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가문의 수치' 제목만 봤을 때
우수한 형제들 중에서 유독 나쁜 성적을 가진 아이의 고민이려니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그건 성적 만연주의에 물든 엄마의 선입견이었다.

앞의 숫자가 바뀌는 나이에 대한 왠지 모를 환상을 가지는건  동서양을 떠나서 비슷한가보다.
10살이 되면 사랑에 빠져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부담느끼는 마르탱
아직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가문의 수치라며 부끄러워하고 여자친구가 있는 형을 엄청 부러워한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반의 루이즈를 좋아하는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랑 같은 아이를 좋아한다는 고민에 빠지며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아직은 우당탕 같은 동성 친구랑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는 철없는 십대의 우리 두 딸은
마르탱의 심각한 고민에 별로 공감하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아직은 이성이나 성에 대해 몰랐으면 하는 엄마의 욕심에서 바라보는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성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나도 역시 그랬나보다.
"좋아하는 남자친구 있어?" 라고 장난스레 물어보면 "남자애들은 놀리기만 하고 장난만 치고 시끄러워서 싫어요."
라는 말에 지레 안심하는 걸 보면....
하지만 마르탱에게 루이즈가 갑자기 찾아왔듯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서툴지만 귀엽고 예쁜 사랑이 찾아오겠지 싶다.

책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읊조리게 되는 한 구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너무 유명한 책이고 잘 아는 내용이라 오히려 책으로 펼쳐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
책이 ‘홍길동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지느낌이 나는 책 내지도 그렇고 투박한 홍길동 그림도 우리 옛이야기
홍길동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네요.
원본대로의 우리 고전은 수능시험에나 나오는 어려운 수준으로 어른인 우리의 눈높이로도 읽어내기 어려운데 만화의 형식이나 쉽게 풀어 쓴 말로만 고전인 홍길동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고유의 홍길동을 제대로 읽힐 좋은 책을 만났어요.
고학년을 대상으로 해서인지 정확한 고어와 상세한 각주까지……
어렵고 주석에 수시로 눈을 줘야 하는 불편함이 간혹 있지만 굳이 그 뜻을 모르더라도 전체 내용을
파악하면서 흥겹게 읽어도 좋을 듯 합니다.

200여쪽의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쉽고 재미나게 읽혔던 이유를
다른 홍길동과 비교해보니 손에 잡히네요.
도입부부터 사극에 익숙한 대화체와
태몽을 꾸고 안채의 부인에게 찾아가 쑥스럽게 얘기 꺼내는 장면, 거절당하고 와서 춘섬을 만나는 과정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소상히 그려지는데 반해
다른 책은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건조하게 기록되어 있어 책장이 쉬이 넘겨지지 않더군요.
또 ‘세월이 흐르고 흘러 길동이 열 한살이 되었다.’
대부분의 책은 이렇게 시작하는데 책은 길동의 자라남과 그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일화가 담겨있어 서자의 설움이 더욱 공감됩니다.

천자문이 거짓말을 한다며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어린 길동
초란의 모함과 음모로 위기에 처하지만
도술을 부려 암살객을 호령하는 어린 홍길동의 늠름함에서 영웅의 기상을 느낄 수 있었지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도둑의 두목이 되었으나 제 주린 배만 채우는 도둑이 아니라
백성들의 칭송과 우러름을 받는 의인이 되었고 나라에서 버림받은 백성들을 이끌고 율도국의
어진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루는 홍길동 이야기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까지 챙겨 볼 수 있었어요.

‘보초서는 군사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 아침이면 텅텅 비어있는 창구’
에서 느껴지는 활빈당과 홍길동의 신출귀몰
요괴를 물리치는 장면에서는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 소설의 모험과 스릴도 느껴지네요.
400 여 년 전의 고전에서 이런 맛스러움을 만날게 될 줄 예상 못했기에 아이가 더욱
재미나게 읽었어요.
연달아 도서관에서 [바리공주]와 [박씨전],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애절한 [운영전]까지
단번에 읽고 왔습니다.

‘빠직, 으악’ 이런 간단한 의성어, 의태어만 가득한 만화책을 보던 아이들에게
풍부한 어휘력을 키워줄 수 있는 아름다운 우리의 고전을 더욱 많이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사극에서도 보여지듯이 수백 년 간의 집권으로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놓지 않으려고 결속하고 백성의 주린 배를 쥐어짜는 조정관리들에게 홍길동과 활빈당의 활약은
십 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듯한 통쾌함도 줍니다.

영웅의 기상도 느끼며 양반들을 따끔하게 혼내주는 통쾌하고 흥겨운 고전 홍길동이었습니다.
우리의 고전을 읽으니 판소리의 추임새처럼 흥겨움이 있어요.

아이들이 불렀다는 홍길동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집니다.

아리아리 동동 시리시리 동동
길쭉한 동동갈치는 먹기도 좋고요.
장생포 동동다리는 왜놈도 겁먹네.
성 밖엔 산주동 어부동이 있고요.
우리 고을엔 활빈당 홍길동이 떴다네.

송편, 떡국, 화전.....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는 정겨운 속담이 생각나고
떡 하면 입에 침부터 고이게 하는 맛난 떡의 맛깔스런 행진을 보는 듯합니다.
떡을 좋아하긴 하지만 떡 종류를 말할라치면
열손가락을 못채우는 저의 무지함을 제대로 알려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과 더불어 엄마의 어릴 적 추억담까지 곁들여 들려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네요.

백화점이나 방앗간에서 포장되어 나오는 간편한 떡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구수한 옛이야기가 곁들여져 있는 따끈따끈 떡타령
이 책들을 넘기다 보니 침이 꼴깍꼴깍~

올해 봄 아이들과 공원 이곳저곳에 핀 진달래를 그냥 보기만 하기가 아쉬워서
예쁘게 떨어진 꽃 몇 송이 가져다가 화전을 만들어 보았지요.
그림처럼 사진처럼 예쁜모양은 아니었지만
봄향기가 와락 입속으로 퍼지는 그맛에 즐거웠던 기억이 이 책을 보다보니 새롭네요.
이런 시 한 수 곁들여도 좋을 듯....

개울가 큰돌위에 솥뚜껑 걸어놓고
흰가루 참기름에 꽃전부쳐 집어드니
가득한 봄볕향기가 뱃속까지 스며든다.

나주 선비 임백호의 시라고 합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느껴지는 화전의 봄냄새가 그대로인 듯 느껴지죠.

첫페이지부터 삐져나온 아이의 호기심
'백결선생이 누구야?"
대답을 망설일 엄마, 아빠를 위해 책 뒷편에 [떡에 대하여 알아봅시다]에 나오네요.
통통 즐거운 장단이 나올 것 같은 다양한 의성어, 의태어
'꾸덕꾸덕  팔팔 파르르 치지직 반지르르 탱글탱글 노릇노릇 올깃쫄깃 말캉말캉 철퍽철퍽 모락모락'
이렇듯 다양한 소리와 맛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신명에 감탄하게 됩니다.
푸짐한 무쇠솥에 끓고 있는 떡국떡부터 떡 배까지...
붓으로 간결하게 그린 편안한 그림들
그린이가 [아씨방 일곱동무] [신기한 그림족자] 정겨운 그림으로 익히 낯익은
이영경님 그림이라 더욱 눈에 쏙 들어오는 것 같아요.

1월부터 12월까지 떡과 함께 넘겨본 우리의 1년 열두달이었습니다.
사계절의 변화와 아름다움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떡에 담아 나누어 먹는
우리 조상의 운치가 느껴집니다.

이 책은 배고플 때 먹으면 안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