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된 이후로 외부와의 소통을 끊어버린 에리코 누나
예상치 못한 사고로 제자를 잃고 평생 후회하며 사시던 아라키다 할아버지
바쁘게 살아가느라 아이의 외로움을 미처 안아주지 못한 마코토의 부모님
낡은 아파트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훈훈하게 모았던 구심점은
마코토였다.
먼저 인사할 줄도 몰랐고 시시콜콜 간섭하는 같은 층의 할아버지는
원수라고 여기던 아이 마코토

마코토가 순수한 동심으로 이들을 한데 묶는 역할을 했다면
책 내내 훈훈한 실타래를 풀어내는 분은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갇혀있던
할아버지와 마코토를 맨 처음 발견하고 구해주는 스시마 할머니다.
또한 시골에서 마코토 가족에게 보내주는 입안 가득 침이 고이게 하는
달콤한 복숭아와 향긋한 포도송이들은 몇 안 남은 이웃에게 나눠주면서
단절되어있던 이웃들을 소통하게 만든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마코토가 처음 들려주는 아파트는 언제 멈출 줄 모르는 엘리베이터처럼
삐꺽거리고 낡고 어두웠지만 조그만 것 하나라도 서로 나눠주고 챙겨주고
아픔을 다독거리는 따뜻함이 스며든 아파트는 더이상 낡은 아파트가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살고싶은 보금자리처럼 느껴진다.
험상궂은 관리인에 맞선 4명의 노약자(?)들이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
나도 모르게 같이 힘이 주어진다.

포근한 할머니의 품이 생각나는 스시마 할머니의 감사인사가 기억에 남는다.
마코토가 복숭아에 이어 포도를 갖다 드렸을 때
"매번 이렇게 복을 나눠 주니 고맙구나."
푸른하늘이 네모난 마당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마코토의 아파트는
욕심많은 새주인의 손에서 무너질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사랑의 고리는 더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코토가 살고 있는 아파트보다 깔끔하고 엘리베이터도 생생 작동하는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급한 일 있을 때 마음놓고
부탁할 절친한 이웃하나 없는 삭막한 현실 속의 우리네 모습
그 메마름을 젖셔 줄 사람은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일게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부침개 한접시 들고 이웃집 벨을 누르고 싶게 하는 책이었다.

동서양 어디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한 가보다.
엄마의 잔소리 '단 오 분도 한가지 일에 집중하질 못하는구나' 를
예상하는 필립의 모습에서
열이 사십 도가 넘는다는 말에 “나 내일 죽는다” 며 엉뚱선언하는
귀여운 꼬마악동 파울의 모습에서
일 때문에 가족과 함께 해주지 않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을
말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책 속에서 우리 아이들과의 공통점을 발견하면 아이들이 밥을 먹거나
쉬고 있을 때 큰 소리로 읽어주곤 한다.
작은 아이가 “엄마 무슨 책이야?” 하며 물을 때 앞부분만 조금 읽었던 나는
집을 구두상자로 상상하며 그 뚜껑을 열어 식구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필립의 엉뚱함과
아침잠 많은 파울의 몽롱한 상태가 둘째와 너무나 닮아있어
"똑같다. 똑같애" 를 연발하며 신나게 읽어주었었다.
아이들도 자기와의 공통점을 발견한 책 속 주인공에게는 더욱 관심을 가진다.

첫 인상의 어리고 엉뚱한 필립의 모습과는 달리 아기를 가진 엄마를 오히려 아빠보다
더 배려해주는 아들의 모습에서 따뜻함과 듬직함이 느껴진다.
태어날 동생의 병으로 아이들이 무서워할 때도 차분하게 아이들에게 마치 동등한 어른처럼
서로 의논하고 설명해주는 엄마의 모습도
“너희들은 몰라도 돼” 하며 가족의 근심거리를 감추려고만 했던 우리네의 모습과 겹쳐진다.
영리한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동등한 대접을 받으며 오히려 어른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같다.
일을 우선하는 아빠의 모습이 서운할 때도 있지만 엄마가 클라라를 낳기 위해 병원에 있을 때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리는 아빠의 모습
뱃속 아기를 위해 다친 파울도 어리광을 자제하는 모습에서
클라라 가족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태어나기 전부터 클라라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필립네의 막동이
후기를 대신한 작가의 말처럼 클라라가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하긴 하지만
걱정되지 않는 이유다.

특히 테레제가 엄마 뱃속 아기의 병에 관해서 우연히 듣고 오빠와 고민을 나눌 때의
조마조마함은 책을 읽는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엄마가 없는 동안 아빠가 익숙하지 않은 솜씨로 만든 스프를 세 가족이 먹으며 그 자리에 없는 동생 파울을 떠올리는 …….그게 가족이다.
좋은 곳, 맛난 것이 있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
병원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온 가족이 초조해하며 같은 걱정을 서로 함께 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그 모습이 바로 가족이다.
온 가족이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알콩달콩 일상생활 속 이야기다.
설레는 기다림 속에 병에 걸린 아기의 소식과 탄생을 접한 가족들의 아픔도 그려지지만
그 속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확인하는 따뜻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