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필연적으로 ’이적’이라는 이름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가수가 책을 냈다. 그것도 소설을?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 기본은 예술적 영감일테니 
싱어송라이터가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그리 이상할 이야기는 아닐터. 
여전히 가수는 가수, 소설가는 소설가, 화가는 화가. 라는 식으로 
편협하게 틀지워져 있는 사고는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좀 타격을 입었다.  
처음 이적이 책을 냈다는 소리를 듣고, 
평소 그의 세계가 그리 시시하지만은 않다고 느껴왔던 나로서는 
책의 내용도 성과도 졸속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는데, 

예상이 맞은 셈이다. 반쯤은. 
그의 상상력은 책 맨 뒤 소설가 김영하가 평했듯이 서양 고딕문화의 그로테스크함을 닮았다.밝고 달달하고 감각적인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표지를 보자마자 깨어날 것. 음침한 초록색과 장화를 신은 고양이의 섬뜩함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그대로 나타낸다. 보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상상력이 기발하다보니 그런 듯.  그러나 ’나무’의 참신한 재미와는 달리 공포+ 기괴함 을 합친, 좀 더 일그러진 세계를 보여준다. 최대한 현실에서 멀어짐으로써 현실을 조롱하는 화법이 보여 슬며시 웃음도 나왔다. 

여러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몇 편은 길고, 몇 편은 짧다.
취향의 문제인지 재미있다기보다는 흥미롭다 정도. 
이 이야기들은 그가 틈틈이 홈페이지에 써둔 것이라고 한다.
책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책읽는 자들의 최종 목표는 책을 쓰는 것일까 라는. (사족이고.)

그의 상상력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발휘되는 듯하다. 
처음엔 생각보다 시시하네 싶다가 뒤로 갈수록 어랏? 싶은 느낌이 들었으니. 
여러 편 중 가장 짧은(?) 3p 짜리 ’독서삼매’ 가 가장 인상깊었다. 
다른 편들은 어디서 본 듯도 했는데, 이 편은 상상력이나 으스스한 소름조성면에서 
가장 후한 점수를 줄만. 독서삼매에 빠진 아내와 그 책의 마력을 ’나’의 시각에서 쓴 것인데

와우~ 훌륭해!

이야기들은 전반적으로 세련되었다. 가끔 사건의 연결이 어색한 면이 있지만 튀지는 않는다. 삽화와 이야기가 잘 조화를 이루어 이적을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소장가치도 있을 듯하다. 예상을 빗나갔던 건 2가지, 
생각보다 이야기를 잘 쓴다는 것, 그러나 생각보다 상상력이 기발하지는 않다는 것. 
모든 건 주관인 ’생각’을 기준으로 ’~보다’이니 어디까지나 내 취향대로..

그래도 그 ’독서삼매’이야기는 괜찮았어. 그것만으로도 뭐. 

하나더, 그의 이야기는 사회비판적인 성격이 강하다. 
위에서 말했듯 현실에서 가장 먼 이야기 장르를 통해 현실을 꼬집는 태도가 생각보다, 세련되었다는거지. 이 점에서 별 하나 더 주어야겠네.

# 수록작

활자를 먹는 그림책/ 음혈인간 / 외계령 / 제불찰씨 이야기 / 고양이 / 자백 / 잃어버린 우산들의도시 / 지문사냥꾼 / s.o.s / 모퉁이를 돌다 / 독서삼매 / 피아노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했으나 눈치빠른 독자라면 알아차릴 수도 있음)

손쉬운 적(敵)은 눈에 보이는 적이다. 
치명적인 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다. 
우리를 호시탐탐노리는 이 적(敵)은 포마드 기름으로 머리를 정돈한 뒤 유유히 다가와 말을 건다. 그는 뜬금없이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얼이 빠져 듣고 있을 때쯤 당신은 이미 그의 포로가 된 것. 그것의 적의 화장법이다. 그 화장에 속지 말기를.

 

# 아멜리 노통, 그녀의 작품은 불편하면서 편하다. 

우선 대개의 작품들이 짧아서 간편하게 읽을 수 있다. 고도의 집중력이나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나는 가끔 기분전환 삼아 그녀의 소설을 읽곤 하는데 읽을 때마다 그녀의 재치는 어김없이 발휘된다. 책에 메시지를 담는다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일부를 떼어 책을 만든다는 느낌이 들만큼, 노통의 작품에는 그녀의 매혹적인 숨결이 짙게 배어있다. 기분전환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글에는 사그라지지 않는 날카로움이 있다. 속으로부터 갈고 닦은 칼을 매번 휘두르니 피하지 않으면 슬쩍 긁히고 만다. 칼끝에 벼려진 광기가 그녀가 책을 쓰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로 그점이 불편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 이 소설은 ’대결’에 관한 것이다.

이유없이 연기되는 항공스케줄에 툴툴대며 공항에 발이 묶인 사람이 있다. 제롬 앙귀스트. 앙귀스트는 어원을 따라가보면 anguish, 즉 불안, 고통의 의미. 뜬금없이 나타난 사람이 귀찮게 말을 건다. 무시해도, 대놓고 핀잔을 주어도 아랑곳않는다. 철면피 방해꾼의 이름은 텍스토르 텍셀.  이름의 어원은 text 로, 잘 직조된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피해자와 이유없이 공격해오는 가해자, 이 둘의 대결로 탄생한 작품이 이번 소설이다. 묘사는 거의 없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화로 진행된다. 

- 대결의 당사자 

텍스토르 텍셀은 거대한 악의 덩어리다. 그에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반드시 하고 마는 성미이다. 자신의 쾌락이 최우선인 그는 달변가이기도 해서, 그의 말을 듣다보면 모조리 말이 안되는 것 투성이인데도 자꾸만 빠져들게 된다. 

제롬 앙귀스트는 평범한 비즈니스맨으로 적당한 규범과 사회화과정을 거친 인물이다. 그는 상식을 가지고 가해자의 말을 반박하지만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그를 멈추게할 도리가 없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어떤 짓을 해도 이 기괴한 행위를 그만두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어쩌면 모든 사건의 전말을 내면으로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나의 적은 당신인가. 

대화가 진행되면서 피해자 앙귀스트는 기막힌 사실을 발견한다. 우연한 장소와 시기에 만난 두 사람이 알고보니 이러이러한 인연으로 이미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더라는 것. 이 때부터 단순한 방해꾼이었던 텍스토르 텍셀은 질긴 악연의 ’적’이었음이 드러나고 ’적이 누구인가’에 대한 끈질긴 의문이 시작된다. 

적(敵)은 누구일까? 앙귀스트는 평범하고 죄없는 소시민에 불과한 것일까? 텍스토르 텍셀은 일개 정신병자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시점에 가서 내공이 있는 독자라면 결론을 예측할 만하지만 예측했더라도 죄의식에 관한 짧고도 상징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재미있다. 

# 결론은.. 

꽤나 철학적이고 상징적이다. 결론을 말해버리면 大스포일러가 되어버리므로 이쯤에서 마치기로 하고. 사람은 무의식중에 타인뿐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홍미롭게 보여준다. 가볍게 읽고 둔중한 충격을 받게 되는 소설이다.  

# 주의할 점 

이 책을 읽을 것이라고 정했다면 책의 표지는 보지 말 것. 표지의 홍보성문구의 목적은 전혀 관심없는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것 뿐, 정작 관심있는 독자들에게는 책을 읽을 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문이 분분한 책이라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었다. 일독하고, 다시 한번 일독을 시도했으나.. 아마도 사람에게는 각자 뜯어먹을 풀잎이 따로 있는가보다. 책 속에서 상민과 영교가 어쩔 수 없이 촐라체의 빙벽에 맞서게 되는 것처럼. 나에게도 결국 이 책을 읽다 읽다 포기한 것이 내가 좋아한 풀잎이 아니었다는 말로 변명이 될지. 

상민과 영교는 이복형제이다. 어머니를 뺏겼다고 생각한 상민의 애증이나, 집안이 무너지고 절망속에서 불러도 오지 않았던 형에 대한 영교의 애증이나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함께 촐라체를 오르는 것이다. 단촐한 차림으로 촐라체의 위력을 깔보았던 그들의 여정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까지 이르게 된다. 인간의 손을 벗어난 상황에서 그들은 비로소 가장 인간적인 선택을 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박범신의 문장은 굉장히 무겁다. 한 문장도 가벼이 읽히지 않고, 그래서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 어떤 깊이까지 독자들을 데리고 쑤욱 데려가는 느낌인데, 그것이 독자들에게는 결코 쉽지만은 않다. 작가식으로 말하자면 설면이 너무 미끄러워 쉴새없이 미끄러지면서 피켈피크라도 박아넣어야 하는데, 영 힘이 모자라 제대로 박히지 않고 천미터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크레바스 속으로 추락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등반용어들이 어렵다. 피켈, 하켄, 아이스바일, 오버행, 크레바스, 걸리, 아이스스크루, 비박 등등.. 용어들이 어려워서 책의 맨 뒤쪽에 나와있는 용어설명을 한동안 뒤적이며 읽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러나 읽어도 잘 머릿 속에 그려지지는 않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등산이란 뒷산오르는 것밖에 안 해본 사람들이라면 설명만 읽고는 알 수 없고, 책을 읽어가면서 상황과 엮어가며 짐작해야 할 것이다. 

빙벽을 타고오르는 과정이 내내 그려지는 소설이니 용어에 대해 허술하게 넘어가게 되면 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에 일독했을 때 대강 넘어가고 나니, 다 읽고나서도 피켈을 빙벽에 꽂아넣는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이 제대로 다가오지 않았다. 다행히, 일독 후 우연찮게 <버티컬 리미트>라는 영화를 보게 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역시 다시 한번! 백문이 불여일견이로구나. 책을 읽은 후라 영화를 보면서의 감회도, 후에 다시 이 책을 재독했을 때의 감회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읽다보면 용어도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서서히 그림이 그려진다. 상민과 영교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빙벽을 오르는 외면과,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내면의 풍경이 충돌하며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서로를 부정하는 이들의 마음은 위험을 마주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추락의 위험이 있을 때 로프를 끊어 아래있는 사람을 떨어뜨림으로써 다른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는, 상민과 영교 모두 동의한 '모럴'을 발휘해야만 하는 순간이 발생한 것이다. 

삶을 걸고 도박을 해야만 하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상민과 영교는 비로소 선택의 결과보다도 선택 그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서로가 죽든 살든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갖는 무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상민은 과거 그러한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었다. 상민의 정신적 지주였던 선배 형주는 스스로 줄을 끊어 상민의 목숨을 구했다. 그가 천길 낭떠러지로 부딪혀 인형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기억하는 상민은 한동안 산을 끊었었다. 그리하여 결심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영교와 살아돌아가겠다고. 

새삼 그들의 선택에 가슴이 찌르르하게 울린다. 물도 입에 한모금 못대고, 배도 못채우고, 빙벽을 깎아 엉덩이만 걸치고 잠을 자는 극한의 상황에서 오히려 '인간성'을 발휘하는 그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선택이었을지 인간의 힘을 초월한 선택이었을지는 머리로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빙벽에는 죽음의 역사가 있다. 촐라체에도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죽음들이 도처에 있다. 사업에 부도가 나 산으로 쫓겨온 한 남자는 크레바스 속에서 못다한 말들을 삼키고 죽어간다. 사랑해. 라는 말과 가족들의 이름들을 남기고. 상민은 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구해 가족들에게 전해줌으로써 형주에 대한 길고 긴 죄책감과 상처를 씻어낸다. 

그들은 돌아온다. 함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생사의 기로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남아있음을 깨닫게 된 그들. 그래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감히 생각해본다. 그런 위험을 극복한 터에, 세상 그 무엇이 두려울까. 

촐라체.. 히말라야를 방황했다는 작가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작가의 생에 대한 무거운 고민과 성찰이 녹아있다. 몇 번 이고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 무게가 마음을 뒤척여서. 온전히 떠안기에 내공이 부족하다. 두번째 읽을 때에는 용어나 산악환경에 대한 어중이떠중이 지식을 습득하고 읽어서인지 처음보다 편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읽다가 잠시 치워두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일어나는 장소는 분명 현실 속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판타지보다 더 판타지같다.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는 행위는 생에 흔치 않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닐지. 등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거대한 벽과 마주하는 순간의 감격과 공포를 느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더 지나 언젠가는 이 작품을 감당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꼭 한번 더 읽고 싶다. 지금 내가 뜯어먹을 풀잎은 아닌 것 같아, 그러니 잠시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