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라는 이름은 아마도 중학교 3학년 국사 교과서에서 처음 봤을 것이다.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들여온 인물로 배웠었다. 실학의 물고를 튼 계기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 나는 우리나라에서 실학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어떤 나라가 됐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고 생각한다. 역사란 승자에 의한 기록이기 때문이며 과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랬더라면’이라고 말해봐야 물릴 수 없는 것이 역사이다. 정치적으로 강한자가 살아남는 역사에서 도태된 인물이나 국가에는 그만한 나약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중학교 교과서에 겨우 서너줄 거론되는 소현세자라는 인물은 그 죽음에 많은 의문점을 담은 기록과 내용을 가지고 있어 안타깝게 여겨지는게 아닐까 싶다.

그 뜻을 펴보기도전에 꺽여져버린 멀리보는 깊은 지식과 안목을 가진, 개혁을 꿈꿨던 이들이 그렇듯이 ’그가 살았더라면’, ’그랬을법한’ 세상을 그대신 꿈꿔보는 것은 또 그 나름의 상상력의 즐거움일것이다.

소설 [소현]의 소제나 인물들은 재미있고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엮여져 있다. 다만 작가의 화려한 글발이 지나쳐서 미사여구로 보여서 하품이 난다. 말을 아끼는 듯한 말줄임표가 많은 대사들도 인물들의 성격을 죽여서 답답하게 느껴진다. 책을 읽으며 나는 소현세자라는 인물이 이토록 소극적이고 자기 몸을 사리는 인물이였을까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가졌다.

작가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모호함으로 결말내버린 소설의 흐름은 여러모로 독살에 기울어진 분위기가 확실하다. 무려 십여년에 가까운 오랜 볼모로서의 삶을 보낸 그가 고국에 돌아와 단 두달만에 역질이라는 이름으로 살해 당한다? 정치의 세계는 잘 모르겠지만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거해야 하는 왕족 또는 지위를 거머쥔 이는 분명히 적극적이며 계혁적이고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소설속의 소현세자는 다만 먼 고국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는 아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존엄이 있다면 ’나는 조선의 세자, 임금의 아들이다’라는 정도랄까...

’나는 조선의 국모다’라고 외치고 죽어간 명성왕후는 일본에게 있어 위협적인 존재였다. 여인이었으나 누구보다 큰 뜻과 정세를 읽어내는 안목이 있었으며 지혜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소현세자 또한 아비를 무릎 꿇린 적국이지만 청국이라는 나라의 배울점을 보았고, 서학의 필요성을 알아볼 정도의 안목이 있었다. 아비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양국의 정치적 협력에 애썼으며 적의 힘을 빌려서라도 강해지기 위한 힘을 키우고 기다려야 하는 때를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머나먼 타국의 볼모로써 자신의 세를 키우지 못하고 아비의 눈치를 보는 나약한 인물로 오로지 학문과 새로운 문물에 호기심을 가졌던 젊은 왕자정도의 인물이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속에 실존했던 한 인물을 소설로써 살려내려 했다면 그가 가진 위대함을 보여준다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소현]속의 소현세자는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지나치게 답답하고 소심한 민폐형 인간으로 보일뿐이다. 흔이나 만상, 막금, 석경, 봉림등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작가의 지나친 감수성으로 포장되는 덕에 산만하게 흩어져 버린것이 안타깝다. 감정에 대한 필요이상의 설명들이 정작 중요한 스토리의 흐름을 방해했으며 책을 읽는 내내 훌륭한 캐릭터와 내용 구성이 아깝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영상과 대사를 보면서도 ’그래서 뭐?’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의 영화와 같은 소설이다. 문장력은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그것이 오히려 소설로써의 매력을 감춰버려서 많이 아쉽다. 결말 부분을 ’독자의 몫’으로 돌린채 흐지부지 끝내버린 무성의함도 서운하다.

지금보다 어린 때, 매일 시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세상 모든 것들의 몸짓이 시가 되어 머리속을 지배하던 때가 있었다.
시를 사랑하고 시인이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때가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도, 바람에 뒤집어진 나뭇잎의 허연 뒷면에 부서지던 햇살도
전기줄위에 비맞고 있는 비둘기도, 아스팔트 도로의 갈라진 틈으로 자라는 잡초도
모든 것이 ’시’라는 이름으로 춤을 추던 그 때는
어서 힘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고, 가진 것 없는 철없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참 행복했던 것 같다.
순수...라고 하긴 멋적지만 여과없이 세상을 보고
지금보다는 더 아름다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 했던 때
시를 쓰기 위해, 더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쉼없이 마음속에 아름다운 것들을 꼭꼭 다져넣었던 때...
책장 가득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가득 꽂아놓았던
누렇게 바랜 오래된 시집들 처럼 지금은 잃어버린 그 ’시’의 세계.

시의 함축된 언어에 담긴 느낌이 닿아올 때
무심코 읽었던 시가 어느날인가는 문득 생각나서
’아.....’
말로 설명 할 수 없으면서 ’그래서....’라는
아파본 사람만이 공유 할 수 있는 아픔처럼
그 느낌을 공유하게 되는 순간
오래된 수수께끼를 마침내 풀어냈을 때의 쾌감은
얼마전 읽었던 호모루덴스의 놀이적 인간으로써의 기쁨일 것이다.

한편의 시에  그렇게 오랜시간 싸안고 담아 둘 수 ’이야기’를 담아둔 시가 좋다.
세련되고 멋진 시, 아름다운 시가 너무나 많지만
그중에 그런 진한 감동을 주는 시는 또 많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든 그렇겠지만 누군가는 쉽게 쉽게 설렁설렁하는 것도
어떤 사람은 꼼꼼하게 뜸들이며 세월을 보내며 하는 사람이 있다.
스타일의 차이일뿐 그 삶이 누구에겐들 심각하지 않고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도 마참가지로
어떤 시인은 쉽게 쉽게 글을 쓰기도 하고
어떤 시인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가며 쓰기도 한다.

그러나 시한편을 쓰기 위해
오랜시간, 심지어는 자신의 모든 삶을
시에 바친 시인의 삶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의 시 한편 한편이
감사하고 소중해서 시에 대한 평가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시들을 읽다가 이야~ 멋진 시다.
라고 생각했던 한편을 소개한다.

 박라연 시집 [빛의 사서함]

내 빛의 사서함을 열자 붉고 노란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웃음소리를 만지자 수련이 쑥쑥
솟아오른다. 고통만 들이닥치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듯.

무슨 말로 부탁했을까. 백오심여명의 목숨을!
기장 체슬러 B 슬렌버그는 찰나에 폭파직전의 비행기를
허드슨 강에 무사히 올려놓았으니!
문득 내 사서함의 빛들이 사과나무 한그루라도
살려내는 주문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미안하다는 생각과 고맙다는 말을 가슴에 쟁이기
시작하면 가능할까. 온몸에 붉고 노란 수련이 봉긋
봉긋 솟아 죄인처럼 숨어서 짓던

지난해의 미소를 조금씩 베어 음미하며 내일들을
견딜 생각이다. 천벌처럼 맞고 살았던 悲, 卑, 秘,
포도주처럼 받아 아껴 마시며

껴안을 세상과 맞서 싸울 세상에 대한 탐구 또한
발품 팔아 영혼을 팔아 사겠다고 옹알이 하며

한 발 내딛는다.   - 박라연

’秘’가 참 궁금하다.
무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