생각했는데, 신화의 부분을 차용해 소설형태로 재탄생한 작품이었다. <소녀, 소년을 만나다>는 처음부터 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첫 소절부터, “내 소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하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뭔가 이상한 감을 느꼈다, 정체모를 안개 속에 있는 느낌. 초반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래서 읽는 속도도 더뎠다. 조금 익숙해지면서 이 책과의 교감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글 속에서 느껴지는 그 의미모를 분위기가 내 안에 있는 안개를 조금씩 걷히게 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의>에 등장하는 이피스 신화가 이 소설이 가는 방향을 잡고 있었다. 이피스 신화, 신체는 여성이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완벽한 남성으로 자란 한 소녀(소년)가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게 되면서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에 의문을 갖고 신들에게 분노하는, 그러다 결말은 소녀가 소년으로 변신하면서 해피앤딩을 이루는 신화이다. 이 내용을 현대적 감각에 재료를 새로 가감하면서 다듬고, 요리를 한 것이다. 동성애를 굉장히 신비롭게 다루고 있다고 여겨졌다. 살짝 붕 뜬 느낌으로 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자매가 등장한다. 언니인 이모겐과 동생인 앤시아. 이 책의 특징 중 하나가 두 자매의 시점을 번갈아가면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 뿐만 아니라, 앤시아의 애인이자 이모겐의 동창이기도 한 로빈의 모호한 모습에서, 비슷한 듯 다른 자매의 의식과 모습을 보며 ‘여성’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일지 한번쯤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이 책은 동성애적인 분위기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페미니즘적인 요소도 곳곳에서 보인다고 생각한다. 한국이야 남아선호사상이 존재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남녀평등이 보다 앞선다고 여겼던 유럽에서 근본적인 남녀차별의 수치적 통계를 보고 조금 놀랐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여성인권성장에 대해서만 주장하지는 않는다. 기업의 윤리의식에 통렬한 비판도 날리면서, 최근 구매한 ‘물’을 마시는 내 모습과 묘하고 오버랩 된다.

 

이 긴~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핵심이 자리 잡고 있다. 보통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가장 인간다운 면모를 지닌다고 알려져 있다. 신화의 존재의미가 무엇일까, 내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처럼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모습을 형상화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인간이란 모름지기 뭔가 수단이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정말 다양한 주제들을 내포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수용을 했는지 좀 회의적이다. 단편적이 시각을 봤을 때 주변에 이런 인물들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경험의 차이가 이질감을 느끼게 할 것이고. 단순히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몽환적이고 신비롭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모르게 몰입이 됐던 것 같다. 한마디로 이 책을 표현하기 어렵다. 점 세 개였다가, 물음표와 느낌표가 어우러졌다가, 다시 점 세 개가 됐다고 할까. 얇지만 절대 얇지 않은, 쉽지만 절대 쉽지 않은 책이었다. 

 내 말은, 신화가 전적으로 공동체의 필요와 상상력에 의해 생겨나느냐 하는 거야. 내가 말했다. 마치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서 출현하는 것처럼 말이지. 아니면 다양한 이익집단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것일까? 예를 들어 광고는 새로운 종류의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기업체는 소비자에게 그럴듯한 신화를 들려줌으로써 자사의 생수나 그 밖의 제품들을 사게끔 설득하는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거저 주어지는 어떤 것들을 굳이 값을 지불하고 사는 것일까? 저들은 곧 새로운 신화를 생각해내어 공기까지 팔려고 들지 않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예컨대 마른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요즘 사회에 만연해 있는 신화 때문에 더 날씬해지고 싶어 하는 것일까?  -112p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거대한 나무에 작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단순히 하나의 생명체로만 생각했던 나무가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지표요, 유일한 생존공간이다. 가깝게는 발밑의 작은 개미들이 될 수도 있다. 2mm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생명체인 우리의 주인공, 토비 롤네스는 부모님과 함께 나무의 생명에 대해 알아가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이렇게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한 아이가 소년이 되고, 소년이 청년이 되는 과정을 통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가는 것이 성장 모험 소설의 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비해, 토비의 소년시절은 부모님과의 이별,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조 미츄라는 뼛속까지 ‘나쁜 놈’이 등장하는데, 그는 나무라는 생명체를 존중하기는커녕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파괴를 일삼는다. 조 미츄의 이런 모습이 현 우리의 모습과 오버랩 되는 건 지나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지금 지구 곳곳에서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파괴를 일삼고 있는 일은 현실이지 않은가.

모든 환경이 절망으로 내딛고, 삶의 의지마저 무너지면 보통 살기 싫어진다. 그러나 인생이란 그리 녹록치 않으니, 살기 싫어도 살게 되는 일상을 맞이하게 된다. 토비도 모든 걸 잃어버렸다 생각하는 나날 속에 ‘적응’이라는 이름하에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나무에서가 아닌 땅에서 소년시절의 한 부분을 경험한다. 정적인 나무에서의 삶과는 다르게 땅, 풀숲에서의 삶은 동적이었고 자연의 거대함을 마주하게 된다. 이때의 짧은 경험이 토비에게는 인생의 커대란 자산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사람은 본디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 하나의 본능인 만큼, 나무에서의 청년 토비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많은 적들이 살고 있는 나무에서 토비의 모험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지속되리라 여겨진다. 나무에 적들만 있으랴, 사랑하는 사람, 함께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진실을 찾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후반으로 달려간다.

동화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또 그렇게 단정 짓기엔 꽤 두툼하다. 한 작은 아이의 성상과정 속에 으레 있을 법한 가족, 친구, 우정, 사랑, 모험 등이 어울려 있고, 거기에 자연의 소중함이라는 것이 더 존재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요즘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많은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대운하와 뉴타운이 생각났다.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 무지한 내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기에는 모하고, 토비의 아버지인 심 롤네스가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을 뿐이다. “이유 없는 변화란 없다.”라는 것으로, 이 정도의 논란을 야기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무한정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연이 존재하는지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오히려 자연은 무한하지 않다는 게 현대의 정설 아니던가. 한번 틀어져버린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피해는 감히 논할 길이 없을 것 같다. 경제! 물론 중요하다. 배고프면 자연이고 뭐고 없는 게 사실이니까. 문득 사실과 진실의 차이점이 떠오른다. 어떤 현상이나 과정이 사실일지라도 그 안에 내포된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있다는 생각한다. 바로 옆에 쓰레기를 지나치지 않다든가, 중요한 한 표를 행사한다든가,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가장 먼저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한다면 진실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함께 읽기에 너무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이로써 시바사키 토모카와 두 번째 만남을 하게 됐다. 처음 <그 거리의 현재는>이라는 소설로 이 작가를 만났을 때, 참 밋밋하다. 아무런 사건도, 극적 결말도, 진득한 사랑도, 감동적인 우정도 없는데 소설이 형성이 된다. 표지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것에 반해, 그 내용은 예상보다 조금 싱거운 첫 만남이었다. 보통 이런 느낌을 받게 되면 다음에 이 작가의 글을 들기 쉽지 않다. 그런데 다시 들었던 이유는, 어떤 확신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것을 예상했다가 너무 잔잔한 수면을 떠올리게 하면, 기억 속에 그 소설은 차츰 잊게 된다. 아직까지 시바사키 토모카라는 이름과 <그 거리의 현재는>이라는 제목 뿐 아니라, <오늘의 사건사고>이라는 소설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들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도대체 왜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리 재미있게 읽은 것도 아니고 감동적이지도 않았는데 왜 기억에 남아있을까.

두 번째 만남 역시 큰 파동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오늘의 사건사고라지만, 굵직한 무언가가 존재하기는커녕 단어 그대로 평범한 이야기다. 그래서 책 내용을 이야기하고 자시고 할 게 없다. 그저 몇몇 젊은이들이 집들이를 하면서 술 한 잔씩 기울이고 그날의 일기 같은 느낌의 소설이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소설보다는 오히려 에세이 같은 느낌이 풍긴다. 시바사키 토모카의 스타일이 확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의 한 면을 일본소설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자아내고 있는데, 문득 앞서 읽었던 작품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기분이 들었다. <그 거리의 현재는>는 단순히 좀 밋밋하다, 평범하다, 그냥 그렇다는 말로만 나타냈다면, 두 번째 만남은 이 작가에 대한 내공이 생긴 건지(고작 두 번째인데?) 그동안 알게 모르게 한구석에 눌러놨던 생각들이 조금 고개를 들었다. 생각하고 궁금하지만, 그냥 흘려보낸 생각들.
일상의 평범함을 바라면서도 그게 지속되지 않길 원하는 건 무슨 조화[造化]일까. 나 자신만 생각해봐도,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일상의 평범함이 좋아.”라든지, “평범이 가장 어려운 거야.”라는 이야기를 하고 듣기도 한다. 하지만 평범함은 마치 시대착오적 생각인 것처럼 여기는 시대이기도 하지 않던가. 개성을 강조하고, 평범하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이 시대에 양측의 의견에 우왕좌왕한다. 그럴 때마다 이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리라고, 이럴 때만 옛 선비의 느긋함을 따라하는 것 같다. 이 질문에 누가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을까. 정답이 있기나 할까. 이런 질문을 할 때부터 정답은 없을 것이라 여기기에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시바사키 토모카는 그래도 여유로운 일상의 평범함에 점수를 더 준 듯싶다. 책 후반에 어떤 일본작가가 이 책에 대한 평을 써놓은 것이 있는데, 읽을 때는 미처 몰랐던 부분을 집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해서 어느 한쪽으로만 모는 건, 작가의 오만함이 아닐까. 에필로그 형식으로 “그 후의 사건사고”가 등장한다. 이 부분은 좀 갸우뚱하다. 아마도 본인의 소설이 영화화되는 걸 보면서 신기한 마음에, 덩달아 흥분해서 쓴 부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잔잔한 수면에 작은 조약돌 하나만 던져도 퐁당 소리와 함께 어떤 울림과 둥글게 퍼지는 수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주 작은 계기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