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그네》로 처음 만났던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의 임팩트가 워낙 강했던지라 즐겁고 유쾌한 작품을 쓰는 작가로 여겼으나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다보니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공중그네'급 유쾌함과 '올림픽의 몸값'만큼의 진지함이 결합된, 가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만 한 작품이 있으니, 바로 《남쪽으로 튀어!》(원제:サウスバウンド)다.

 

 제목부터 어쩐지 수상쩍고 심상치 않은 이 작품. 기본적으로는 도쿄 초딩 '지로'의 학교생활과 성장담이다. 그 나이대에 겪을 만한 일들, 생각하고 느낄만한 일들을 오쿠다 히데오식의 유쾌함과 과장을 섞어서 즐겁게 엮어나간다. 경험의 지리적·시대적 위치가 현저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절히 공감되는 사소하지만 거대한 일들. 동네 친구들과의 놀이와 공감, 같은반 여학생과의 초딩레벨에서의 교감, 무서운 중딩 형들의 폭력과 갈취, 껄렁한 친구와의 충돌, 세파에 물들어가면서 비교하게 되는 가정형편과 한탄, 서서히 눈뜨게 되는 성性에 관한 에피소드까지.

 

 이것뿐이라면 그저 그런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지로의 괴짜 아버지와 그에 못지 않은 어머니의 정체(?!)로부터 나온다. 경찰청 홈페이지에 이름이 등장할만큼 과격한 혁명투사(?!)였던 지로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 키도 크고 덩치도 큰데다 목소리도 걸걸하고 행동력도 엄청나다. 거기에 철두철미한 논리로 무장한 신념까지. 무분별한 혁명의 한계를 절감하고 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철저한 무정부주의자가 되면서 사사건건 지로와 그의 여동생 모모코를 괴롭게 하는 일만 만든다. 거기에 어머니는 또 어떠한가. 과격한 백수 남편이 뭐가 좋다고, 찻집 운영하며 돈벌어 뒷바라지 하면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않는 어머니 사쿠라. 어머니 역시 과거에는 제법 엄청난(?!) 인물이었던 것.

 

 어쨌거나 못말리는 괴짜 부모 밑에서 쑥쑥 자라는 지로와 모모코. 파란만장한 초딩의 삶을 이어나가는데, 급기야는 우여곡절 끝에 하루아침에 도쿄를 훌쩍 떠나 무일푼으로 머나먼 오키나와 남쪽 이리오모테 섬으로 날아가 파격적인 새 삶을 꾸리기에 이른다. 도서벽지의 막막한 곳이지만 의외로 자급자족, 나누는 삶, 무언가 개척해 나가는 삶이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멋드러진 자연과 풍광, 그 따사로운 볕과 바람 곁에 사는 것이 마치 지상낙원의 삶처럼, 어찌나 부러워 보이던지. TV나 PC없이는 단 하루도 못살 것을 알면서도, 막연하게, 나만의 이리오코테 섬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기도 했다.

 

 과거 학생운동을 비롯한 운동권의 투쟁, 반미·반정부논리, 화목한 가정과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생각, 학교폭력, 학교비리, 천혜의 자연환경과 평온한 지역사회를 짓밟는 무분별한 개발주의와의 대립 등 제법 묵직한 주제와 소재들을 유쾌하고 가벼운 이야기 속에 맛깔나게, 슴슴하게 잘 풀어 엮어낸 오쿠다 히데오의 솜씨가 놀랍다. 유머러스한 상황, 피식피식 웃음나는 표현들과 더불어 이야기 자체도 재밌지만 중간중간 던져지는 진지한 메시지들에 대해서도 한번씩 생각을 정리해보며 읽는 맛이 또 쏠쏠하다. 유쾌함과 진지함이 절묘하게 앙상블된, 가히 오쿠다 히데오 최고의 작품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듯.

 

 제법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절정, 그리고 마지막에 지극히 그 아버지, 그 어머니스런 선택을 하는 부모님과, 그것을 또 어이없게, 지극히 그 부모님의 그 자식들스럽게 받아들이는 지로와 모모코, 그리고 누나 요코. 비록 자신은 과격한 신념을 가지고 과격한 삶을 살아왔지만 아들 지로에게는 결코 아버지처럼 살지말고 네 생각대로 살라고 굳게 말하는 아버지 이치로. 이런 아버지를 둔, 저런 요절복통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으며 장성한 지로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리고 지로가 아버지가 되었을때 그의 자식들에게는 어떤 아버지로 자리하게 될지 무척 궁금해진다.

 

 경험과 외견 모든 것이 천지차이지만 엉뚱하게도 묘하게 무언가를 공감하며 내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 나의 아버지는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슨 말씀을 해 주셨던가를 곰곰이 더듬어 만져보게 된, 나아가 나는 미래의 내 자식들에게 어떤 아버지로 그려지게 될 것인가 막연슴슴하게 생각의 호수를 휘저어 보게 된, 기묘하면서도 훈훈뿌듯한 즐겁고도 두려운 시간이었다. 이 시간은, 오롯이 오쿠다 히데오가 가져준 감동과 그리움 덕분,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안고가야 할 숙제로 여울진다.

 

 관시리즈 9번째 작품이자 일본에서도 비교적 최근 발간된 작품 '기면관의 살인'! 관시리즈 차기작은 언제 나올지 기약할 수 없으니 조금조금씩 야금야금 아껴 읽을 생각......이었으나 특유의 몰입감과 결말에의 궁금증으로 인해 스르륵 단숨에 읽어내릴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작품은 최대한 초심으로 돌아간 듯 한 분위기로, 폭설로 고립된 산장에서 벌어지는 제대로 된 본격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지어놓은, 선대 주인의 기괴한 취미에 의해 갖가지 가면들로 가득한 기면관, 기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초대된 손님들, 각자의 얼굴을 특색있는 가면으로 가린채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특이한 룰,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탐정역할을 하는 시시야 가도미의 명쾌한 추리와 함께 씁쓰레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500여페이지가 넘는 볼륨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하나. 전체적인 호흡은 느린편이지만 여러가지 복잡다단한 설정들과 인물들의 배경, 차근차근 짚어나가는 전개와 꼼꼼한 시시야 가도미의 추리 등을 차분히 읽어나갈 수 있다. 눈덮혀 고립된 저택에서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기괴한 가면들로 둘러싸인 기묘한 관의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더없이 이상적인 템포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애초에 체형도 나이도 비슷한 사람들, 똑같은 옷을 입혀놓고 색색의 가면으로 얼굴까지 가려놓음으로써 '이 사람이 과연 그 사람인가', '저 사람이 그 사람이었던가?'하는 모호한 한줄기 의심의 싹을 피어오르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기면관 주인의 의도, 도플갱어나 이중신 등 사전에 깔아놓은 여러가지 이미지들이 합쳐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지막 부분에 가면 요즘같은 시대에 본격 추리를 쓰는 어려움에 대해 크~게 푸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투영되어 있는데,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한탄하고 있는,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작가양반이 왜 이렇게 귀엽게 느껴지는지... ^^;

 

 게다가 읽는 내내 '이거 또 시시야 가도미가 쓴 '책속의 책' 아니야?!'하고 느낄 정도로 상당히 작위적인 설정들에 대해서도 '귀여운 변명'을 꼬물꼬물 내밀어놓음으로써, 일순 분노할 수도 있는 독자들에게 나름의 애교를 부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생각보다 참혹하지도(비록 '그런' 시체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던 '기면관의 살인'. 다음 작품은 작가의 공언대로라면 관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을텐데, 어떤 형태의 관을 지어서 우리를 초대할지, 시시야 가도미의 훗날은 어찌될지 벌써부터 궁금하고 기대된다. 그리고 대망의 관시리즈가 종결지어지는 것인지도... 하루빨리 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날림공사는 금물! 초석부터 대들보까지 튼튼꼼꼼하게 장인의 솜씨로 뚝딱뚝딱 멋들어지게 지어놓고 초대장 날려주길 바란다. 아, 빨리 가서 둘러보고 싶으니 초대장은 당일특급으로 쏴주길. 후후후...

 

 과연 관시리즈 최대 이색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이색적인 설정과 결말, 독자의 뒷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반전, '이게 끝인줄 알았지?'하면서 날리는 최후의 결정적인 반전 등 관시리즈를 애정하는 분들이라면 무척 즐거울만 한(?!) 끝이 기다리고 있는 작품, <인형관의 살인>.

 

 인형관의 상속자인 히류 소이치. 인형관에 온 그날부터 계속 도착하는 협박장과 살해위협. 주변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 도움을 청한 히류 소이치를 도우러 온 시마다 기요시.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는 놀라운 진실과 충격적(?!)인 반전.

 

 스르륵 읽어내린 뒤에 다시 뒤적여보며 세세한 표현들을 붙들고 보니 적절한 함정과 모호한 표현들로 독자의 오해를 불러일으켜 반전을 이끌어내고자 한 아야츠지 유키토의 솜씨가 잘 드러난다.

 

 모든 것이 밝혀진 뒤에 보면 이보다 더 안타깝고 애처로울 수 없는 히류 소이치의 처지...

 

 조금은 독특한 인형관의 설정, 다른 관시리즈와는 달리 1인칭 시점의 서술 등 이색작이라 불릴만한 요소들이 많지만, 이 작품의 방점은 3페이지 가량의 에필로그에 꽝꽝 찍혀있다고 볼 수 있다. 시작부터 가질 수 밖에 없는, 아니 읽기 전부터 가질 수 밖에 없는 엄청난 선입견을 후드득 뒤집어 버리는 아야츠지 유키토의 유쾌한 반전. 조금 허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분명 '으아니?! 이럴수가!'라는 표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상상하지 못했던 형태'의 일격이다.

 

 처음에 긴가민가 했던 심정으로 펼쳤던 '십각관의 살인'부터 시작, 주욱 달려 '인형관의 살인'까지(암흑관의 살인은 읽지 못했지만). 본격의 고풍스런 향취와 함께 읽는 재미도 쏠쏠한 관시리즈. 이제는 믿고 보는 관시리즈가 되어 그 즐거움을 손에서 놓기 힘든 시리즈가 되어버렸다. 다음 차례는 2012년에 쓰여진 최신작 '기면관의 살인'. 작가가 10개의 작품으로 구상한 관시리즈 가운데 9번째 작품이라는데, 차기작까지의 기다림이 생각보다 길어질까봐 조금씩 조금씩 야금야금 아껴읽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