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일본 주부들이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한류 열풍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내심 기분이 안 좋았다. 어떻게 한 나라의 드라마를 좋아한다고 해서 늦은 나이의 아줌마들이 그 나라의 말을 배우겠다고 생각하는건지. 그들의 모습에 우리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그저 우리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우리는 일본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아예 일본을 깔보는 경향도 있다. 그렇게 일본을 안 좋게 보면서도 정작 일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게 없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일본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국민들도 잘 없을 것이다. 아니, 아마 없을 거다. 일제강점기라는 과거사로 인해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맹목적이리만큼 감정적이다. 제대로 된 과거 반성도 없이 오히려 안하무인격으로 자신들에게 무슨 책임이 있느냐, 라는 식으로 주장하며 독도까지 자기네들 땅이라고 우겨대니 그와 같은 감정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54년 만에 정권이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었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라는 고사성어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지은이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들여다보는 잣대로 오타쿠를 선택했다. 오타쿠는 일본에서 형성된 독특한 문화현상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지은이는 일본 사회의 문화적인 현상을 섬나라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에서 찾고 있는 듯 하다.

 

“섬은 애당초 평화롭지만 단조로우며, 안정적이지만 거꾸로 쉽게 배척당할 수도 있는 지정학적 특성을 지닌다. 또한 갇힌 공간이라는 점 때문에 내부에서 눈치껏 조화를 이루며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어도 한 번 낙인찍히면 발붙이기 어려운 공간으로 둔갑한다. 그래서 싫어도 좋은 척, 미워도 안 그런 척할 필요가 있다(책 61쪽 참조).”

 

위와 같은 특성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매뉴얼에 강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원칙주의자이고, 그 안에서 인내와 질서의식이 배태되어 나오며,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과 자료보관과 수집 및 기록 습관이 몸에 배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직설 화법보다 간접적인 화법에 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오타쿠가 일본에서 파생되기에 매우 자연스럽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오타쿠의 모습은 주로 만화, 애니메이션, 아이돌, 게임, 컴퓨터에 대한 광적인 마니아로서, 사생활을 대부분 취미에 할애하며, 딱히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 채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즉, 조화를 위해 개인의 감정 발산을 무례라고 어색하게 여기는 주변 환경이 개인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몰아가는 데 한몫했다는 것이다. 오타쿠가 집을 의미하는 한자 ‘택(宅)’을 사용하는 것처럼 고립된 섬을 의미하는 자신만의 집에 같히지만 굳이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 채 그 안에서 만족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책 70쪽 참조)

 

위와 같은 견해에 대해 다른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물론 같은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오타쿠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문할 수 있지만, 영국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많이 있었던 데에 반해, 일본은 외부 자극이 거의 없었고, 2차 대전에서 패망한 후에도 미국의 보호아래 경제발전에만 몰두한 관계로 내부로 향하는 습성이 강해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토양이 되었다. 이런 경향이 오타쿠라는 특이한 문화현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한다.

80-90년대 일본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든 여아 연쇄살인범 미야자키 츠토무와 2008년 6월 8일 대낮 아키하바라에서 카토 토모히로에 의해 발생한 살인 사건은 광적인 수집가로 인식되던 오타쿠가 한 순간에 사회적인 소외 계층, 즉 사회 부적응자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오타쿠라는 의미가 지금까지도 안좋은 쪽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오타쿠는 지금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최근 현대형 오타쿠로 ‘초식남(草食男)’이 등장하고, ‘긍정형 오타쿠’가 발생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긍정형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스스로 노력하고 주위의 많은 이에게 플러스적 이미지로 어필하는 장점을 갖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오타쿠의 변화는 어떤 면에서는 앞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동아시아에서 살아가려면 이때까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다른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본다.

 

일본 문화와 사회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책들이 소개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처럼 오타쿠와 같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일본 사회를 해부한 책은 드물다. 외국에서도 오타쿠 행사가 열릴 정도로 오타쿠 문화가 사회 저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 시점에서 오타쿠를 통한 일본 들여다보기는 의미있는 작업이 되었던 것 같다. 풍부한 사진과 간결한 문체, 그리고 읽기 쉬운 내용은 일본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오타쿠, 일본, 섬나라

얼마 전 대학교수들이 ‘인문학의 위기’라며 대중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호소한 적이 있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졌다. 자기계발서나 처세서, 학습서와 같은 실용서들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차지한 지가 오래됐다. 인문학은 점점 대중과 멀어지는 듯 했다.

 

당시 개인적으로 ‘희망의 인문학’(얼 쇼리스 저,이매진) 이라는 책을 상당히 감명깊게 읽고 있었던 때라, 우리 인문학이 절벽 끝에 와있다는 대학교수들의 자조섞인 탄식이 어떤 면에서는 단순한 불평처럼 들리기도 했다. 얼 쇼리스는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서 빈민들에게 인문학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당장의 의식주가 절실한데도 불구하고 얼 쇼리스가 인문학을 부르짖은 것은 당장의 경제적인 보탬이 순간적인 어려움은 헤쳐 나갈 수 있어도 의식이 전환이 없이는 영원히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며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사회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모습은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얼 쇼리스와 같이 인문학자들이 직접 발로 뛰며 새로운 인문학의 발전을 모색하고 있어 반갑다. 인문학에 대한 부활 조짐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 교육, 지역 주민센터나 지역 문화회관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 온라인 상으로 이루어지는 인문학 강의 등 여태까지 책으로만 접했고, 대학교가 아니면 인문학 강의를 들을 수 없었는데, 인문학이 색다른 방법으로 대중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인문학과 대중들과 소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밥벌이도 어려운데 돈도 안되는 무슨 인문학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인간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가장 근본적이고도 본질적인 자신의 실재에 대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한 경제적 만족은 공허할 따름이다.

 

이 책은 한국정책방송 KTV에서 ‘인문학 열정’이라는 프로그램에서 3년 가까운 기간에 70편이 넘게 방영되었던 내용을 1차 분으로 정리한 것이다. 김경동, 김기현, 최재천, 김광웅, 문용린, 정진홍, 황경식, 고미숙, 김효은, 장회익, 차윤정, 도정일, 박정자, 김영한 등 우리 사회에서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대표학자들이 김갑수 교수의 진행으로 좌담 형식으로 자신들의 열정을 들려주고 있다.

 

출연한 학자들의 학문 분야가 서로 달라서 다루어진 주제도 다양하다. 21세기 들어서 더욱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는 통섭, 대학민국에서 이상 열풍을 보이고 있는 교육, 종교문화, 경제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환경, 그리고 사랑, 윤리, 뇌 등 우리가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음직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 책에 푸욱 빠져들게 만든다.

 

각자의 학문 분야에서 최고의 학자들인지라 깊이있는 대화가 오고간다. 한 권의 책에 여러 주제를 담고 있어 자칫 수박 겉핥기 식의 내용이 아닐까, 하는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구어체 형식이어서 이해하기도 편하고 무엇보다 진행자인 김갑수 교수가 적절한 예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정리하고 질문하는 식의 탁월한 진행은 자칫 어렵게만 들릴 내용을 편안하게 와닿도록 해주었다.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포스트 잇 모양의 라벨을 붙여서 같이 읽어 볼 수 있도록 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본문을 보충하는 풍부한 각주와 사진 등은 한국정책방송 KTV에서 방영되었던 내용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편집이어서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태까지 일선에서 발로 뛰는 인문학자들의 책임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일단 지금까지는 책이 아니면 인문학이 대중들과 만날 기회도 잘 없었고, 내용도 너무 어려웠다.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우면 대중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정책방송 KTV에서 방영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앞으로 인문학이 어떤 식으로 대중들과 만나고 소통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책에 이어서 ‘동서양 철학 콘서트’, ‘역사 콘서트’, ‘한국학 콘서트’ 등으로 계속 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떤 책들이 출간될지 기대가 된다. 이 책을 통해 인문학이 다시 부흥하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인문학의위기, 한국정책방송KTV, 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