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듯한 표지, 다소 촌스런 제목은 이 책이 꽤나 오래전에 나왔음을 암시하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책은 하루키가 무려 20년 전에 쓴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대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 ’상주하는 여행자’로서 보낸 시간들이 때로는 틈을 벌리며 때로는 촘촘하고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루키의 글이라고 하면, 다들 알듯이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심각한 상황이든, 재미난 상황이든 그의 목소리를 입게 되면 담담하게 받아들여진다. 포커페이스로 농담을 하거나, 심각한 상황을 무마하는류의 엉뚱함이 그에게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여행하는 동안에 덧입혀질 수 있는 과장이라든지, 감상이 많이 배제되었다. 일부러라기보다 특유의 힘을 좌악 빼고 편안하게 기술하는 그의 능력덕이다. 낯선 풍경도 과도한 감정의 분출없이 담담하게 일상적으로 묘사된다. 

그렇다고 해서 무미건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일상적인 묘사들이 소설가의 재치와 상상력으로 버무려지며 독특한 풍경을 창조해냈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재미있게 읽히는 것을 보면 하루키는 역시 소설가이구나 싶다. 

소설가가 쓴 여행에세이는 수도 없이 많이 나오는 여행기와는 확실히 차별화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들은 무슨 글을 쓰든 그들의 색을 입히기 때문에 여행정보가 아닌, 글 읽는 재미를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좋다. 

담백하고 솔직하며 마음 속에 가라앉아 찰랑이는 물결같은 그의 에세이는 그의 소설처럼 흥미롭다. 그로 인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경험의 종류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 즉 삶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거다. 

작은 것에서도 새로움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 아, 혹자는 이를 행복이라 했던가. 

1권의 리뷰를 우선 쓴다. 1권도 분량이 많아서 보통의 단행본 두께 이상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 작가 엄청난 필력의 소유자다. 억지부리지 않고, 막힌 구석도 없이 줄줄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하나의 완벽한 사건의 세계가 탄생했다. 그 세계의 거미줄망이 워낙 촘촘해서 정말 있었던 일인 것만 같다. 그 유명하다던 미야베 미유키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한 여자가 실종된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공원에서 잘린 오른팔이 발견된다. 처음 발견자는 예전 일가족 살해사건의 피해자였던 고등학생 신이치. 신이치를 둘러싼 이야기가 한웅큼, 그리고 실종된 여자를 둘러싼 이야기가 한웅큼, 사건을 둘러싼 형사들의 이야기가 한웅큼, 사건의 화제성을 둘러싼 언론과 취재원들의 이야기가 한웅큼. 그 '웅큼'의 이야기들이 서로 교묘하게 연관되며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발생한다. 그리고 확실치 않지만 주 용의자로 밝혀진 인물의 이야기가 2부에 펼쳐진다. 이처럼 스케일이 크면서도 디테일이 듬성듬성하지 않고 매끄럽고 끈적끈적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침없이 죽죽 읽어나가게 된다. 중간에 엉덩이가 아파서 몇 번 왔다갔다 해야했지만. 

1권의 이야기는 보통 사건의 시작부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기억해야 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특성, 배경에 의해 피로함을 느낄 법도 한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분량의 압박에서 오는 피로감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것을 상쇄할만큼 흥미진진했다. 아, 왠지 이렇게 '흥미진진'과 같은 상투적이고 가벼운 언어로 표현해서는 안될 것 같다. 우선 내가 다음장이 궁금해 디테일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진중한 태도로 읽었기 때문이고, 그런 가운데 작가의 문장 또한 안정된 호흡을 유지하며 무엇보다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정도의 설명으로 담담하게 사건을 묘사해나갔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소재를 가지고 적당한 온도로 차분하게 전체를 아우르는 눈으로 소설을 쓴 작가의 심정이 딱 이럴 것 같다.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깊이있게 보고 무엇보다도 그것에 관계한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아주 오랜 이야기까지 되짚어내는 솜씨는 놀랍고 곁가지 이야기 자체의 풍부함에 두번 놀란다. 

그 자체로 한 권의 소설로 마무리가 되어도(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점을 제한다면)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녀를 '대가'라고 불러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 그리하여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은 어떤 식으로 드러나게 될지 기대해본다.

우선 말해둔다. 별 평가는 단지 개인적인 기준일 뿐임을. 말하는 이유는 얼마전 별이 3개도 안되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별 네개 반을 속으로 매기게 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느꼈다. 

영화나 책이나.. 문화라는 건 개인적인 경험이 바탕이 되기에 누군가의 평가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그래서 웬만하면 책리뷰를 쓸 때도 별을 매기고 싶지 않지만, 그것을 안하면 페이지가 안넘어가니;;  어쨌든, <밑줄긋는 남자> 리뷰시작이다. 

# 구입기

이대 교보문고에 갔다가 문고본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다. 
(위의 사진은 문고본 등록된 것이 없어서 양장본으로 대체한 것임)
대학시절 친구가 읽던 책이었는데, 아마 그게 인연이 되어 오늘에 이른게 아닐까. 
가격도 무게도 가벼운 이 책은 휴대하기도 아주 편하고 같은 책이지만 
왠지 더 개인적인 느낌이 들어 낙서도 하고 줄도 긋게 되고..
밑줄긋는 여자가 되어 밑줄긋는 남자 탐험에 나서다. 


# 실망

전체적인 플롯으로보자면 좀 시덥잖은 내용이었다. 솔직히 읽어가면서 실망했다. 
주인공 여자는 너무나 사소하고 엉뚱한 경험들로 이야기를 채워가는데 
그것이 유쾌하거나 귀엽다기보다는 좀 답답하고 말이 안된다는 느낌이어서 
공감도도 떨어지고 책에 대한 호감도도 떨어졌다. 

책을 좋아하는 혼자 사는 여자가 도서관에 갔다가 책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 
그 밑줄이 마구잡이로 쳐진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점차 자신을 연모하는 남자인 것으로 착각하며 그 남자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의문점..

1. 우연히 빌린 책에 그어져 있는 밑줄이 어째서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2. 생각에 그치지 않고 점차 착각과 집착을 하게 되며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지. 

이런 점들은 그 여자가 상상력이 풍부하다기보다는 너무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간혹 유아적인 태도도 엿보였다. 


# 실망뒤에.

책을 좋아하고 공상하기 좋아하고 자유분방한 여자. 
캐릭터를 정의해놓고 보니 매력적인데, 왠지 그녀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감성이 풍부한 것은 알겠지만, 
그냥 그녀는 그 정도의 사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다.  
책 속의 그녀가 스물다섯살이라는 것도 아마 한가지 이유일수도. 
좀 더 풋풋했던 학창시절에 읽었더라면 좋아했을 수도 있겠다. 

# 밑줄긋기 

한마디로, 나는 집에 돌아오기 위해서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 p88

나는 당장 모든 것을 갖고 싶어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 p97

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일상사를 함께 했고, 나는 그에게 말을 걸 정도까지 되었다. - p106

프레슨 교도소 정면에 <맞은편보다 여기가 낫다>라는 이름을 가진 레스토랑이 있다. - p120

나는 성미 고약한 여자가 되어 가고 있었고 아무와도 다정하게 지내지 못했다. - p126

사람들은 용케 마음의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어떤 삶의 방식을 놓고 자신과 타협하고, 그것의 나쁜 면을 인정하되 좋은 면만을 보려고 애쓰면서, 아침마다 스스로를 달랜다. 다시 그것이 허사가 되면서 마음의 곡예는 계속된다. 내 삶이 바로 그랬다. 고통스러운 고독의 시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야만 할 시간이었다. -p127

서점 안에는 뭐든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이 탐탁지 않기로서니, 그게 무슨 상관이랴. 서점에 가면 다른 삶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지 않은가. -p128

우리가 뭔가를 착각한 게 틀림없으며, 두 개의 고독을 합친다고 해서 하나의 행복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음수(-)더하기 음수는 여전히 음수예요. 그건 수학이라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160

떠나가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게 여자의 마음인지, 그렇게 멀어져 가면서 그는 애잔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p161

사내란 모름지기 처음엔 차갑고 신비스럽게 보여야 미더운 느낌을 주는 법이다. 처음부터 꿀같고 캐러맬 같아서는 안된다 - p162


# 밑줄긋기 후에..

위의 밑줄은 책 전체보다 마음에 드는 구절들이다. 이렇게 발췌해서 적어놓고 보니 
이 책에 했던 쓴소리들이 미안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몇번의 밑줄만으로 책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