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말 그대로 버닝해서 읽었던 작가였으나 한동안 의도적으로 읽지 않고 있다가 다시 김영하를 만났습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감탄하며 읽었지만 '검은 꽃', '빛의 제국'에서 나름 실망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번 소설도 큰 기대없이 접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습니다. 정말 가독성 하나는 짱입니다. 이것이 작가 김영하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할 것이고요. 모든 작품을 언급하기는 그렇고 일부 작품에 대한 인상만 정리하겠습니다.
표제작인 '오직 두 사람'.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다툼. 만약 제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자가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면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수십 년 동안 언어의 독방에 갇힐 수도 있을 테니까. 그치만 사소한 언쟁조차 할 수 없는 모국어라니, 그게 웬 사치품이에요?'(12쪽) 그리고 이어지는 독특하면서도 정말 낯선 부녀의 관계. 아버지는 평생 3자녀 중 오직 큰딸만을 독특하고도 기이한 방식으로 사랑합니다. 물론 그것은 사랑을 가장한 구속이자 억압일 수도 있지만요. 딸 역시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결국 부녀는 다른 가족을 멀리하고(혹은 다른 가족에게 버림을 받고 ) 마지막 남은 희귀 언어 사용자처럼 남겨집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남겨진 딸은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의 모국어를 지닌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녀 앞의, 오직 혼자의 삶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이번 소설집에 실린 상당수 작품이 그렇듯 딸과 아버지... 그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합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을 주고 받는 관계인 것만 같았던 그들의 관계는 실상 사랑이란 이름으로 덧씌워진, 잘 꾸민 포장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타인(심지어 가족까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그들이 옳고 자연스럽다고 믿는 그런 관계. 그 관계의 끝은 희귀 모국어를 지닌 두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가 사라졌을 때, 그 앞에 남는 어둠. 오직 두 사람만이 맺은 관계의 틀은 더이상 존재할 수도 없고, 오직 두 사람뿐이었기에 확장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밖으로 노출되거나 유사 관계가 발생했을 때의 상황입니다. 어쩔 수 없이 파장이 생깁니다. 의심도 하고 불안해도 하지만 결국 그 관계는 또 하나의 포장을 덧입힌 채 지속됩니다. 관계가 깨졌을 경우의 파장은 상상할 수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를 찾습니다' 역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아이를 잃어버린 윤석과 미라. 그들은 오직 아들 성민을 찾는데 집중합니다. 집도, 직장도, 부부 사이도 성민을 찾는 것에 앞설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라는 조현병이 발병하고 오직 오전한 윤석만이 성민이을 찾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러다 거짓말같이 11년 만에 찾은 아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윤석은 성민이를 찾는 것에만 몰두했지 성민이를 찾은 이후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낯선 여자에게서 11년이나 정상적인 양육을 받은 성민은 새아빠와 (정신병에 걸린) 새엄마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빠 역시 낯설기만 하고 거리를 두는 아들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관계맺기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결국 윤석이 성민을 데리고 새로운 공간인 고향에 돌아왔어도 그 둘의 관계맺기는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거의 모든 범죄가 그러하듯 유괴는 윤석 가족의 관계의 틀을 무참히 깨버리고 맙니다. (물론 병이 끼어들긴 하지만) 부부 관계도 깨지고 여타의 가족과는 단절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다니는 직장에서도 정상적인 인간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깨진 관계가 다시 찾은 아들이 왔을 때 회복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엇나가기만 합니다. 결국 윤석은 관계가 깨지기 전에만 집착을 했지 깨진 이후의 관계, 삶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갓난 아기의 등장은 윤석의 기억 속에서만 온전한 관계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말에도 있지만 2014년 4월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간응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269쪽)을 말하고자 했다는 것도...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그 잊을 수 없는 상처 이후에 대해 너무나 무신경하게 대처하고 있지 않나하는 반성과 자책을 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원점'에서는 만남과 이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만남과 이별을 인생의 원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의 시작과 끝이 동일한 인생의 원점이라니... 운명적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또한 (타인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운명적 이별이라고 판단하는 것 역시 자의적 관계의 판단일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겠지만 말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92쪽)의 진술은 의미심장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오직 두 사람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 혹은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진실하다고, 변함없을 것이라고 믿는 그들의 관계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순간적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연속에서 인생의 원점 역시 변하고 맙니다.
'옥수수와 나'는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콩트로 시작되는 도입부가 끝나면 아무런 (창작)의욕도 없던 내가 얼떨결에 미국에 건너가서 겪는 해프닝을 다룹니다. 그 내용이 상당히 자극적이고 통속적이기에 읽기의 재미를 더합니다. 그리고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란 마지막 문장이 의미심장합니다.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주변의 상황에서 내가 곧잘 옥수수로, 닭들의 모이로 분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가 있습니다. 결국 또다시 관계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인식하는 세계와 주변에서 나를 인식하는 또는 내 주위를 인식하는 시선이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그 간극이 커질수록 자아를 불안정해지고 분열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결국 나를 잃어버리고 내 주변의 모든 관계도 왜곡되고 단절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만 모르는 내 아내의 불륜, 나의 인식과 사고 범위 밖에서 달음질치는, 하지만 내 손으로 쓰인 작품은 인간과 인간, 작가와 작품의 관계가 결코 결속력이 강하지 않음을 상징하는 것도 같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작품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관계'의 측면에서 네 작품을 파악했지만 네 작품, 사실은 일곱 작품 모두 상실 혹은 결핍으로 귀결되기도 합니다. 어떤 작품이든 누군가는 죽거나 떠납니다. 그리고 그 상실의 끝에는 '전망없음'이 자리합니다. 아무리 미리 준비를 하더라고 현실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 혹은 그들과의 이별은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대개는 그 아픔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혹은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죠. 그렇기에 이별의 끝, 상실의 시작에 대처할 어떠한 자세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려 있는 결말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그 열림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열림'일 뿐입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면 소설집의 내용이 상당히 무겁고 우울해 보이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혹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작가의 위트와 유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오직 두 사람'이나 '옥수수와 나'에서의 유머는 작품의 내용을 상기하는 키워드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웃음을 안겨줍니다. 또한 '인생의 원점'의 결말 부분에서 등장하는 예기치 않은 사건도 읽는 재미를 배가합니다. 그렇기에 가독성 측면에서 무척 좋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모든 작품의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결말이 뻔하지 않고 열려있기에, 관계의 맺음이 아니라 관계의 상실 혹은 결핍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실의 뒤에 펼쳐질 내용이 눈에 보이지 않고 여러 가닥으로 갈피를 잡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작가 김영하의 필력을 정말 오랜만에 확인하게 한 작품집이었습니다. 한동안 멀리 했던 그의 작품을 다시 보게 하는 원동력을 충분히 제공합니다. 꽤 재미있으면서도 만만치 않은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책, '오직 두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