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몹시 나쁘다. 안경이나 렌즈를 빼고 밤거리에 나서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저 까만 덩어리로 보이고 불빛은 커다란 덩어리 덩어리로 번져보인다. 최근 포도막염으로 인해 가뜩이나 난시인데 사물이 온통 겹쳐 보여서 몹시 괴로웠다. 이번엔 가까이 있는 글씨들을 읽기가 무척 힘든 것이다. 눈을 뜬채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잔상이 남는 것처럼 모든 사물이 미세하게 보이는 눈을 아무리 비비고 깜빡여 보여도 나는 꿈속의 세상에 서있는 것만 같다. 어린시절 네모난 공간에 갇혀 오래된 텔레비젼의 지지직 거리는 소리없는 노이즈속에서 깨지도 못한채 답답해 하며 짓눌리는 오랜 악몽처럼...

박승예 작가의 [괴물전 : 악몽일기]를 처음 펼쳐들었을때 공포영화나 무서운 이미지나 이야기를 보거나 들은 날에는 반드시 악몽에 짓눌리는 편인지라 섬뜩한 그림들에 순간 눈을 감고 싶어졌다. 책을 읽다보니 괴이한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가 겹쳐지며 ’괴물’의 이미지가 탄생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악몽일기는 그 꿈에 대한 해석이나 설명없이 그저 작가가 꾼 악몽들에 대한 짤막한 글들이다. 짤막하지만 그 스토리는 꿈치고는 꽤나 다이나믹하다. 어떤 것은 이미지적인 꿈에 작가적 상상력의 대화들이 가미된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대사’까지 있다. 끊어진 영화필름을 이어붙여 빠르게 또는 느리게 돌리는 것처럼 두서없는 내용들속에 묘하게 숨어있는 고뇌들이 겹쳐진다. 사람이 꾸는 꿈은 무의식의 세계로 알려져 있지만 또한 가장 현실적이고 정확하기도 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이 많고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서 그런지 꿈을 많이 꾸는 편이다. 때로는 깊이 숨겨두었던 속마음의 내가 꿈에서 적나라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생각지 않던 사람이 꿈에 보여 의아해 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령 어떤 생각이나 물건을 보았을 때 무의식속에 숨어있던 오래전 연관된 이미지의 그 사람이 꿈에 보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악몽은 늘 그렇다. 마치 난시처럼 선명하지 않다.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의 가족인지 아닌지, 친구였던 사람이 가족이 되기도 하고 가족이었던 사람이 번뜩이는 칼을 든 살인자가 되어 내 뒤를 쫒기도 한다. 무척 아름다운 꽃밭을 거닐다가도 순식간에 지지지직 살갛을 태울것만 같은 노이즈의 숲에 갇히기도 하는 무엇하나 선명하지 않은 이미지들... 작가 박승예씨는 그러한 악몽의 이미지들을 잘 그려낸 화가라고 생각된다.

일단 무서운 이미지에 진저리를 치기에 어딘가 어둡고 답답해 보이는 그림들을 바로 보기 힘들었지만 묘한 매력을 가진 그림들과 그저 한번 읽기에 족한 극히 개인적인 꿈이야기로 구성된 [괴물전 : 악몽일기]는 작가의 작품노트와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글과 함께 책의 절반의 비중을 차지하는 그림들만으로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이다.

많은 백문백답류의 앙케이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질문이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가장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이라던가, ’하고 싶은 일은?’ 등등의... 스므살 남짓 어린시절 백통의 유서를 써보겠다고 시도했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정리해야 할 관계들에 대한 사과 또는 애정어린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하고 내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잘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했었다. 죽음이나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대한 두려움이라는게 나이가 들면서 점점더 커지는 듯 하다. 아마도 이런 저런 짐덩어리들이 늘어난 탓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한 발 한 발 가까워지는 느낌에 비례에 사랑하는 사람도, ’직접적인 성공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지만 추운 밤에 그것을 베게 삼아 잠들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는 마릴린 먼로의 말처럼 직업적인 성공도 이루지 못한채로 어영부영 살아온 삶이 억울해서 일지도 모른다.

점점 추워오지 않는가?
계속 밤이 찾아오지 않는가, 점점 많은 밤들이?
새벽부터 등불을 켜야 하지 않는가?
- 니체

[그 후에]는 죽음에 대한 준비를 말하고 있다. 처음엔 그저 영화 시나리오 용도의 가볍고 재미있는 책이겠거니 하고 편한 마음으로 읽다가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에 주인공인 네이선을 따라 마음이 영 불편해진다. 새드엔딩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거 결국 눈물을 펑펑 흘려야 하는거 아닐까 두려움까지 생겨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읽어내려갔다. 슬픈 드라마를 집에서 볼 때면 차라리 안보겠다고 TV를 껐다 켰다 하거나 다른 방으로 도망갔다 오거나 하면서도 결국 보게 되는 것처럼 필연적인 죽음에 대해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후에]는 마치 영상을 보여주듯 이미지적인 흐름을 보여주며 담담하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마치 어떤 끈으로 연결 된 듯’ 보이는 커플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진솔한 애정과 오랜 시간 메신저로서 죽음을 예견하고 그러한 사람들일 지켜봐온 사람의 담담함이 왈칵 눈물을 쏟게 만드는 신파는 없지만 오래도록 묘하게 마음을 저미게 만드는 흡인력을 가진 책이다. 언뜻 보면 통속적인 사랑소설같이 보이지만 읽다보면 탄탄한 스토리로 짜여진 집에 잘 가꾼 정원처럼 작가의 진지한 사람에 대한 성찰과 따스함이 빛나는 책이다.

너무 좋은 영화나 책, 연극을 만나면 한동안 그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최근 읽은 책들이 재미있고 유용한 책이 많았지만 [나를 찾아온 철학씨]는 그중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고 싶은 책이다. 연극이라면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은 극찬이 아깝지 않은 흥분과 기쁨을 안겨준다. 책장에 꽂아놓는 책들 중에 다시 두어번 읽게 되는 책은 많지 않다. 책장에 꽂아놓는 책은 한번으로 부족한 두어번, 서너번은 읽어야 만족할 것 같은 책을 꽂아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놀라운 책은 책장에 꽂아두고 날마다 보고 또 보고 싶다. 인문학 관련 서적은 먹을땐 몇번이고 꼭꼭 씹어야 겨우 넘길 수 있지만 일단 그 맛에 길들여지면 맨밥은 싱겁게 느껴지는 거칠지만 깊은 맛과 좋은 영양가를 가진 잡곡밥과 같다. [나를 찾아온 철학씨]는 신선한 야채와 좋은 반찬을 보기좋은 그릇에 담아내어 차려진 푸짐한 밥상과 같아서 영혼의 허기를 가득 채워준다.

 

[나를 찾아온 철학씨]는 단순함, 의사소통, 시각, 유연함, 공감, 개성, 소속, 평온함, 가능성, 기쁨이라는 열개의 주제를 가지고 그 주제에 걸맞는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와 정답 없는 질문을 통해 생각하게 하고 철학 도구들을 제시해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제시해준다. 읽어 내려가다보면 참 유쾌하고 즐거운 멋진 사람을 만나 신나는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든다. 보통 누군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마구 늘어놓을 때 지루함을 느끼기 쉽지만 그가 내놓는 질문과 이야기들, 음악과 책, 영화 등 다양하게 들려주는 철학도구들은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표지도 마음에 들고 이 책은 책 모서리가 닳도록 자주 꺼내서 들춰보며 기뻐할 수 있겠다.

 

특히 '유연함' 파트에서는 학교 다닐때 여러 철학관련 책에서 자주 언급되었던 파스칼의 "동굴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무릎을 치는 기쁨을 안겨준다. 그냥 철학용어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가 그 뜻을 어렴풋이 알게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플라톤이 미래의 철학자들에게 준 불멸의 선물 가운데 하나는 "동굴의 비유(Myth of the Cave)"이다. "이상한 죄수들"이 있는 이 "낯선 그림(<국가>)"을 통해 플라톤은 어두운 정신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의 목적은 우리가 이러한 죄수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탈출 계획을 믿고 동물 안으로 들어가보자!

 

얼마나 명쾌한 해석인지 모르겠다. 이게 이런 뜻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작가 마리에타 맥카티를 존경하는 마음까지 든다. 어릴때 스승에 대한 글 중에 지식을 가르치는 스승,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스승, 감동을 주고 변화되게 하는 스승, 그리고 최고의 스승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게 해주는' 스승이라는 글을 본적이 있다. 교육학 관련 교양과목 수업중에 좋은 스승은 어떤 스승인가라는 질문에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게 해주는' 스승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답을 했다가 그건 무슨 말이냐는 약간의 어색한 무안함을 당한적이 있다. '왜?'라는 질문에 나조차 그냥 막연하게 느껴졌던 대답들을 최근 참선이라는 것을 통해 느끼고 있다. 진정한 스승은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진 참다운 자아를 찾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이라는 것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벡은 우리 안에 있는 영화제작자에게 제안을 한다. 빈 배를 기억하라. 당신은 호수에서 배를 타고 하루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배가 당신의 배를 들이받는다면 당신은 매우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그 배는 비어 있다...... 상대할 사람이 없고 흥분과 분노를 쏟아 부을 대상이 없으므로 당신을 배를 수리하는 일에만 온전히 집중한다. 우리의 '첨가물'은 어떠한 사건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감정의 화살을 돌리기보다는 상황에 집중하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은 드라마에 계속 집착하지만 해결의 일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중략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과 물건들을 바라는 꿈은 언제나 좌절과 실망으로 끝난다. 내면을 들여다보라.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 당신도 이것을 알고 있다.

 

아..................
감탄에 감탄을 하며 읽었고, 어느 부분에선 따끔거리는 아픔을, 어떤 부분에서는 새롭게 내 마음의 영토에 따뜻한 햇빛을 쏘여지는 기분으로 읽어내려가며 어느 문장 하나, 단어 하나조차 버릴 것이 없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완벽한 문장들과 깊은 사색과 인간(타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엿볼 수 있는 작가의 성품에 존경심이 무럭무럭 커진다. 이런 책을 만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 두고두고 마음이 황폐해지고 비어있는 배를 향해 대상도 찾지 못하는 허무한 분노가 쏟아질때마다 꺼내 읽으며 단순함, 의사소통, 시각, 유연함, 공감, 개성, 소속, 평온함, 가능성,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나늘 위해 읽고 배워야 겠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 『논어(論語)』 學而篇(학이편) 공자(孔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