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서평] 똑같은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살고 있을 뿐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한국인들에게 지난 9월 19일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체결한 ‘평양 선언’의 내용보다 충격적(?)이고 아리송했던 장면이 많았지만, 그 중에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남북 정상의 카퍼레이드 중에 보이는 평양 시내의 모습이었다.

평양 도심은 (지상파 방송에서 과거에 보여주던 개발도상국 같은 모습이 아니라) 21세기 여느 선진국의 도시 못지 않게 깔끔하고 세련되었으며, 첨단 고층빌딩과 주거단지가 평양 시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와 공원과 강가에서 보이는 평양 시민들은 서울시민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의 대북 제재가 시행된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고 국내 언론과 서구 언론은 모두가 대북 제재 때문에(그리고 북한 당국이 민생보다는 군사력에 재정을 투입하기 때문에) 북한이 여전히 낙후되고 못 산다고 보도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이나 서구인들이 “북한의 체제와 저력을 전혀 모른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최근까지 국내 종편에 나오는 북한이탈민들이 한결 같이 말하는 것이 있다. “북한 주민들은 일부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전부 굶어죽거나 죽기 일보직전이다.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 고기를 먹는다.”라는 식이다. 방송사도 출연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거짓말을 반복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거의 대다수가 2018년 9월이 되어서야 알았던(보았던) 평양과 북한 여러 곳의 변화된 모습 또는 이미 한층 발전된 모습을 2017년부터 이미 알아버린 한국인이 있다.

바로 진천규 기자다.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 저자 진천규는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기자로 입사해 판문점에 출입하며 북한 취재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지금까지 여섯 차례의 방북 취재 과정에서 남북관계의 결정적인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특히 2000년 평양 정상회담 당시 6.15 공동선언 현장에서 단독으로 찍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잘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17년 뒤인 2017년 10월, 진천규는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방북 취재에 성공했다.
북한과 미국이 ‘핵무력 건설’,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로켓맨(rocketman)’, ‘미치광이 늙다리(dotard)’, ‘완전 파괴’ 등의 말 폭탄을 주고받으며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저자는 방북 길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2018년 7월 현재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평양, 원산, 마식령스키장, 묘향산, 남포, 서해갑문 등을 취재했다.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는 그 취재 내용을 담은 책으로, 지난 10여 년간 베일에 감춰져 있던 평양의 변화상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 책에는 한창 추수 중인 평안도의 농촌 풍경부터 73층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평양 려명거리의 화려한 야경까지 급속한 변화가 진행 중인 ‘평양의 현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는 17년 만에 다시 찾은 평양의 첫인상을 ‘놀라움’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한다.

전쟁 준비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동원되었을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게 차분하면서도 활발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저자가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여러 매체에 방송되면서 알려졌듯이, 평양 거리에서 휴대폰을 들고 통화하거나 사진을 찍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고, 학교와 도서관 등에서는 IT 기기와 프로그램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도로에 차량의 수가 많이 늘어났는데, 특히 택시의 수가 눈에 띄게 많다.

평양 시내에만 6,000대 이상의 택시가 운행 중이고, 택시 회사도 5～6개가 된다고 한다.

옥류관 앞에는 항상 10여 대의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외국인이나 고위 간부들만 택시를 탈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일반 시민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한다. 이런 풍경은 저자가 최근에 사진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다.

그가 “택시는 주로 누가 이용하나요?”라며 운전원에게 물으니 “지하철이나 버스 정류장이 없는 뒷골목까지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합니다.”라며 허무할 정도로 당연한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가 버스나 지하철보다 비싼 비용을 치르고 택시를 타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여러 번 갈아타지 않고 목적지까지 빨리 갈 수 있는 편리함. 평양에서도 특수한 신분의 당 간부들만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하려는 사람들이 택시를 이용하고 있었다. 특히 북녘에는 개인 소유의 자동차가 없으니 대중교통 중에서도 택시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148～149쪽)

일반 독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은 [5부. 맛과 먹방의 세계는 남북이 따로 없다_냉면에서 피자까지]이다. 옥류관의 냉면과 ‘이딸리아료리전문식당’의 피자와 스파게티를 동시에 즐기고, 퇴근 후에 맥주집에서 대동강맥주를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마트와 백화점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소비하는 평양 시민들의 다채로운 모습이 책 속에 담겨 있다.

특히 지금까지 언론에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옥류관·청류관의 주방 모습과 옥류관 지배인에게 직접 들은 평양냉면의 비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옥류관에서는 하루에 만 그릇(일만기, 一萬器)의 냉면이 나가고, 술과 함께 면을 즐기면 더 맛있기에 술을 먼저 권한다는 선주후면(先酒後麵) 등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또 저자는 평양에서 콩나물무침, 두부, 계란 프라이를 먹고 50년 전 어린 시절에 먹었던 맛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유전자를 변형한 GMO 콩을 사용하고 닭을 대량 집단 사육하는 우리의 시스템에서는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재료 본연의 맛이라고 평한다.

“고기쟁반국수를 시키면 ‘평양주’라는 술 한 잔이 함께 나온다. 양은 우리 식으로 소주 세 잔 정도이다. 술을 먼저 한 모금 마시고 국수를 즐기는데, 이를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고 한다. 즐겁게 한잔하면서 먹어야 국수가 맛있다고 한다. 점심식사에 누구에게나 술(소주)을 먼저 마시도록 내놓다니 놀라웠다. 물론 술은 원하지 않으면 마시지 않아도 된다. 냉면 사리는 원하면 추가로 가져다준다.”(179쪽)

2017년 완공된 려명거리의 초고층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의 집을 방문해 집안 모습과 가족들의 생활상을 취재한 내용도 눈에 띈다.

저자가 방문한 집에는 대개 침대, 가스레인지, 냉장고, 전기밥솥 등이 갖춰져 있어 우리 가정집과 비슷한 생활양식을 누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하고 찾아갔지만 일부러 없던 물건을 갖다 놓거나 화려하게 꾸며놓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고, 외부인이 방문한다고 하니 깨끗하게 청소하고 나름대로 정리정돈을 해놓은 정도로 보였다고 한다. 외지인에게 려명거리 살림집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최초라고 한다.

려명거리에 있는 아파트의 한 달 주택 사용료는 240원으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2,700원 정도이다. 거의 무료라고 할 정도로 저렴한 비용이다. 고층 아파트여서인지 엘리베이터 관리자가 따로 있다.

그런데 이 아파트들은 재개발 이전에 살던 사람들, 즉 철거민들과 상이군인들 그리고 려명거리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1순위로 입주자격을 준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책이자 문화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남과 북은 수십 년 동안 다른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온 셈이다.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대개 아파트 평수이다. 아파트를 단순한 주거의 개념보다는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평수에 대한 개념이 없다. 평양에서는 집의 크기를 평수가 아니라 방의 개수로 계산한다고 한다. 방 2개짜리 집, 3개짜리 집, 4개짜리 집 등으로 집의 크기를 짐작하는 것이다. … 방의 개수는 집주인의 권력관계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양가족의 숫자로 결정한다고 한다.”(258쪽)

2018년 4·27 판문점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과 남의 시간부터 먼저 통일하자”고 했고, 이에 따라 30분 차이가 나던 평양의 시간이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르게 되었다. 이것이 가장 빨리, 손쉽게 할 수 있는 정치적 통일이라면 문화적 통일, 물리적 통일은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남북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1988년 [한겨레신문] 기자로 판문점을 출입할 때부터 평양 상주 특파원을 꿈꾸었던 것도, 2017년 북미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던 당시 방북 취재를 결심하고 추진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들은 그 의도를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내가 방북 취재를 할 당시는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화산보다 뜨겁게 끓는 상태였다. 폭발을 목전에 두고 연기를 내뿜는 화산처럼 변해가는 한반도에서 기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북쪽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44쪽)

어린 시절에 받은 반공 교육이 어찌나 철저했던지, 기자인 저자 역시 북한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무심코 내 생각과 말을 스스로 검열하곤 했다. 그 사실이 큰 충격이었고, 이때부터 그는 평양 상주 특파원이 되겠다는 꿈을 갖기 시작했다.

누군가에 의해 한정된 정보 혹은 왜곡된 정보만 주입받아온 결과가 무섭고 끔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그것을 깨뜨리고, 많은 사람들이 북녘을 있는 그대로 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이번 방북 취재 기간 동안 평양 시민들 사이에 섞여서 자유롭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취재했고, 촬영한 사진과 영상은 어떠한 검열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모란봉 공원에서 만난 시민들과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은 에피소드, 자신들의 사진을 삭제해달라고 요구하는 당돌한 여학생들에게 곤혹을 치른 일화 등은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이기에 가능했던 것들이다.

저자는 남과 북의 사람 사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실제로 남과 북은 수천 년간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70여 년간 멀어지기만 했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먼저 이렇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우리의 닫혔던 마음을 열고, 열었던 심장을 녹이는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그동안 세상에 공개된 북녘에 관한 책과 사진은 대개 외국 기자가 취재한 것이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나는 그런 한계를 깨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그들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감정과 생각까지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취재에 임했다. 서로 말이 통하는 만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촬영했다. 눈인사와 농담을 주고받고, 때로는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며 그들 속에서 함께했고, 그 모습을 이 책에 담아냈다.”(8쪽)

저자는 평양 중구역 대동강 옆에 위치한 평양호텔 5층 방에서 이 책의 원고를 썼다. 에필로그를 서울에 있는 출판사로 보내면 그동안 진행해오던 책이 마감되는 때였다.

그런데 이 책은 평양에서 서울에 있는 출판사와 이메일로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마무리했다. 그 순간 그는 “평양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함께 흐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저자의 목표는 오직 하나,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출발점에 ‘문화적 통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남과 북이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교류하며 동질성을 회복해가는 플랫폼 역할을 할 케이블방송사 ‘통일TV’를 준비하고 있다.

 

[2018년 10월 07일]

 

 

진천규, 평양의시간은서울의시간과함께흐른다, 북한, 김정은, 여명거리

[서평] 전체주의란 생각하지 않고 행위하지 않는 사회의 필연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한나 아렌트 저, 이진우/태정호 역, 1996년, 한길사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은 이제까지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으며, 인간의 본질마저도 파괴될 수 있다는 것만을 증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통해 총체적 지배는 근본악(惡)이 실제로 존재하며, 이 악은 인간들이 벌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이제 처벌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근본악이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근본악은 결코 이해될 수도 없으며 또 자기 이익, 탐욕, 시기심, 권력욕, 원한, 비겁함 또는 그밖에 있을 수 있는 악한 동기들에 의해 설명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인간의 모든 반응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어떤 분노도 이를 복수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이를 견뎌낼 수 없으며, 어떤 우애도 이를 용서할 수 없으며, 어떤 법도 이를 처벌할 수 없다.”(23~24쪽, <전체주의의 기원> 1951 재인용)

위 글은 한나 아렌트의 철학적 사유와 정치적 행위의 동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주제, 또는 그녀가 궁극적으로 사유하고자 하였던 핵심 주제라 할 수 있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으로서 ‘전체주의’라는 근대적 근본악을 온몸으로 경험하였고, 그 결과 철학자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조건을 철저하게 사유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바로 ‘전체주의’로 특징지어지는 20세기를 사유와 행위로 살았던 사상가이기 때문에, 그녀의 사상은 동시에 “21세기의 문턱에까지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인간의 조건>은 한나 아렌트의 사상적 사유를 담은 책이기에 철학적 의미가 담긴 단어와 개념들이 가득하다. 따라서 보통의 독자가 한두 번 읽어서 그녀의 철학적 사유의 흐름을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필자도 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문장이 어려운 이유에 번역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서평은 <인간의 조건>의 주요 내용을 요약, 발췌하여 소개하면서 중간에 필자의 소감과 평을 포함시켰다.

 

유태인인 한나 아렌트는 1906년 10월 14일 칸트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인 아버지 파울(Paul) 아렌트와 어머니 마르타(Martha) 아렌트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당시 아렌트 가족은 독일 하노버 근처의 린덴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직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다시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가 아버지가 40세의 나이로 1913년 10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렌트가 어렸을 때 집에서는 한 번도 '유태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길거리에서 다른 어린이들한테서 반유태인적 욕설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그녀에게는 비록 독일 국적을 갖고 있지만 독일 민족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의식이 생겨난다. 이러한 의식은 “사람은 머리를 숙여서는 안된다. 사람은 저항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신념에 의해 강화된다. 만약 선생님이 반유태인 발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어머니는 딸에게 지시하였다."

그 이후,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이라는 존재, 즉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 타자’라는 상황을 항상 의식하며 성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독립적이고 고집이 셌다고 한다.

 

유태인으로서 그녀의 성장과정은 그녀가 학창시절에 ‘타자’나 ‘소외’, ‘차별’이나 ‘전체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깊게 파고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미 학창 시절에 문학과 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 덕택에 학우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선생과의 충돌로 수업거부를 주도하였기 때문에 퇴학당하게 된다.

아렌트는 그후 베를린 대학에서 2학기 동안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을 배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명성에 끌려 1924년 가을부터 마르부르크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아렌트는 그외에도 하이데거의 친구인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강의도 듣지만, 그녀의 철학적 관심은 주로 <존재와 시간>을 준비하고 있었던 하이데거의 강의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한나 아렌트는 192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사랑의 개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녀는 이 시기에 또한 낭만주의 시대의 유태인 라헬 바른하겐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아렌트가 유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사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렌트의 학창시절 공부에 영향을 준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중세철학과 낭만주의 그리고 하이데거 등 근대철학은, 그녀가 사회철학보다 개인철학과 분석철학으로 방향을 잡도록 길을 안내했을 것이다.

‘전체주의’를 극복하는 철학적 대안이 결국 ‘(개인의) 사유와 행위’로 귀결되는 그녀의 사유가 이를 대변한다.

 

아렌트는 유태인이라는 자신의 출생이 정치적 문제가 되었을 때 사유뿐만 아니라 행위로써 이에 대응한다. 그녀는 1933년 파리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시온주의자들과 활동을 한다. 1941년에는 결국 뉴욕에 오게 된다.

그녀는 뉴욕에서도 유태인을 위한 활동을 계속한다. 1946년에서 1948년까지 뉴욕의 한 출판사의 책임편집자로 활동하며, 그후 1963년 시카고 대학 교수가 될때까지 자유집필가로서 <전체주의의 기원2>(1951), <인간의조건>(1958) 외에도 <과거와 미래 사이>(1961), <혁명에 관하여>(1963) 등의 많은 글들을 발표한다.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 한나 아렌트에 대해 필자가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녀의 정치적 행보 때문이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아렌트는 선민주의와 배타주의의 상징인 시온주의자들과 정치적 행보를 함으로써, 나중에 팔레스타인들을 추방, 학살, 탄압하는 서구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행동에 기여하게 된다.

1948년 전쟁과 추방으로 얼룩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 국가들과 민중들에게 가한 수많은 악행은 아렌트의 철학적 사유나 전체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다.

 

1960년 5월 24일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 잡혀 이스라엘로 압송되었을 때,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NewYorker)라는 잡지에 이 재판과정을 특파원으로서 추적하겠다고 제안한다.

이 재판과정에 관한 아렌트의 견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서로 출판되는 데, 아렌트는 이곳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지성계의 물의를 빚게 된다.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결코 그의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때부터 이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유태인으로서 그녀에게 던져진 철학적 화두는 “어떻게 근본악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였다.

1928년의 학위논문인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사랑의 개념’에서 시작하여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을 거쳐 <정신의 삶>에 이르는 아렌트의 철학적 여정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시도였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조건>을 거쳐 그녀의 유고작 <정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실마리가 되었던 근본악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두 삼중적 구조를 갖고 있는 <인간의 조건>과 <정신의 삶>이 한나 아렌트의 주저라고 한다면, <전체주의의 기원>은 이 두 저서를 연결시켜주고 있는 사상적 동기라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적 지배의 본질은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완전히 박탈하고 또 인간의 무용성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을 완전히 배제하고자 하는 태도”에 있다.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본래 목표는 결코 인간 실존의 외면적 조건을 개혁하는 데 있지도 않으며 또 사회적 질서를 혁명적으로 변혁시키는 데 있지도 않다. 전체주의는 근대 이래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과정에 부응하여 인간적 본성 자체를 변형시키고자 한다”고 아렌트는 진단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전체주의적 과정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필요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모던적 태도”를 의미한다. “급속한 인구팽창 지속적인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이에 따른 고향 상실의 증대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에 대중들은 실제로 공리주의적 범주의 의미에서 보면 남아돌아가 쓸모없게” 된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근본악은 이와 같이 “인간을 쓸모 없게 만들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체계 속에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자신의 기술적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그 자체 이미 전체주의적 요인을 함축하고 있다.

“유태인을 과학적으로 말살하고자 하였던 나치정권은 바로 이와 같은 전체주의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근본악의 성격과 동인을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파헤쳤다면, 인간의 조건에서는 기술시대의 근본악을 철저하게 분석함으로써 활동적 삶의 가능성을 탐측하고 있다.

 

유대인으로써 겪을 수밖에 없었던 근본약의 경험은 한나 아렌트로 하여금 인간과 지구의 유한성을 토대로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관점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최초의 철학적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은 라틴어 개념 Condition humana의 번역용어로서 “이미 인간존재가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렌트 자신이 이 저서를 Amor Mundi(世界愛, love of the world)로 불러주기를 바랐듯이, <인간의 조건>은 세계에 관해 단순히 관조하고 성찰하는 형이상학적 전통을 넘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실천철학적 방향을 제시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조건들, 인간적 활동들,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이 실행되는 장소에 관해 다루고 있다.

인간실존의 조건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전제조건들이다. 예컨대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어야 하며, 둘째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영속적인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며, 셋째,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생명, 세계성, 다원성”을 ‘인간실존의 세 조건’이라고 명명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 조건들에 각각 고유한 활동의 양식을 부여한다.

생명으로서 산다는 것은 신진대사를 통한 자연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까닭에 ‘노동’은 생명의 조건에 부합하는 인간의 기초적 활동이다. 따라서 노동의 동물로서 인간은 자연의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

다음으로 인간에게 비교적 영속적인 세계를 제공하는 활동은 바로 ‘작업’이다. 인공세계를 구성하는 사용물을 생산하는 작업은 따라서 수단과 목적의 범주, 즉 도구성의 지배를 받는다. 예컨대 책상의 제작이 목수 작업의 목표이듯이, 생산과정은 최종 생산물을 산출함으로써 끝이 난다. 이때 생산과정은 목적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창조하는 인공세계의 목적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의미있는 공동의 세계에 관해 논의하는 기초적 활동을 ‘행위’라고 규정한다. 행위는 노동의 필연성과, 작업의 도구성 어느 것도 절대화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도록 만드는 인간의 기초적 활동이다.

이렇게 노동의 활동은 생명의 조건에, 작업의 활동은 세계성의 조건에, 그리고 행위의 활동은 다원성의 조건에 부합한다.
 

아렌트의 ‘인간 조건’의 철학적 개념인 노동, 작업, 행위의 구분은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 특히 인간의 ‘노동’을 ‘자연과의 교통’에 국한시키며 ‘생명의 조건에 부합하는 인간의 기초적 활동’이라는 개념 규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필자는 인간 즉, 인류의 탄생 자체가 사회적 공동체적 과정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은 ‘개인적’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집단적’ 노동이며, 따라서 아렌트가 제시하는 ‘작업’이나 ‘행위’ 개념은 인간의 ‘사회적 노동’이 전제(포함)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세 가지 조건’들이 더욱 근본적인 조건들에게로 환원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탄생성과 사멸성의 조건이다.

생명, 세계성, 다원성이 인간의 기초적 활동에 부합하는 인간실존의 ‘조건’들이라고 한다면, 탄생성과 사멸성은 이들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선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인간이 필연성에 의해 지배받는 생명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생존을 위해 노동을 할 필요도 없으며 또 죽지 않아도 된다면 굳이 영속적인 인공세계를 건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탄생성과 사멸성은 우리가 이 유한한 지구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추론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지구를 가장 핵심적인 인간조건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세 가지 인간조건들을 탄생성과 사멸성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노동, 작업, 행위의 활동들과 이에 부합하는 실존조건들은 우리가 우리의 거주공간인 지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에만 독자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체주의는 -그것이 정치적이든 아니면 기술적이든 간에- 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영구화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수단만을 영구화할 뿐이다.

목적이 없으면 시작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인간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창조라는 새로운 시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은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시간과 세계 속으로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시작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된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욕망의 존재가 되었다면, 인간이 기억하는 하나의 의식적 존재로 규정된 결정적 사실은 우리가 탄생을 통해 이 세계에 들어섰다는 탄생성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사의 영역인 세계를 자연적, 황폐화로부터 구원하는 기적은 다름 아닌 탄생성"이라고 단언하면서, “인간의 행위능력은 존재론적으로 이 탄생성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노동이 절대화된 현대사회의 생산과정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에게 유의미한 새로운 세계를 시작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일단 노동이 인간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라 다른 여러 활동양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탄생성의 회복은 인간조건에 대한 성찰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서론에서 “우리가 최근에 겪었던 경험과 공포를 고려하여 인간의 조건을 다시 사유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녀는 학위논문을 통해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통의 공포를 나누어 갖고 있으며, 이 공포에 관한 공통의 지식을 통해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나치의 전체주의를 겪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에게 공동체의 의식을 일깨워줄 공동의 공포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단언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행하는가를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Vita contemplativa)을 제외하고 오직 인간의 신체적 활동들(Vita activa)을 노동, 작업, 행위로 범주화하여 해명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철학적 인간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활동을 분석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정치적 행위능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신적 차원에서의 ‘사유하지 않음'과 실천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행위능력의 상실’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진단한다.

아렌트는 고대의 폴리스를 정치적 행위능력이 가장 잘 전개된 사회로 설정하면서, 근대 기술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활동적 삶 내에서 이루어진 위계질서의 전도를 설명한다.

 

예컨대 고대에서는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해 오직 노예들의 일로만 여겨졌던 노동이 근대에 들어와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고대의 폴리스에서 노동은 단지 생존에만 기여하는 까닭에 자유 시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었다면, 오늘날 노동은 모든 시민의 보편적 활동으로 부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폴리스 내에서 사적 영역에 속해 있던 ‘경제’는 근대에 들어와 ‘공적인 것’이 되었으며, 이제 경제는 거꾸로 정치를 지배하여 자유로운 시민들의 자치로 이해되었던 정치적 행위는 자율성을 상실하게 된다.

 

활동적 삶의 둘째 범주인 ‘작업’이 본래 갖고 있는 의미 역시 근대의 노동사회에서 퇴색한다.

작업은 본래 대상을 만들고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근대의 노동사회에서 작업은 더이상 생산품의 지속성, 즉 사용가치에 의해서 보다는 부단한 유통과정에서 생산되는 소비가치에 의해서 규정된다. 세계를 구성하는 작업은 이제 삶의 보존과 삶의 향락을 지향하는 노동의 차원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사회가 비록 노동사회로 정의된다고 할지라도, 이 사회는 동시에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탈출을 추구한다. 과학과 기술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사회적 발전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의 활동은 종종 돈을 벌기 위한 활동으로만 이해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오직 자유시간에 쓸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하여 노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의 폴리스에서 여가와 자유시간(Skhole)은 자유로운 시민들이 공론 영역에서 다른 시민들과 공동의 관심사에 관해 논의할 수 있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면, 사적 삶의 향유로 이해되는 현대의 여가와 자유시간은 모든 활동의 목표가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체적 노동이 부담과 고통으로 여겨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여기서 활동적 삶과 관련하여 두 가지 심각한 물음이 제기된다.

우리는 과연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동시에 그것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였던 다른 활동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은 아닌가?

 

고대의 폴리스에서 자유인들이 노동으로부터 필연성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은 그들이 공론 영역에서 정치적 행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근대의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그것이 실현되면 결국 인간에게서 모든 행위의 가능성들, 즉 활동적 삶 자체를 박탈할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인간을 노동의 고통과 노고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편의 수단의 끊임없는 생산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만약 생산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작업과 행위는 결국 모두 지속적 생산이라는 노동에 예속된다.

따라서 끊임없는 생산의 자동화 과정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두 가지 활동, 즉 작업과 행위를 노동의 차원으로 전락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아렌트의 분석은 우선 노동, 작업, 행위의 세 활동양식이 갖고 있는 독자적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된다.
 

만약 노동, 작업, 행위가 모두 인간실존에 필수적인 조건을 구성한다면, 우리는 결코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다. 노동은 인간이 자연의 다른 생명체와 유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인 까닭에, 노동의 포기는 곧 생명의 포기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에 의해 창조된 문화, 즉 인간이 스스로 산출한 도구, 기계, 작품들의 세계는 그 자체 인간실존의 조건이 된다. 자연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목적을 위해 유용하게 변형되고, 작업되고, 사용될 뿐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물론 자연과 문화, 자연과 세계를 구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노동과 작업의 결과들은 인간의 실존에 있어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필연적 전제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활동적이 되어야 하며 또 자유롭게, 즉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연의 과정에 간섭하여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술문명은 이제 자연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의 실존조건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과연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활동적 삶의 세 양식들이 아무리 독자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규범적 위계질서를 갖고 있어야 함을 간파할 수 있다.

 

노동의 절대화는 인간을 자연의 필연성에 완전히 예속시키며, 작업의 절대화는 인간에게서 자연적 성격, 즉 탄생성과 사멸성을 파괴함으로써 행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박탈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는 노동과 작업이 궁극적으로는 행위에 의해 통합되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행위 자체를 인간활동의 규범적 토대로 제시한다

우리가 삶의 편의를 증대시키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거처를 상실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사적 영역과 공론 영역의 경계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경계선의 소멸과 더불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의미 역시 변질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공적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공중 앞에 현상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까닭에 가장 폭넓은 공공성을 가진다”는 것이 공적인 것의 첫째 의미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하나의 현상으로 지각되는 것만이 현실성과 실재성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적인 것은 모든 사람에 의해 지각되는 현상들의 현실이다.

둘째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이라는 점에서 공적인 것은 '세계 자체’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장소’와 엄격하게 구별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해보면 공적인 것은 우리가 말과 행위를 통해 우리의 인격을 드러내는 구체적 행위의 공간과 장소로서의 ‘공론 영역'이다.

이 공론 영역은 물론 유기체적 인간이 움직일 수 있는 제한된 공간으로서의 지구와 자연과 직접 일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론 영역은 공동의 관심사에 관한 인간의 말과 행위를 통해 비로소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인 탄생성과 사멸성이 인간이 지구적 존재라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듯이, 공론 영역의 몰락은 바로 인간의 구체적 거주지인 지구의 파멸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글머리에서 서술하였던 근본악의 문제와 다시 부딪치게 된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 나치 정권이 전체주의의 정치적 실험이었다면, 과학적 전체주의는 이제 전세계와 지구를 도구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것을 실현하고 가능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게 만들려는 전체주의는 결국 인간의 본질마저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우지 않았는가? 과학과 기술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상의 존재인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만든 인공적 사물들로 대체하려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고유한 실존에 대한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현재 우리의 능력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지식을 이런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를 과연 원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는 과학적 수단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우선적인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결정을 전문과학자나 직업정치가에게 결코 맡길 자체의 실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책무이다.

만약 우리의 실존과 운명을 자연뿐만 아니라 기술의 자동적 과정에 내맡기지 않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제라도 인간조건과 행위의 가능성에 관해 진지하게 사유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전체주의가 생각 없는 모든 사람들의 산물이었듯이, 생각하지 않고 행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구와 인간의 멸망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기술적 전체주의에 동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근본악은 바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은 지구와 인간조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미래의 인간에 대한 경고이다.”(41쪽)

 

[2018년 9월 30일]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 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한나아렌트, 인간의조건, 전체주의, 유태인, 노동작업행위

[서평] 그녀의 생이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춘희 La Dame aux camélias(동백의여인)>

뒤마 파스 저, 양원달 역, 2004, 신원문화사

비극적인 사랑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 뒤마 피스의 자전적 소설이다. 작품의 발표 시기는 1848년이다. 실존했던 파리의 고급 매춘부 ‘마리 뒤플레’를 모델로 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뒤마는 스물 셋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마리가 죽자 큰 충격을 받고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남녀 주인공의 애틋하고 애달픈 사랑을 그린 뒤마의 대표작이자 연애 소설의 전형이기도 하다. 원제목 <La Dame aux camélias(1848)>는 '동백꽃을 들고 있는 부인' 또는  ‘동백의 여인’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이것이 일본에서 <椿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춘희’가 된 것이다.

<춘희>는 베르디에 의해 1852년 처음 가극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로 공연되면서 지금까지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올해 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본 후, <춘희>를 읽게 되었다.

파리 화류계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한 마르그리트(춘희)가 죽자, 채권자들이 순식간에 나타나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경매로 넘겨 버렸다. 제3자의 인물인 화자는, 우연히 마르그리트에 대한 헌사가 쓰여진 〈마농 레스코>를 손에 얻게 된다. 이 때문에 화자는 죽음도 앗아가지 못한  아르망과 마르그리트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를 접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랑을 전하게 된다.

아르망 뒤발이 처음 마르그리트 고티에를 만난 순간,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게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려 운명적 사랑에 빠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자신의 느낌과는 다르게 첫 만남부터 그녀에게 놀림을 당하는 바람에 그들은 2년 뒤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르망이 생각하기에,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몸을 파는 창녀라고는 하지만 어딘가 맑은 데가 있었다.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악습에 물들지 않은 고상한 아름다움이 깃든 여자였다. 침착한 걸음걸이, 가늘고 약한 몸매, 장밋빛 얼굴, 어렴풋이 푸르게 물든 커다란 눈. 그와 같은 것들의 성질을 소유한 마르그리트는 아무리 마개를 막아도 속의 향기를 발산한 향수병과 닮았다.

마르그리트 고티에가 ‘춘희’라는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동백꽃 외에 꽃을 가진 모습
을 누구 한 사람도 본 일이 없었다. 마르그리트는 연극 첫날에는 관람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일층의 전용 관람석 앞에는 쌍안경, 봉봉 그리고 동백꽃 다발이 항상 놓여 있었다. 한 달 중 이십오 일은 흰 동백꽃이고 나머지 닷새는 붉은 동백꽃이었다.

색이 바뀌는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 까닭에 꽃집 바르종 아주머니의 상점에서는 마침내 그녀에게 춘희라는 별명을 붙였으며, 그것이 어느 틈에 마르그리트의 별칭이 되어 버렸다.

마르그리트는 화려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늘 진실한 사랑을 소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예쁜 옷을 입고 허영을 부릴 때는 많은 남자들이 기꺼이 목숨이라도 받칠 것처럼 사랑하는 것지만, 자신이 병들고 초라해지면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았다.

그런데 아르망은 마르그리트 앞에 나타나지도 않으면서도 조용히 매일 같이 그녀의 병세를 묻고 가는 유일한 남자였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정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을 생각하고 나를 사랑해 준걸요.

피를 토하는 자신을 보고 유일하게 동정어린 눈빛으로 손을 잡아주고 울어 주셨던 단 한 남자.”

서로 사랑한다고 해서 보통 여자를 소유한 것처럼 마르그리트는 쉽게 자기 여자가 되어 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4만 프랑의 엄청난 빚이 있었고, 무일푼인 주제에 일 년에 십만 프랑을 쓰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르그리트를 다른 남자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사실이 아르망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고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오해는 서로를 지치게 만들었다. 사랑 하나만으로 해결될 줄 알았던 그들의 사랑도 마르그리트가 그에게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화류계 여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자체가 평범한 남자에겐 무리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이 사랑에 열중한 나머지 돈을 빌려 도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시골의 조용한 삶을 동경했던 마르그리트의 소원대로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지방 중 하나인 부지발에 정착을 하게 된다. 마르그리트 고티
에는 아르망을 사랑하면 할수록 화류계 여성의 티는 조금씩 사라지고 평범한 여자의 소박한 아내가 되고 싶었다.

낮에는 하염없이 이 아름다운 푸른 하늘과 초록 숲으로 꾸며진 거리를 거닐고, 밤에는 하얀 옷을 입고 연인의 팔에 안겨 반짝이는 별이 빛나는 밤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였다.

둘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사랑에 열중한 나머지 그 어떤 결과가 되는가 하는 따위는 걱정도 하지 않고 구름 한점 없는 청춘과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아르망의 소원대로 그녀는 온전히 단 하나의 사랑이 되었지만, 비싼 값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의 모든 생활을 책임졌던 공작도 떠나가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넘겨도 빚을 갚지 못할 형편이었기에 아르망 몰래 프루당스에게 부탁해 모든 물건을 전당포에 넘긴 상태였다.

그녀의 희생에 감탄한 아르망은 어머니가 남겨 주신 유일한 유산을 법적으로 사랑하는 여인 앞으로 넘기는 도중 아버지의 출현으로 모든 게 무산되고 만다.
 

마르그리트는 아르망에게 한마디 설명도 없이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며 떠나간다. 그리고 알수 없는 죽음까지 그 안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마르그리트는 아들을 적정하는 아버지의 눈빛과 하나밖에 없는 누이의 혼사를 막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착하고 평범한 가족의 품으로 아르망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 잘못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감지하는 순간, 마르그리트는 그리움에 목이 말라 병이 들어 아르망을 찾다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리 없는 아르망은 더욱 더 망가져 파산 지경에 이른다.

<춘희>는 전형적이고 통속적인 연애 소설이 필요한 스토리를 갖추고 있다. 불행한 젊은 여자와 순진한 젊은 남자, 진실한 여자와 서툰 남자, 몸이 아픈 여자와 가난한(?) 남자, 시대적 사회 편견에 의한 이별, 여자의 희생과 남자의 오해, 짧은 사랑과 이별, 여자의 죽음과 남자의 후회…

이 작품에 대해 “그래도 단 하나의 진실한 사랑을 할수 있었던 그녀의 생은 아름다웠다”는 독자평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필자는 감정이 메말랐기 때문인지 몰라도 공감하지 못한다. 아무튼, 작품의 그런 세속적인 특징으로 인해 오페라나 영화로 각색되어서도 관객들의 인기와 상품성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필자는 2018년에 <춘희>를 읽으면서 당시 유럽사회의 시대적 배경을 엿볼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지 반 세기가 지난 시기였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을 상징하는 프랑스 혁명(부르주아 혁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수많은 자산을 상속 받은 귀족들이 ‘아무런 노동 없이’ 이자와 임대료로 유흥을 일삼았고 ‘창부’를 돈으로 사는 사회였다. 당시 프랑스의 노동자와 농민은 장시간 가혹한 노동으로 피땀을 흘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뒤마 파스가 <춘희>를 발표한 시기인 1848년은,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해였다.

당시 마르크스와 노동운동가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유럽 국가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공감할 수 있는 모습들이 <춘희> 속에 나타나 있는 셈이다.

※ 첨부한 사진은 작품의 주인공 마르그리트의 실존 인물인 마리 뒤플레의 초상화

 

[2018년 9월 24일]

뒤마파스, 춘희, 마르크리트, 아르망, 공산당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