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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러시아 3대문호라고 하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쉽게 떠올리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지?”하는 질문을 듣는다.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어렵게만 다가와서 접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한 사람인,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의 이름을 정확히 인식하게 된지는 오래지 않았다. 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비해 투르게네프의 대중성(?)이 떨어질까? 오히려 <첫사랑>을 읽으면 소설 자체적으로는 대중성이 더 좋은 것 같은데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논한다는 것 자체가 참 주제 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 문학이라고는 기억 속에서, <첫사랑>이 처음인 것 같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닌,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통해 러시아문학에 발가락 끄트머리를 담게 된 것이다.

펭귄클래식에서 <첫사랑>은 서문, 첫사랑, 작품해설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당혹스러웠던 점은 서문을 읽는데 중요한 후반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어?! 하는 낮은 비명이 흘러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묘미도 있었다. 예를 들면 독자는 범인을 알고 있지만, 책 속 주인공은 모른다. 서서히 밝혀지는 내막을 보며, 주인공이 사실에 다가갈수록 조급한 마음이 들게 한다. 대신 주인공과 함께 범인을 알아가는 또다른 묘미는 잃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전자를 원하면 서문을 먼저 읽고, 후자를 원하면 본문을 읽고 난 후에 서문 읽는 걸 권해본다. (물론 이 책이 추리소설은 아닌지라 크게 상관치 않을 수도 있다. 요소요소 복선이 있어 서문을 읽지 않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구성이다.)

16세 소년인(우리나라 나이로는 18세)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새로운 이웃에 관심이 많다. 그 나이 소년들이 으레 겪는 호기심이 발동한 건지도 모른다만, 그 새로운 이웃의 딸인 지나이다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보통 연상의 여인에 대한 동경이라고 다가왔다. 다만 환경적 요소에서 투르게네프만의 경험이 녹아있는 그 첫사랑이라 좀 오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스물 한 살인 그녀에게 페트로비치는 분명 어린애로 보였을 것이다. 더욱이 귀족출신인데도 가난에 찌든 집안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집밖의 모습은 도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극히 귀족출신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추종자를 거느리고, 구애를 받는 모습이 다소 천박해 보이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적어도 페트로비치에게 지나이다는 한 마리 파랑새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파랑새의 실제유무를 뒤로하더라도, 그것의 환상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한 꺼풀이라도 벗겨지면 든든하다고 여겼던 막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페트로비치는 지나이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 충격을 받는다. 충격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좀 과격한 것 같지만..., 그냥 받아들인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질투도 분노도 없이, 인정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열여섯이라는, 어른과 아이의 미묘한 경계선에 있는 페트로비치를 통해, 어른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한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이리라. 페트로비치는 소년이다. 지나이다를 향한 그의 사랑은 지극히 순수하고 소년다운 발상이다. 그러나 어른의 사랑은 질투, 증오, 이기심 등이 얽혀 다소 불명확해 보인다.
혹자들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 사회의식의 결여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질적 측면을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두 사람의 글에 비하면 조금 가벼운 느낌의 <첫사랑>이긴 하겠지만, 추구하는 면이 달랐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래도 좀 편을 들자면, <첫사랑>에 내제된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의 붕괴를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문의 내용 중,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설교자인 반면 투르게네프는 간결하고 고전적이란다. 톨스토이의 단편선 만을 봤기에 개인적 판단은 뒤로 미루고, 지금까지 평가절하 된 투르게네프가 다시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은 반갑다.

<첫사랑>은 투르게네프 본인의 경험이 녹록치 않게 포함된 자전적 소설이다. 항상 두루뭉술하게 관심을 갖던 러시아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는 시점인지도 모르겠다. 시발점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들 들다>를 통해서였는데, 투르게네프의 일생을 도스토예프스키에 빗대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던 책이었다. 러시아문학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면, <첫사랑>을 시작으로 해도 좋을 것 같다. 강렬하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첫사랑>, 첫 두근거림 뒤에 추억이 자리 잡겠구나.

 

 

 50년대 미국의 일상은 어땠을까? 빌 브라이슨이라는 미국 작가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한 유쾌한 책 한권을 냈다. 잠시 50년대 한국 상황을 떠올린다. 6.25가 발발해 전쟁이 한창이던 한반도에 반해 태평양 건너 미국은 풍요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지금의 미국보다는 좀 느리고 답답한 면도 있겠지만, 그래도 순순함이 남아있던 황금기가 아니었을까싶다.

“이 책은 대단한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작은 것과 작은 것이 조금씩 커가는 과정을 다룬 책이다.”(51p) 라고 빌 브라이슨이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은 한낱 흐르는 기억으로 치부될 수 있는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했다. 그의 기억에 감탄할 만큼 소소한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중에서 좀 재창조된 것도 있겠지만 누가 100% 완벽히 기억을 하겠는가.

개인적으로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생소한 작가였다. 한 번도 작품을 통해 만나보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은, 그가 어떤 분위기의 작가인지 어림짐작하게 했다. 아마도 그의 글에는 유쾌함과 그 속에 통렬한 비판의식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

다시 책에 집중을 해서, 50년대 미국은 미래에 대한 무궁무진한 꿈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을 읽는 순간, 그 때 그 시절로의 회상이 저절로 되리라.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인데도 50년대 미국 생활상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이니 묘사 등, 작가의 기억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수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더볼트라는 닉네임을 가진 유년시절의 작가는 개구쟁이를 포괄하는, 어찌 보면 좀 악동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머리에서 피가 쏟아질 정도의 위험하고 심각한 장면인데도,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더라. 이 책은 시침 뚝 떼고,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나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인상을 쓰면 심각한 사건에서도 재미로 승화시켜버린다. 아마 추억이라는 이름에 맞물려 그렇게 표현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유쾌하고 달달한 반란 같았다. 그만큼 가독성도 좋았기 때문에 보는 내내 큭큭거리는 웃음을 유발한다. 글을 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사진을 보니 지긋한 나이인데도 얼굴에 장난 끼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 50년대 미국의 생활상이 참 이상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물론 세세히 따지면 문제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작가의 유년시절을 통해, 그가 이만큼 장난꾸러기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평안한 삶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좋은 기억을 가지는 유년시절을 보내길 바라보며, 재밌는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