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의 계절,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
	찌는 듯한 무더위와 태풍이 지나고 드디어 하늘엔 청명한 기운이 텄다. 가을이 오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이었나 하는 푸념을 하며 집 앞 공원으로 나왔다. 조금 시려진 바람이 두 뺨과 귓불을 휘감자 지나간 옛사랑의 냄새가 나기도 하고, 유년 시절 콧물을 훌쩍이며 골목에서 뛰놀던 생각이 나는 게 가을은 유난히 사람을 청승맞게 하나보다. 잊고 지냈던 기... [글 전체보기]

소설도 음악이 될 수 있다. 김중혁의 소설 '악기들의 도서관'은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해준다. 학교 도서관 소설코너에서 두리번 거리던 중 재미있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2008년에 출판된 책인데, 그 때 당시 여러 잡지의 신간코서에서 소개된 글을 본 기억이 난다. 난 처음 들어본 작가의 책을 볼 땐 어느정도의 신선함과 약간의 긴장을 느낀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관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와 혹시 그저 그런 책인가 하는 우려가 그것이다. 그럴때면 책 제목의 단편을 먼저 찾아 읽어보는데, 보통 소설집은 그 책에 대표작을 제목으로 걸기 때문이다. 선택에 대한 의문은 내 입가에 미소를 띄우게 하면서 곧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나는 작가가 직접 손수 녹음해 놓은 음악에 재생버튼을 눌렀다.

 

이 책은 소리로 가득하다. LP판, 피아노, 오르골, 기타, 합창, 소음을 소재로 다양한 이야기을 구성하였다. 자동피아노, 매뉴얼 제너레이션, 엇박자 D,악기들의 도서관.... 각 단편들의 타이틀은 마치 음반의 수록곡들과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사실 이 소설집 자체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곡들의 흐름을 통해 앨범 전체의 느낌을 알게 하는 잘 다듬어진 한 장의 음반처럼 이 소설집 역시 각 단편들의 면면도 흥미롭지만 전체의 흐름이 하나가 되었을 때 더욱 매력적으로 '들린다'. 특히 담담하게 묘사되는 청춘의 무미건조함을 흥미로운 문체로 묘사한 트랙인 <유리 방패>는 20대 대학생의 일면을 들춰낸다. 있는 돈을 모두 꺼내어 호프집 탁자위에 두고 그만큼의 맥주를 들이킬 수 밖에 없는 친구의 흔한 저녁 시간을 그려낸 이야기는 마치 일기장을 그대로 보는듯한 수수한 느낌이다. 이 소설에는 이러한 '루저버디'들이 주 등장한다. 그들의 직업은 비정규직도 아닌 소일거리에 그치거나 혹은 면접에 탈락하는 것이 현재의 직업이기로 하며 때로는 평범한 이들의 취미를 직업으로 삼아 밥벌이를 한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설파하지는 않지만 무심한 행간의 표정 뒤에 숨은 절절함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밤새워 레코드를 뒤지는 루버 버디들, 서른도 훌쩍 넘어 지하실에서 기타를 가르치고 배우는 루저 버디들, 그리고 지하철에서 플라스틱 칼과 방패로 땀흘리는 싸움놀이를 하는 루저 버디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소년적인 꿈과 이상과 열정과 순수함을 끝까지 잃지 않고 밀고 나가 마침내 자신만의 음악을, 자신만의 소리를 찾게 되거나 혹은 노력을 지속한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 책에 모든 인물들은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기 위해, 혹은 타인의 소리를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펼처 나간다. 그 끝에 어떠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가만히 하늘만 처다보고 있는 것보단 훨씬 훌륭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우연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고, 지금 나의 행동과 일상은 뜻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늘 나는 어떤 음악을 만들고 있는가? 혼자하는 독주인가, 아님 함께하는 합창인가? 킬링타임용 후크송인가, 아님 누군가에겐 기억될만한 명곡인가? 가끔씩 내가 일상생활에서 연주하고 있는 곡의 정체가 궁금할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평가해달라 하기에도 참 민망하지만, 원래 개성이라는 것은 평가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므로 신경은 쓰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은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뿌듯한 그러한 노력의 흔적이 보이는 음악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