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과 책 표지를 보고는 어릴 적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기발하면서도 황당하게 느껴지는 내용도 많아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은이가 남성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봤는데, 의외로 여성이었다. 스페인 출신의 쿠카 카날스. 이름만 들어서는 생소하게 느껴졌다. 내가 모르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이력을 읽으면서 책이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비가스 루나 감독이 연출한 “하몽 하몽”, “달과 꼭지” 등에서 각본을 담당했다고 한다. 영화 “하몽 하몽”과 “달과 꼭지”를 보면서 스토리가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위 영화의 각본을 모두 쿠카 카날스가 맡았다고 하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스페인 특유의 열정적인 사랑과 환상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사랑이야기는 영화라는 매체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당시 이들 영화는 기존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 마을에 사는 열여섯 키다리 소녀 베르타는 키가 너무 커서 고민이다. 그런데 그런 베르타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그 사랑은 바로 원수지간으로 지내는 이웃 폰사 마을의 키다리 우체부 요나다. 원수지간인 마을의 키다리 청녀총각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순애보적인 이야기보다는 다소 엽기적인 스토리로 진행된다.

사랑의 열병에 거린 베르타로 인해 마을에는 비 한 방울 뿌리지 않는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베르타가 사랑의 슬픔으로 괴로워하면 엄청난 홍수가 일어나고. 젊은 시절 사랑을 하면서 겪었을 법한 홍역을 그대로 글로 옮긴 쿠카 카날스의 재기발랄함이 잘 묻어나온다. 이런 독특한 설정은 영화적 상상력과 아주 잘 어울리는 궁합이 아닐까. 그래서 그녀의 작품이 영화로 많이 옮겨졌나보다. 이 책의 내용도 영화로 한 번 찍어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비가스 루나가 다시 한 번 메가폰을 잡는다면 멋진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기존의 소설에 익숙한 나로서는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아주 당혹스러웠다. 논리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면과 동떨어진 글쓰기는 온갖 은유와 재기로 넘쳐난다. 장난꾸러기 에로스가 날린 화살에 맞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책장을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서서히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책의 내용을 머리 속으로 그렸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스페인 작가 특유의 힘이 넘치는 글이다.

원래 이 책은 1996년도에 출간된 것으로 그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주로 영화의 대본을 쓰다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접하고는 비가스 루나의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갑자기 날씨가 엄청 추워졌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동남아의 어느 휴양지에 있는 느낌이었다. 모처럼 유쾌하고 재미있는 책을 읽은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해하지 않고는 서구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학서,인문서, 예술서, 철학서 등을 읽다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가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더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많은 책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인용되거나 차용되고 있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나 미술, 무용, 음악 등 많은 예술 장르에서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소재가 되어 있다. 그래서 서구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다. 앙드레 지드는 “어떤 장르의 글을 쓰든지 중요한 모티브를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찾았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무슨 이유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서구 문화에 그토록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이는그리스 로마 신화가 신(神)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정작 신들이 보여주는 행동이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들과 다름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심을 부리고, 복수하고, 절망하고. 복잡다단한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토록 오랜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많은 예술 장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동양 문화권에 사는 나로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한두 사람이 아닐뿐 만 아니라, 신들의 관계가 서로 얽혀 있어서 그 계보를 파악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다. 읽을때는 재미가 있다고 느껴지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머리 속은 조각난 수많은 퍼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게 된다. 하나의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책마다 각자의 해석과 이야기가 덧붙여져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와 같은 나의 갈증을 해소해주기에 충분했다. 일단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리스 로마 신화의 방대한 이야기를 최대한도로 줄이고 인물 위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먼저 서(序)장에서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정리되었고,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그리스 3대 비극시인에 의해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로마제국으로 전승된 내용 등이 소개되어 있다.

카오스에서 스스로 생명을 얻은 최초의 신들이 생겨나고, 제우스가 티탄 신족, 티폰, 기간테스를 물리치고 세상을 지배하는, 제1장 ‘천지만물의 시작과 신들의 전쟁’에서, 나르키소스와 에코, 에오스와 셀레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등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제14장 ‘불가사의한 사랑 이야기’ 까지, 지은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 위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책은 신화만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있다. 신화가 소재가 된 유명한 작가들의 그림, 조각, 건축 등을 소개하여 평면적인 신들을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이미지로 다가오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신들의 관계도, 올림포스 12신에 대한 상징, 신들의 이름에 담긴 상징, 단어의 어원 등을 정리하여 두고 있으며, 각장의 마지막에는 유럽 폴리스의 발달과 헬레네스, 그리스 신화를 통해 본 고대 그리스 인의 세계관, 그리스 신화를 되살린 이탈리아 르네상스 등 역사적인 의미도 되집어 보고 있다. 부록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과 영웅들의 이름 비교하기, 그리스 신화의 연대별 주요 사건과 관련 문학, 신들과 영웅들의 계보를 실어두고 있다. 한마디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사전(辭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등장하는 책이나 그림, 영화 등을 볼 때마다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등장하는 신화가 그 많은 그리스 로마 신화 중 어디쯤 등장하는 이야기인지, 그리고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몰라서 헤맨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소재가 된 내용이 나오면 이 책을 참조하면 될 것 같다. 간략하지만 그나마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신화를 이해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물론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을 담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 한 권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이 정도로 더 친절한 책은 없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