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손민호] 소위 ‘90년대 문학’은 90년대에 생산된 문학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되레 장르적 개념에 가깝다. 거창하고 위대한 가치를 재현하려 했던 80년대 문학에 반발한 것이 90년대 문학이다. 하여 90년대 문학이란 말 안엔, 작고 자잘한 것을 조몰락거리는 이른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미학이 담겨있다.

그러니 굳이 여러 사람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 복잡한 사건도 필요 없다. 소극장 연극처럼 극도로 한정된 공간과 제한된 수의 등장인물로도 소설은 넉넉히 구성된다. 대신 꼼꼼한 디테일과 섬세한 심리묘사, 그리고 이를 받치는 세련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서사를 상쇄하고 보완한다. 90년대 소설을 기억할 때 일군의 여성작가가 먼저 떠오르는 건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강(37)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창비)와 조경란(38)의 장편소설 『혀』(문학동네)가 나란히 나왔다. 둘 다 90년대 문학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이름이다. 둘은 여전했다. 독자의 가슴을 후비는 문장과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 나아가 클라이맥스를 향하여 일목요연하게(혹은 딴청부리듯이 슬그머니) 놓여있는 복선과 암시까지. 두 사람의 소설은, 승마장의 말처럼 우아하고 미끈했다. 다시 여전히, 둘의 소설은 한두 줄로도 줄거리가 요약됐다.

공통점은 또 있다. 두 소설은, 입으로 읽는 소설이랄 수 있다. 음식을 짓고 먹는 일련의 행위가 두 소설의 주요 모티브다. 조경란이 서사의 소(素)를 요리로 채웠다면, 한강의 소설에선 시종 풀냄새가 번진다.

우선 조경란의 『혀』. 줄거리는 간단하다. 남자에게 채인 요리사 여자가 음식으로 복수한다. 요리란 소재나 음식으로 복수를 벌인다는 설정 역시 이미 낯익다. 진작에 우리는 영화나 소설에서 비슷한 걸 맛본 바 있다. 그러나 소설의 진미는 전혀 다른 데 있다. 세상의 모든 먹거리에 얽힌 삶의 풍경들이다. 예컨대 다음의 구절은, 부지런한 취재와 예민한 감각이 낳은 일종의 아포리즘(aphorism·경구)이다.

-슬픔은 먼 데까지 향이 퍼지는 까슬까슬한 오이다. 질감이 거칠고 소화가 안 되며 고열을 내게 한다(31쪽).

-스무 살이란 나이는, … 칼로 잎을 벗겨야 속살이 나오는 파인애플 같은 나이다(63쪽).

-칠분의 육이나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인간의 무의식이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스튜와 같은 것(120쪽).

-내가 패류라면 대개의 연체동물과는 달리 아주 먼 바다까지 나갈 수 있는 가리비도 좋겠다(179쪽).

한강의 경우엔 먼저 작가가 떠오른다. 풀만 먹는, 또는 풀만 먹어야 하는 여자에 관한 소설이라면 왠지 한강이 써야만 마땅할 것 같다. 강마르고 왜소한 체구 때문인지, 늘 속삭이듯 말을 해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한강을 보면, 덩그러니 놓인 화분이 생각난다.

『채식주의자』에 실린 이야기 세 편엔 공통된 분류법이 있다. 육식·공격성·폭력·동물성·욕망 따위의 것들은 남성을 상징하고, 채식·나무·식물성·상처·강박증·실어(失語) 따위는 여성을 가리킨다. 이 분류법은 색깔에도 적용된다. 붉은 색 계통은 남성이고, 푸른 색은 여성이다. 몽고반점이라 불리는 엉덩이의 푸른 멍이 여성성을 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칼로 벤 듯한 구획이 남성 독자에게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 할 순 없다. 여전히 우린 약육강식의 세상 안에 있다.

손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