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는요,공부하기 어려워서 다들 쩔쩔매는데요.오죽하면 수능 사대천왕에 들겠어요? 아아,정철은 정말 싫어." - (11쪽)

이제 고등학생이 된 훈이의 형이 하는 이야기다. 그럴 것이다.요즘 애들이 정철의 가사를 이해하기란 좋아하는 게임에서 100연승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리라. 도대체 이런 아이들에게 어떻게 우리 고전문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고 지은이는 많은 고민을 하였나보다. 어렵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관동별곡>을 이처럼 재미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다니.

아빠를 따라 유적 답사를 나선 초등학교 6학년 훈이는 우연히 시골 장터에서 두루마리 그림 한 점을 손에 넣는다. 멋진 산수화 속에는 웅장한 폭포도 있고, 소를 타는 아이도 그려져 있다. 훈이는 너무나 사실적인 그림에 눈을 떼지 못하고 들여다보다가 알 수 없는 강한 힘에 이끌려 그림 속의 세계로 빠져 든다. 그림에서 보았던 폭포 앞에 떨어진 훈이는 구경 나온 할아버지 일행을 만나 함께 길을 떠난다.(요약분 인용)

함께 길 떠나는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금방 밝혀지는데 바로 송강 정철이다. 훈이는 그림속의 화룡소에서 용이되지 못하고 있는 이무기를 만나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야만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그 소원이란게 가문 땅에 내리는 봄비라는 사실은 참으로 고마운 이야기다. 물로된 용(이무기)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 땅의 백성들이 원하는 비로, '삼일우(三日雨)라고 하지.사흘간 흠뻑 내리는 은총의 비,시든 풀을 살리듯이 백성을 일으켜 세울 비'(155쪽)인 것이다.

그림 속의 산, 금강산에서 훈이는 친구 창이도 만나고 친절한 사람들도 만나고 송강 정철 어른이랑 함께 유람도 다니며 구석구석 관동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고 그리며 간다. 이야기 중간중간 삽입된 그림은 옛그림의 정취를 충분히 뿜어내면서도 다가서기 쉽도록 고운 빛깔로 채색되어 있어 읽는 동안 나도 같이 유람하는 기분으로 함께 걸어간다.

절경을 만날 때마다 읊조리는 송강 어른의 말씀은 바로 <관동별곡>의 구절들이다. 이 글은 송강의 <관동별곡>에서 주요 구절들을 기막히게 발췌,짜깁기하여 멋드러진 유람기로 풀어놓았다. 이 유람하는 이야기 자체가 <관동별곡>의 산문화된 글인 것이다.

이야기 한자락을 만나보자. '혈망봉'봉우리를 바라보며 송강 어른이 노래하신다.

하늘에 치밀어 올라 무슨 일을 하소연하려고

천만 년 지나도록 굽힐 줄을 모르는고? (82쪽)

노래한 뒤 이 내용을 다시 풀어주시는데

"백성들이 하늘에 대고 할 말이 많은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니 그런 표현이 나온게지. 살아도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언제 한 번 펴질 것인고?"(82쪽) 라고 말씀하신다. 관찰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백성들 사는 것도 보면서 가는(53쪽)데 이처럼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관리라니..참 오랜만에 만나본다. 일만 이천 봉우리를 바라보며 인재를 희망하는 송강의 모습에서는 제대로 된 관료를 만나는 것 같아 더욱 가슴 설레었다.

사람은 남겨 두는 게 있어야 사는 힘이 되느니라(117쪽)

동해에서, 함께 오지 못한 친구 창이를 아쉬워하는 훈이에게 송강이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여기서는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 수 없는 인생을 달관한 지혜가 느껴진다.아쉽게 남겨 둔 것이 힘이 된다니… 화룡소에 비구름은 송강의 도움과 훈이의 노력으로 이뤄져 비가 내리고 이무기는 용이되어 승천하는데 왠지 코끝이 찡해왔다. 송강의 가사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하다니, 스스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 책은 초등 고학년을 위하여 쓰여진 동화이긴 하지만 나같은 이도 읽으면 감동할만큼 잘 짜여져 있다는 예기이다.이야기의 구성만 놓고본다면 가사 구절의 적절한 배치등은 2007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바람의 화원]에 어깨를 견줄만하다. 그리고 각 이야기 꼭지마다 들어가는 부분에서 왼쪽 윗부분을반쯤이나 비워두어 자연스레 여백의 효과를 가져오는데 이야기를 즐기기에도 편하고 나중에 나오는 그림과도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뒤에 <관동별곡>전문을 현대어로 옮겨놓은 것도 맘에 든다. 한마디로 탐나도록 잘 만들어진 책,'소유하고 싶은 책'이 바로 이런 책인 것이다.

끝으로 도인과 송강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표현 한자락만 더 듣고 가련다.

남자는 술잔을 들어 밤하늘에 걸린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북두칠성 술잔입니다." 남자가 송강 어른에게 술잔을 건네더니 이번에는 술병을 들고 바다 쪽으로 쑥 내밀더니 말했다."푸른 바다 술,창해수(滄海水)올시다." 남자가 송강 어른에게 술을 따랐다.송강 어른이 잔을 받아 술잔을 죽 들이켰다. (143쪽)

북두성(北斗星)을 기울여 창해수(滄海水)를 부어 내어

저 먹고 날 먹이거늘 서너 잔을 기울이니 (<관동별곡>전문에서,192쪽)

결국 또 책에 취하고 말았다.

2008.1.27. 새벽 어스름

들풀처럼

 

이 책은 MBC 국제 뉴스이자 미니 다큐 프로그램인 W 중에서 어린이 인권관련 코너를 모아 이야기로 재창작한 모음집(뒷표지에서)으로 세계 여러 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의 실화를 담아 전하고 있다. W라는 뉴스프로그램은 가끔 보지만 집중보도와 다큐형식의 탐사로 깊이 있고 진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보도 내용중에는 이 책의 이야기들처럼 가슴아프고 눈물나고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어 오히려 즐겨보기를 꺼려했던 프로이다.

이 책에는 <아프리카의 마녀사냥>을 비롯한 다섯 꼭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아프리카의 마녀사냥>에는 마을의 잘못된 풍습으로 희생양 역할로 죽거나 쫒겨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다뤄진다.이야기 속의 가나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집안이나 마을에 불행한 일에 대한 희생양으로 아이들을 처단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하니 참혹한 현실이다. 다행히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회단체 소속의 사람을 통하여 살아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도 이 시각,지구촌 어느 곳에서는 아이들이 잘못된 믿음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태국의 꽃 파는 아이들>은 우리네 고속도로 정체지역의 뻥튀기 장수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8,9살의 꼬마들이고 이 아이들이 놀고 있는 부모를 대신하여 꽃을 팔러 정체된 도로에 나선다.그리고 사고로 죽거나 장애를 입기도 한다. 부모들은 게으른 탓도 있지만 다른 어떤 일을 하는 방법을 몰라 하루 종일 집에서 꽃을 포장하고 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가까운 태국에서조차 이런 일이 아직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과 그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아이들을 통하여 다가올 앞날을 생각케 한다.

<빚의 노예,인도 아동 담보 노동>은 심각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태국과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아이들의 노동강도와 시작하는 나이- 심지어는4 5살부터 - 담보대출의 이자밖에 못갚는 힘든 일들을 하고 있으니…정말 부끄럽고 또 참혹한 일이다. 태국과 인도의 두 사례는 각 나라의 정부에서 제대로된 의지만 있다면 많은 개선을 빠른 시간내에 이룰 수 있는 일들로 보이지만 관료들의 부패란 세계 어느나라든 공통적인 것이라서..참으로 힘든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빈민을 위한 은행이 이 난국의 효과적인 개선책일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시스테마>는 그나마 밝은 이야기라 힘이 좀 나는 편이다. 베네수엘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30여년 전부터 빈곤,마약,범죄 속에 뒹굴고 있는 청소년들을 주차장에 모아 놓고 악기를하나씩 주면서 연습을 하도록 하고,무료로 레슨도 하였는데 이 제도가 '시스테마'라고 불리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현재 베네수엘라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등 단원들의 85%가 빈민층 출신으로 이뤄져 꿈을 이루고 빈곤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환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실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케냐의 조혼 풍습>에서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지참금 대신 팔려나가는 어린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부모들에게 신부를 판매!하는 대금은 가난 탈출의 유일한 탈출구이며 아직도 일부다처제가 인정되는 아프리카의 풍습때문에 조혼은 더욱 없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비참하게 느껴진다. 다행히 꿈을 찾아 길을 떠나는 아이들이 있고 이를 지원해주는 비정부조직(NGO)이 있어 이 척박한 곳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이야기 속에서는 한국의 NGO 굿네이버스에서 운영하는 직업교육센터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액이지만 딸과 나의 이름으로 매월 기부를 하고 있던 차라 반갑고 고맙기도 하였다.

이상 살펴본 이야기들은 어쩌면 새삼스럽지도 않은 어린이 인권의 말살 현장일 것이다. 아직도 세계의 많은 곳에서 이와 비슷하거나 더 한 일들이 아이들에게 벌어지고 있을터이니..그래도,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지레 겁을 먹거나 꿈을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과 정성을 모아 나눈다면 더 많은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굿네이버스 홍보대사 변정수,뒷표지에서)이니까.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니까.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 [코뮨주의 선언: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에서 (고병권,이진경 등저)

2008. 1.27. 해 뜰 무렵, 올해도 1% 나눔 실천을 다짐하며….

들풀처럼

이번에는 홍길동이다. [김만중이 들려주는 구운몽]이야기를 들으며 옛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고 새롭게 읽혀질 수 있구나 느끼게 해 준 "세상모든 책"에서 출간된 [허균이 들려주는 홍길동전]을 읽었다. 이 책 역시 원저자인 허균이 태어나서 자라고 이 책을 짓고 이야기의 내용까지 들려주고 죽을 때까지를 스스로 이야기하게 하고 있다. 이 방법을 통하여 허균이 '홍길동전'을 쓰게 된 시대적 배경, 이야기가 전개되는 목적 등을 추정토록 하고 있어 초등 고학년이면 읽고 즐길 수 있도록 잘 구성되어있다.

'뜻한 바가 이뤄지지 않을 팔자'이나 글'재주가 워낙 뛰어나서 그 이름이 후세에 널리 전하여질 것'(8쪽)이라는 사주풀이를 받은 허 균은 양반가의 3남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놀라운 사실은 그는 서자(서얼)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기억속에 허 균이 <홍길동전>을 쓴 것은 서자였던 자신의 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라고 저장되어 있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 제대로 <홍길동전>을 읽지 않은 채 서자출신 홍길동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알려져 오다보니 그리 생각하였던 것 같다.

타고난 문장가의 자손이지만 인생의 굴곡이 많아 차례차례 가족들을 잃어가며 그는 인생의 쓴 맛을 알게되는데 그의 글 스승인 손곡이 서얼출신이라는 데서 <홍길동전>의 모태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임진왜란을 지내며 아내와 아이도 병으로 잃고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입궐했다가 귀양을 가는 등 파란만장한 2,30대를 보낸 허균은 마흔살이 다되어 다시 파직한 뒤,전북 부안의 별장 '정사암'에서 서얼들이 차별받는 생각을 하며 [홍길동전]을 만든다.

[홍길동전]이야기는 익히 알던 바와 크게 다른 부분이 없으나 여기서도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으니,시대적 배경이 세종대왕 즉위 후 15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성군인 세종 시절임에도 '활빈도' 홍길동의 이야기를 쓸 수 밖에 없을만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는 것이다. 11살에 이미 '각종 병법에 통달하고,귀신도 알지 못하는 술법을 익히며 구름과 바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귀신을 부려서 신출귀몰하는 기술을 깨달으니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78쪽) 다. 그는 결국 서자 출신의 설움과 차별 속에 세상을로 나가서 부정부패로 만연한 고을 수령들을 징죄하고 나중에는 임금과 협상을 거쳐 병조판서에 까지 오르고 율도국을 건설하여 왕의 자리에 까지 오른 뒤 나중에는 죽어 신선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다.

'비록 천하게 태어났으나 평생에 품은 원한을 모두 풀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의 우애를 두텁게'(137쪽)한 홍길동의 이야기는 여러가지 곡절 많은 삶으로 가족과 제대로 된 행복한 생활을 해보지 못한 허 균의 소망이 듬뿍 담겨 있다 하겠다. 그리고 그 스스로 정치를 하며 느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하려는 바람도 실려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관료들의 부패가 민생을 피폐하게 하고 괴롭힘은 변함없는 사실이라는 부분에서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결국 광해군 시절 역적으로 몰려 굴곡많은 생을 50세에 마감하는 허 균의 이야기는 아까운 인재들이 역사속에서 얼마나 많이 스러져갔을까를 다시 한 번 생각케한다. 그의 글솜씨를 생각컨데 제대로 수명을 누리며 글을 썼더라면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이 우리 곁에 전하여질 것인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 죽음이다.

[구운몽]처럼 잘 짜여진 구성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우리 이야기이다. 다만 이 책에는 <감수>를 통한 시대상황과 이야기를 읽는 눈을 이끌어주는 이야기가 없어 어린이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겠다.

2008.1.27. 새벽 3시

들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