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은 꽤나 유명한 책인것 같지만 숱하게 스쳐갔을 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본작가의 공포물은 왠지 꺼려진다. 어릴 때 <링>을 본 충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선물받은 책인데, 제목만으로 너무 으스스해서 책도 제목이 눈에 띄지 않게 눕혀서 꽂아두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이런 망설임없는 예언적 제목이라니.

다섯개의 단편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되어있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시간의 마법사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날
돌 하우스 댄서
3시간 후 나는 죽는다
에필로그: 미래의 일기장

예상과는 달리(아마도 너무 rough 한 예상이었기 때문이었을테지만) 공포물은 아니었다. 인터넷을 뒤적뒤적해보니 <13계단>도 추리서스펜스 분류인가보다. <6시간..>은 추리서스펜스에 초자연적 현상을 가미한 부류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인 단편들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다. 미래를 예지하는 초능력자 ’야마하 케이시’라는 인물이다. 그가 하는 역할은 때론 크고 또 작지만 전체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어 야마하 시리즈라고 부를 법도 하다. 초능력자라고 하기엔 야마하 케이시 스스로 혼란스러워하는 처지라 계속된 시리즈가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여튼 한사람이 그 많은 사건과 사람들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를 만나러 가다 낯선 남자를 만나다. 그 남자가 경고한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고..죽음을 벗어나기 위한 미오와 케이시의 사투. 그리고 반전. 이 단편은 맨 마지막 ’3시간 후 나는 죽는다’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주인공이 같고, 이야기의 흐름도 비슷하다. 결론이 시사하는 바는 사뭇 다르지만. 

- 시간의 마법사 

힘겨운 일상의 반복. 과거의 꿈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시간의 마법으로 어린 시절의 나와 재회한다.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고 미스터리가 풀리며 나는 다시 힘을 얻는다. 흐뭇하고 찡한 이야기.
나를 살게 하는 건 나인가. 

- 사랑에 빠지면 안되는 날 

길에서 남자가 차에 치인 장면을 목격하는 여자. 그리고 놀란 여자를 달래주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진정한 사랑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여자는 남자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반전 그리고 슬픔. 사랑에 빠지면 안되는 날에 사랑에 빠짐으로써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 

- 돌 하우스 댄서

댄서의 꿈을 꾸는 여자.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은데. 꿋꿋하게 살아가는 여자의 생을 누군가 미리 예상이라도 했듯 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해놓았다. 그것도 20년전에. 운명적인 만남.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전시. 마른 햇볕을 받으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춤을 추는 여자의 모습이 오래도록 여운에 남았던 작품. 그리고 가장 애착이 가는 주인공이었다. 

- 3시간 후 나는 죽는다

첫 단편의 케이시와 미오의 5년만의 재회. 그리고 케이시의 예지력은 그가 3시간 후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데..다시금 그들의 합동수사가 시작되고 여지껏 빗나간 적 없는 예언은 점차 그들을 궁지로 모는데..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만큼 긴장감이 가장 고조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론이 결국 이 책의 주제를 드러낸다. 


예지력이란 운명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모든 것은 운명에 달려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그 가치가 줄어든다. 어떻게 하든 운명에 휘말려들게 되므로. 야마하 케이시의 예지력은 운명론에 힘을 실어준다. 모두가 예지를 피하지 못했고,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가 오히려 운명에 다가가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그저 휩쓸리는 존재일 뿐일까. 신의 주사위에 따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존재일 뿐일까. 

그 답은 마지막 단편에 나와있다. 예상가능한 답이지만 어쨌든 가장 좋은 답이다. 다만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좀 허무하다면 허무할 수도 있겠다. 

추리서스펜스답게 빠르고 재미있게 읽히고 간혹 감동도 있다. 단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단편을 이어주는 야마하 케이시라는 인물 덕분에 전체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고, 각 이야기도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지녀 읽을만했다. 그냥 흥미위주로 읽기에는 좋은 책이다. 

그러나 작가의 세계관이나 역량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13계단>을 읽어보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이 책에서 작가의 의도는 알겠지만 그것이 충분히 구현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럭저럭 재미있기는 한데 뭔가 미진한 느낌이다. 황금가지의 책이니 다음에 믿고 읽어봐야겠다. 

인간보다 인간다운 개 엔조의 이야기다. 
그의 주인은 데니. 그리고 와이프 이브, 딸 조위. 이렇게 총 네가족이 알콩달콩살아간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스포일러)

이브가 병에 걸려 죽고 이브의 부모님은 조위에 대한 양육권 소송을 벌인다. 
친부인 데니가 당연히 유리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데니는 위기에 빠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조위와 함께 살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다. 

엔조는 이 과정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다. 
이브가 아프기 시작할 때 냄새로 병을 미리 알았고, 
그녀가 누군가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가만히 머리를 내어주었다. 
레이스광인 데니는 집을 떠나있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엔조는 충직한 보디가드처럼 가족들 곁에 있었다. 

데니는 엔조와 함께 위기를 헤쳐나간다. 
가장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자신이 터무니없는 사건에 휘말려 고소를 당하고, 딸을 잃을 위기에 처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엔조는 개이지만, 인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고 있으며, 
데니를 위해서 늙고 아픈 몸으로 계속 삶을 버틴다. 
버티다못한 데니가 조위를 포기하려 할 때 
결정적으로 그를 도왔던 것도 엔조였다. 

인간과 개의 우정과 사랑. 
굉장히 평범한 이야기 같다. 
처음에도 느슨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에는 사소한 일상들이 펼쳐지고, 개가 보는 데니의 생활, 즉 인간의 삶에 대한 관찰이 이어진다. 

홀로 자유롭게 살았던 데니가 가족을 이루게 되고
엔조가 이브의 병을 먼저 눈치채는 순간부터 위기가 시작된다. 
위기가 점점 심해질 수록, 데니가 더 궁지에 몰릴수록 이야기의 몰입력은 강해진다. 

챕터 중간중간마다 레이싱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레이싱은 인생과 같다.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고,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완주라도 해야 한다. 
데니가 좋아하는 말은 "눈을 두는 곳으로 차가 간다" 는 것.
마치 인생의 비전을 말하는 것도 같다. 

레이서인 작가의 애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책이다. 
빗속에서 질주하는 법은 인생에서 고난을 만났을 때 헤쳐나가는 법을 의미하고
이를 데니의 위기와 극복의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감동적인 부분은 역시, 누구라도 포기하고 싶을 상황 속에서 
데니가 이를 대처하는 방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처럼 대처할 수는 없기 때문에 
데니처럼 강한 사람을 보게 되면 감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된 후 ,

엔조는 꿈을 꾼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마지막 엔딩 부분이 특히 감동적이다. 
아.. 엔조! 결국 해내는구나! 인연이란 소중한 것이고, 
고난을 극복해냈을 때 더 큰 감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선한 인간 (혹은 동물)의 강함이란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만큼 선하고 강해지길 바라며, 
그리하여 감동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길.. 
이야기 속의 데니나 엔조처럼. 

이런 느낌의 책은 내 가슴 깊은 곳, 아주 가끔씩 들춰보거나 혹은 가끔씩 원치않게 들춰치는 부분과 공명한다.  기저에 깔린 정서는 어둡고 배경은 하야며 달리의 늘어진 시계처럼 사람의 눈을 하고 있기도 하고, 모래사막이 한없이 펼쳐져 있기도 하는 무의식의 세계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팀버튼 감독의 영화가 생각났는데, 모자라고 고장난 인간들의 향연이라 할 수 있을만큼 기괴한 화려함이 그의 영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표지뿐만 아니라 책 속 간간이 삽화가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이런 류의 동화스러운 책은 안 읽은지 한참 되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보다 작가의 정서가 흔치 않은 데가 있어서, 말했듯이 어두우면서도 화사한 모순된 면이 흥미롭게 읽혔다.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단어 사용이 상투적이지 않고, 비유가 신선했다. 문장은 다소 어눌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나 인공시계 장치를 심장삼아 살아아야 하는 주인공과 그가 목숨을 걸고 사랑한 한 소녀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태어난 언덕 위 마녀의 성이라든지, 그를 키운 산파이자 마술사역할을 하는 여자, 그가 반한 노래하는 소녀.. 이 소녀는 눈이 나빠 커다란 안경을 쓰고 다니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소녀가 시력이 매우 안 좋고, 서커스단을 따라 노래하러 다닌다는 설정이 작가의 취향을 반영한다. 

주조하는 정서는 어둠이되, 그 안의 밝음이, 끝없이 불타오르는 인공심장을 가진 청년의 사랑처럼 활활 빛난다. 그래서 끝까지 소년의 사랑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뿐인 세상, 약점을 잔뜩 지닌 이 작은 생명체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니만큼 성공하기를.. 

그다지 상투적인 결말은 아니다. 예상은 독자의 몫.

동화스러운 책들에서는 상징들이 책을 즐기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므로, 좀 더 예민한 독자라면 작가가 사용한 상징들을 몇 개 발견해낼 법도 하다.  나로서도 몇 가지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을 당시 마음이 조급증에 걸려 좀 더 깊게 읽지 못했다.  다음에 느긋한 마음으로 한번 더 읽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