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샹 밉샹'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오마에상(おまえさん)'의 번역본이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딱 떠오른 느낌과 단어, 바로 '진샹 밉샹'입니다. 예능프로그램 '무X도O'에서 '정X돈'이 분扮한 우스꽝스런 캐릭터를 일컫을 때 자막으로 쓰여진 말이기도 한데, 미미여사의 '진상'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입가를 떠나지 않는 찐득한 중독성을 발휘했습니다.
 
 한국어판 제목이 의도하는 바는 그 사건들의 '진상(眞相)'혹은 그 사람의 '진면목'이겠지만, 애초에 떠올랐던 '진샹 밉샹'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싶게 작품 속에는 그야말로 진샹·밉샹-진상, 밉상들이 그득하게 등장합니다. 이 헤이시로와 유미노스케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제목이었던 '얼간이'라는 제목이 이 작품에 더 꼭 맞는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제목하야 '얼간이들'! 

  

 상, 하권 합쳐 천 페이지가 넘는 이번 작품, 솔직히 중간에는 너무 지루해서 이렇게 분량 크게 써놓은 미미여사가 살짝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에둘러 에둘러 리어카 가듯 진행되는 속도, 그다지 매력적이게 느껴지지 않는 인물들에 대해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처럼 사람 숨을 턱턱막히게 했다고나 할까요. 미미여사 에도시리즈가 주는 특유의 안도감과 넉넉함, 호젓함으로도 답답함을 상쇄시키기는 힘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농도 짙은 연애소설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중략)... 사랑은 언젠가 식는 것이니까 그 잔혹함과 허무함도 써보고 싶었습니다." 

  

라는 미미여사의 인터뷰가 무색해질 만큼,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농도 짙은 연애상을 보여주지도, 식은 사랑의 잔혹함과 허무함도 그다지 잘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그저 타인에 대한 뜨거운 욕망(굳이 사랑 뿐 아니라 여러가지 욕망), 그 욕망이 뒤틀리고 어긋나 잘못 분출되어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만 가득할 뿐입니다. 아직도 캐릭터 감이 잘 안잡히는 신노스케,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되는 후미노, 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오토시, 센타로 등. 사건의 발단과 경과도 이렇게 억지스럽게 다가 올 수가 없습니다. 근래 미미여사의 시대물을 읽으며 이렇게 답답한 마음으로 읽은 적이 있었나 싶어, 혹시나 내 마음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어 그런건 아닌가 싶어 흠칫하기도 했습니다.  

  

 '흔들리는 바위' - '미인'의 오하쓰 시리즈 보다 '얼간이' - '하루살이' - '진상'으로 이어지는 헤이시로, 유미노스케 시리즈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기에 낭패감은 배가 되었습니다. 물론 넉살 좋은 헤이시로와 천재미소년 유미노스케, 마음 따뜻하고 든든하게 느껴지는 찬가게 아줌마 오토쿠 등의 새로운 이야기와 스토리가 진척되기에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작품인 것 만은 아닙니다. 슬쩍 던지는 헤이시로의 말과 생각이 여전히 참 좋다 싶게 여겨질 때도 있고, 절로 미소지어지는 익살스런 장면들도 충분히 재미있으며, 오토쿠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마음씀씀이가 너무나 따스해 가슴이 벅차오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슬슬 나이를 먹어가며 성장해 가는 유미노스케의 앞길에는 무수한 사건과 풍파들이 닥쳐오겠지요. 상권 말미의 편집자 후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유미노스케에게 첫사랑도 겪게 해주고 싶기에' 미미 여사는 이 시리즈를 계속 쓰고 싶다 했다고 합니다.  

  

 실컷 진상(進上)부리다 뒤에 얼굴 싹- 바꾸고 나와서는 사실은 이러해서 그랬던 겁니다- 라고 말하는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도 그다지 멋지거나 아름다워보이거나 훈훈해 보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뜬금없이 훈훈하게만 마무리 지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도 그렇습니다. 전체적으로 개연성도 부족하고 산만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미미여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작품을 썼을까(출판사에서 직접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는 했지만), 어떤 상태에서 이 작품을 집필했을까 궁금해 집니다. 에도시대물 최고의 작품 '외딴집'까지 거론할 것도 없이, 전작인 '하루살이'만 해도 참 좋았는데 말이지요.   

  

 물론 이번 작품을 정말 재미있게 의미있게 읽은 분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저는 미미여사이기에, 무서운 사람의 마음을 현대물보다도 더 잘 보여주는 에도시대물이기에, 가슴을 파고드는 깊은 문장들과 버릴 수 없이 한껏 간직하고픈 훈훈한 장면들이 가득한 헤이시로-유미노스케 시리즈이기에 결코 적당히 만족하며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대치가 높았기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절대치에 견줘봐도 (그녀의 에도시대물 가운데서는) 결코 잘 된 작품이라 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실컷 지적질하면서 이건 별로다, 저건 그저 그랬다 하는 제 모습을 보면 미미여사나 출판사 입장에서는 '니가 진샹 밉샹이구나!'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동안 미미여사의 에도시대물이 너무 좋았기에, 미미여사 작품을 꼬박꼬박 계약해서 잘 내주는 출판사를 아끼기에 하는 말입니다. '버린 작품'은 책장 덮은 뒤에 눈에서 치워놓고 마음 속에서도 아예 싹 지워버립니다. 시간아깝게 공들여 서평이나 쓰고 말고 할 여지조차도 없습니다. 《진상》은 적어도 제게는 한쪽으로 밀쳐놓고 잊어버리기엔 못내 아쉽고 안타까운 작품입니다. 알랑가 모르지만 나름 애타는 제 마음이, 닿을랑가 모르지만 미미여사에게 가 닿기를 바라봅니다.  

 가볍게 잠시 읽으려고 책장을 펼쳤다가, 이거 생각했던 그런게 아닌 듯한 느낌인데 계속 읽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루가 꼴딱 지나있었다. 얼마전 인터넷상에서 유행했던 '문명하셨습니다~'라는 표현이 '궁극하셨습니다~'로 대체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을만큼 엄청난 가독성과 흡입력을 보여준 작품, 급작스레 찾아온 더위에 지쳐서 멍하니 책장도 잘 넘어가지 않던 힘겨움을 가뿐히 씻어내려준 작품, 바로 《궁극의 아이》다. 

  

 한국인 청년 신가야와 엘리스의 운명적인 슬픈 사랑, '궁극의 아이'의 비밀과 정체, 세계를 움켜쥐고 쥐락펴락하는 막후의 통치자들에 대한 음모론 등. 쉬운 문장과 빠른 전개, 차곡차곡 맞춰지는 퍼즐조각, 소재로 사용된 단편적 지식들이 채워주는 깨알같은 지식욕 등 정가 13,800원으로 누릴 수 있는 최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아닌가 한다. 요즘 영화 한 편 보는데 8~9천원, 어지간한 오락 영화 두세 편 보는 것 보다 이 작품 한 권 사 읽는 게 훨씬 더 큰 만족과 효용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작가이기도 하고, 이미 작가가 쓴 작품이 영화화된 전력도 있고(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이 작품 역시 영화화하기엔 그만인 소설이지만 웬만해선 영상화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애절하면서 슬프고 한없이 맑은 눈의 신가야를 누가 분扮할 것인가는 차치하더라도, 원작보다 뛰어난 영화는 본 기억이 없기에. 꼭 해야만 한다면, 정신없이 책장을 막 덮은 이 여운이 어느 정도 가신 먼 훗날에. 

  

 전체적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작품이고, 흥미진진한 소재와 얘깃거리, 애타는 슬픈 사랑도 담겨져 있기에 주변에 손쉽게 권할 수 있는 재미지고 멋진 소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일단 문체. 우리나라 작가가 쓴 작품이지만 흡사 번역투처럼 다가오는 느낌. 덕분에 영미 대작을 읽는 기분이 물씬 들기도 했지만 분명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 전체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표현과 문장들이 조금씩 거슬렸다. 좀 더 적확하고 깊은 표현, 곱씹을 만큼 멋지거나 감동적인 문장의 부재가 아쉽다.  

  

 그리고 특이하면서 흥미로운 소재와 이야깃거리들로 가득하지만 좀 더 본연적인, 가슴 깊이 파고드는 철학은 없었다는 점. 철저한 오락 소설에서 뭘 더 바라냐 하기도 하겠지만, 지극히 헐리웃스런 장면들과 대사들이 지나치게 재미있기도, 지나치게 아쉽기도 했다.  

  

 그 밖에 인물들이 겪는 위기가 생각보다 손쉽게 풀려가서 가슴 졸이는 시간들이 길지 않았다는 것과, 신가야 이 자식, 'O OO OOOO', 왜 이렇게 불친절해서 사람들 고생시키는거야~ 싶은 귀여운 불만 정도(?!). (동그라미 땡땡땡은 혹시라도 책을 읽거나 구매하기 전에 다른 사람 서평 읽어 보는 분들을 위해...) 

  

 생각지도 못한 소재들. 작품에 써먹으려고 준비한 여러가지 이야기들. 취재와 자료준비에 들인 공이 티가 나는 대목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 꿰고 엮어서 이 보배롭고, 재미있고, 멋진 작품으로 빚어낸 솜씨 역시 찬란하다. 딸려온 홍보 팜플렛에서 작가가 차기작 두 가지 정도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봤는데, 부지런히 바지런히 써서 세상에 내놔주길 손꼽아 기다려본다. 어지간해선 '궁극의 아이'를 뛰어넘는 작품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여러모로 '궁극의 아이'를 떠올리지 않게 만들만 한 작품이길 기대하면서. 

 누쿠이 도쿠로의 작품은 《우행록》과 《후회와 진실의 빛》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장르문학의 특성상 한 번 읽고 나면 재독하기가 쉽지 않은데, 두 작품 모두 반드시 다시 한 번 읽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미소 짓는 사람》은 전체적으로 《우행록》과 얼개가 비슷하다. 한 살인사건을 둘러싼 진실,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히 평판 좋은, 도저히 살인을 저지를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인물의 진면목을 쫓아 파고드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이야기.  

  

 이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이 나름 괜찮았고, 누쿠이 도쿠로라는 이름값도 있어서, 읽는 내내 이 이야기를 《우행록》과는 다르게 어떻게 결말지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느낌 비슷한 이야기를 또 썼을까 싶어 부지런히 책장을 넘겨 나갔다. 

  

 결말까지 다 읽고 보니 확실히 《우행록》과는 다른 의도에서, 어떤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썼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너무나 직접적으로, 너무나 노골적인 결말로 그것을 독자에게 '직접 가르쳐' 주고 있으니까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주제의식 하나만 보고 달리기에는 무척 부족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그건 이미 《우행록》이라는 제법 걸출한 작품이 있으므로, 중언부언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결말까지 '그런 식으로' 내 가면서 독자에게 '손수 가르치고' 있으니 분명 《우행록》과는 다르지만, 이걸 굳이 왜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쿠이 도쿠로라는 명성에는 못 미치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의도도 분명하고, 결말과 진실의 이면을 좇아 가는 과정은 분명 흥미롭고 즐거울 수 있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너무나 단순화 시키고 뻔하게 만들어놓은 전개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그래도 누쿠이 도쿠로니까, 그래도 뭔가 있겠지 싶어 다다른 곳에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매우 '독특'하기 그지없는 마무리만 덜렁 놓여있을 뿐이다. 그냥 《우행록》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나름 전하는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기도 하기에, 전혀 무의미한, 읽는 시간이 아까운 정도의 작품은 아니지만 《우행록》이나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같은 작품을 읽었다면 굳이 이 작품을 애써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늘 기대 가지고 신간 주목하고 있는 작가인만큼, 차기작은 좀 더 멋지고 훌륭한 작품이길 바라며, 모 소설 이후 정~~말 오래간만에 혹평 날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