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여행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
아직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을 보면 신기하고 설레기보다는
내가 가보지도 못한 곳을, 또 언제 가게 될지 모르는 곳을 굳이
뭐하러 보나..
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세계엔 어떤 멋진 곳이 있나 궁금한 마음에 설렁설렁 보기만 해도 될
것을
괜히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거나 여행지 최고 명소라고
알려진 곳을 보면
공부하듯이 외워서 알고 있어야 하는 기분이 들어서 가보기도 전에
질리고 지친다.
그래서 여행기는 별로 읽어본 적도 없고
여행하기 전에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공부하듯이 읽어본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라오넬라'라는 블로거가 책을 냈단다.
그것도 하필 내가 평소에는 잘 읽지 않는 여행산문집을...
좋아하지 않는 분야라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왠지 이분의 글은 같은 여행기라도 기존의 여행기와는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라오넬라, 새벽 두시에 중독되다>란 블로그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감탄했기 때문이다.
어쩜 이런 글들이 나올 수 있는지,
이렇게 슬그머니 마음을 건드리고 여운을 남기고
공감되지 않는 부분은 공감하지 않아도 좋은 부분으로 그대로 두어도
좋은,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그래서 결국 손에 들고야 말았다, <우리의
취향>이라는 책을...
<우리의 취향>이라니 여행산문집 제목이라기엔 뭔가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왜 이 제목이 나왔는지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고
또 이런 제목이었기에 역시 책을 펼쳐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국적도 없이 이름도 없이 직업도 없이 친근하길
바란다.
우리의 취향은 옅으므로 당신도 나도 많은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취향이 옅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떠나왔다는 취향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므로.
<우리의 취향>에는 보통의 여행기들처럼 유명한 명소라고
해서,
혹은 화려하고 예쁜 장면이라고 해서 찍은 사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여행지에서 만난 낯선 이들의 푸근한 웃음이 담겨 있고
왜 찍었는지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쓸쓸한 우체통이나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들,
특별한 것은 없어보이는 흔한 창문 따위가 찍혀 있다.
처음엔 그래서 신기했고 그래서 당황했으나 나중엔 그래서 마음에 남는
장면들...
이런 사진들이 이 책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책은 '관광'하면서 쓴 글이 아니라 '여행'하면서 쓴
글이다.
"나는 사는 것처럼 여행하고 싶었다.
그 나라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고 여행객 티를 벗어버리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친구들은 한동안 나더러 이상한 옷 좀 그만
입으라고 타박하기도 했다.
외국어를 발음할 때는 목소리가 변하길 바랐다.
기념품을 챙겨오기보다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주 마시는 차, 그
나라의 담배,
그 나라의 자주 쓰는 단어가 입에 배길 바랐다."
"어느 도시마다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라든지.
사진은 찍었지만 일 년이 지나고 나면 사진을 보아도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유물이라든지.
누군가 어디냐고 물으면 이름 말곤 꺼낼 이야기가 없는 곳이나
기구한 역사를 이야기해줄 수는 있지만 나의 역사는 없는 곳이
아니라,
이름에 온도와 냄새가 따라오는 사진.
나는 당신의 명함을 꺼내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여행을 가서 유명한 관광명소만 숨가쁘게 찾아다니고
기념엽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진들만 왕창 찍다가
정작 보아야 할 그 나라의 진면목은 보지 못하고
만날 수 있었을
사람들은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 아까운 일이 아닐까?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
나도 여행을 갔을
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책의 저자는 길에서 자랐고 다섯 살에 처음 버스를 탔고 열여덟에
영국으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여행이 아니라 잦은 이사"라고,
다른 나라에 가는 게
'집을 옮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여행해 본 경험이 많지 않고 그 흔한 나홀로 배낭여행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작가가 부럽고 신기하고 대담하게만 느껴진다.
여자 혼자서 하는 여행, 무섭지도 않나?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친해질 수
있지?
그러다 길이라도 잃으면?
하지만 작가는 담담히 대답한다.
"걸음은 호기심이지만 호기, 그러나 무엇보다 '믿음'이다.
사람은 아름답다는 믿음, 친하고 보면 다정할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여기까지 왔으므로 이건 내 경험을 건 믿음이다.
이건 때로 터무니없고 어리석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아는' 것들로부터 받아온 상처를
돌이켜보면,
그러고도 우리는 또 상처를 받을 것을 짚어보면,
그러고도 우리는 사랑을 하고 나는 한 걸음, 딛는다.
무섭지만 한 걸음, 무서워서 한 걸음."
"말을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매력적인 일이다.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으면 답답할 거라고 하지만 나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사랑스러워진다.
말로 치장한 내가 없어지고 마음만 남는다.
여행을 위해선 아주 많은 마음이 필요하다...(중략)...
어쩌면 내가 그동안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한 것이었다.
나를 보이기 위한 말, 내가 뱉은 말이 저들끼리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씩 그는 길을 잘 못 찾는다며 어렵게 말을 꺼내 얼버무리곤
했다.
길 같은 거야, 잘 못 찾아봤자 조금 불편한 정도 아니겠냐고 말해도
그는 부끄러워했다....(중략)...
나는 방향 감각이 뛰어나다거나 기억력이 좋다거나 하지도 않으면서
길을 잘 찾았다.
길을 잘 찾는다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를 데리고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그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닿는 도시에서 길을 잃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외국을 정말 외국인 듯 잠깐 스쳐지나온 느낌만 주는 그런 여행기가
아니라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나구나, 별다른 곳이 아니구나 싶다가도
진짜 조국을 떠나고, 떠나간 그 나라에 익숙해졌을 때에야 알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숨겨져 있는 여행기.
간혹 웃음도 나오고 조금 쓸쓸한 마음도 들고,
그래도 나도 한번 떠나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여행산문집.
나는 여행기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 취향의 여행기를 찾지 못했었던 거라는 걸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의취향,
여행기,
여행산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