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by 정혜윤

 

정혜윤의 고전읽기는 ‘고전’ 그 자체로 느껴졌다.

유려하고 화려하며 기억에 새겨지는 문체로 여러 고전들에 대한 터치를 보여줬고,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따뜻하고 예민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고전 문체라는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얼마나 많은 곳에 줄을 치고, 얼마나 많은 곳에서 감동을 하고 감탄을 하여 나의 생각을 책 여백 귀퉁이에 적어놓았는지 모른다. 한 사람의 문체에 이렇게 공감을 하면서 읽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그만큼 정혜윤 작가의 글쓰기는 사람을 묘하게 이끄는 매력이 있다.

 

그녀가 제시한 15가지 이야기들 중에는 내가 이전에 접해본 책도 있고, 또한 내가 너무너무 사랑해 마지 않는 책(폭풍의 언덕이다)도 포함되어 있고, 정말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었지만 그녀의 해설로 인해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중단하고 지금 당장이라도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작품들도 있었다.

몇 몇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때, 그녀는 자신이 책에게 그리고 작가에게 던진 질문들을 마구 보여준다. 특히 <변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질문들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끊임없이 머릿속에 퀘스쳔 마크를 그려가며 책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갔던 그녀를 떠올리며 나도 <변신>에 대한 그 질문에 대해 책을 읽는 도중 한 숨 돌려가며 잠시 생각에 잠기곤 했다.

 

위대한(감히 이 단어를 쓰고 싶다) 독서 평론가들의 특징은 자신이 어느 시대, 어느 작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자신이 사용해야겠다, 또는 떠올리는 책의 한 구절을 조각처럼 붙여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절대 적은 분량의 책을 읽었던 사람이 아니지만, 이렇게 적시 적소에 내가 읽었던 책들의 구절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되기엔 아직 부족한 것이다. 그 능력이 참 부러웠다.

 

동물적 존재란 그에게는 어쩌면 일종의 수치감 때문에 인간이라는 형상과 인간의 지혜를 포기하였음을 뜻하였는지도 모른다. (by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p.51)

 

 

책을 읽어 나가면서 느낀 점은 나에겐 예전에 읽었던 고전들을 생각해 보면 항상 도입부에서 시간을 오래 끌었던 기억이 났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아직 등장하기도 전에, 집 현관에 등장인물을 계속 방치해 둔 채, 내리는 비는 계속 내리도록 해 둔 채, 아직 성장도 못한 어린 시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등장인물들 등등. 내가 책 페이지를 넘겨주지 않으면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채 언제나 정지 화면으로 계속 그 페이지에 머무르고 있었던 그런 이야기들. 단순히 초입부만 넘어가면 그토록 즐겁고 신기하고 신나고 아득한 이야기들이 가득한 세상이 펼쳐지는 것인데.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초입에서 망설이지 않는 어른이 되어 다행이다…

 

 

여기 정말 재밌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다.

 

토니 호글랜드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의 첫 연인데 나는 딱 여기까지만 읽고 다음 연을 읽을 때까지 잠시 쉬어야 했다. 왜냐하면 논란을 일으키는 행동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마이크 앞에 서서 사실은 그 일을 또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크다고 고백을 하고, 그때 세계사는 뒤죽박죽 뒤엉키고 주물럭주물럭 밀가루 반죽 덩어리가 되었다가 입자 물리학이 제시하는 바로 그 세계관, 질서라는 표면 아래 이글이글 우글우글 잠복한 카오스 그 자체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구를 줄지어 소환해야 할까? (p.70)

 

 

또, 여기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던 부분이 있다.

 

내 영혼의 위대한 여행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은 그림자 혹은 미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두 눈은 내가 가끔 들러 물을 떠 마시는 옹달샘. 당신 유방 사이의 갈라진 틈은 내가 잠시 눈 붙였다가 깨어나는 부드러운 베개. 나를 땅에 묶어 놓으려 하지 마십시오. 위대한 수수께끼는 당신의 허리춤이나 커다란 눈 속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양팔은 너무 작고 허약하여 나의 온 영혼을 담지 못합니다. 저기 하늘의 별들 위에는 나를 잡아당기는 천상의 자석이 있습니다. 그 자석은 커다란 향수와 엄청난 동경 덕분에 그 장력을 유지합니다. 별들 위에 있는 천상의 누군가가 나를 잡아당깁니다. 나를 땅에 묶어 놓으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사랑보다 높고 인생의 줄거움보다 고귀합니다. (by 니코스 카잔차키스 <뱀과 백합>) (p.87)

 

 

지금 당장이라도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부분은 <골짜기의 백합>에 대한 이야기 ‘단 한 사람을 위한 역사가’ 부분이었다. 정말 모든 구절이 다 절절히 와 닿았고, 이렇게 아름답게 작품을 표현할 수 있을까. 또한 정말 이런 느낌을 본 소설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강하게 들었던 작품 설명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부분은 정말 추천하고 싶다. 이렇게 아름답게 작품을 느낄 수 있겠냐고. 당신도 한 번 읽어보라고.

 

 책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이란 간혹 보이는 오타들이다… 오타는 뒷 부분을 갈수록 좀 더 빈번히 나타나는데, 그냥 읽으면서 내가 고쳐 넣었다. 하하하.

 

 

 책에는 일러스트들이 하나씩 첨부되어 있다. 누군가의 얼굴이 베이스가 되고 플러스로 누군가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하나는 채색되어 있는 원형의 모습이지만, 하나는 선으로만 표현된 그림. 그래서인지 한번에 눈에 띄는 그림보다는 선으로만 그려진 일러스트를 더 자세히 보려고,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려고 여기저기 돌려보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책을 계속 넘겨 나가다 보니 이 선으로만 표현된 일러스트는 각 챕터의 가장 첫 번째에 이미 나와있는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일러스트 작가의 이름을 보았다. 김한민.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다. 매우 감각적인 책에 걸맞게 매우 감각적인 일러스트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작가.

 

 굉장히 최근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대한 언급도 두 군데에서 나온다. 이렇게 최근의 책까지 같이 보여준 정혜윤 작가의 글쓰기에 동시대적으로 공감을 할 수 있는 오늘이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면 자기 전에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 주는 한 소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정혜윤 작가는. (분명 어머니의 이미지는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 하나 천천히 문장을 음미하게 만들어 준다. 이 텍스트를 읽을 때 가장 신경썼던 과정이 그것이다. 하나하나 문장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일부러 천천히 읽으면서 그 문장들을 즐겼다. 마치 핥듯이 말이다.

 

 나는 악마를 만나면 대략 할 말을 정해 두고 있던 편이었다. (p.133)

 

 정말 마음에 드는 도입부이다. 흥미롭게 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 이 문장을 읽고 흥미를 느낀 사람이라면 과연 그 대답은 어떠했는지도 궁금할 터. 그래서 다음에 그에 대한 정혜윤 작가의 대답을 실으며 서평을 마치려 한다.

 

 “악마 당신도 지루하지만 당신보다 더 지루한 사람들은 자신은 죄와 악, ‘죄와 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냥 하던 이야기 더 해 줄래요?” (p.157)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 켄 키지>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중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읽을 것인가 생각하는 중, 서점에 직접 가서 첫 번째 책을 고르기로 했다. 책장에서 책들을 쭉 둘러보고, 최근 발간된 책들을 보다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제목에 눈이 갔다. 이 소설은 영화화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영화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먼저 소설을 읽고 영화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 표지엔 영화의 스틸 컷이 나와있었는데, 주인공 역할을 맡은 ‘잭 니콜슨’사진이 실려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해서 4일만에 완독을 하고, 그 마지막 날 영화도 관람했다. 소설은 정신병동이 배경이 되었고, 시대는 1960년대의 미국 분위기를 동시대로 담고 있었다. 작품 해설의 말을 빌리자면, 풍요로운 물질주의와 체제 순응적인 보수주의에 대한 반문화 운동인 히피 문화가 확산되고, 기존의 경직된 사고와 가치관을 풍자하고 야유했던 시대이다. 소설의 제목이 뜻하는 ‘뻐꾸기 둥지’는 속어로 정신병원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며, 주인공 맥머피는 바로 이러한 불청객 역할을 맡는 인물인 것이다.

 

주인공 맥머피를 잭 니콜슨이 연기하여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것이 이미 머릿속에 각인 되어 있어서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선 잭 니콜슨이 맥머피를 연기하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 영화로 확인한 결과 잭 니콜슨은 맥머피를 상상속의 이미지 그래도 재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하면 어느 정도 실망스럽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조금 아쉬웠던 부분들을 잭 니콜슨이 커버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연극으로도 상연되어 큰 성공을 했는데, 이 것이 영화로 만들어 질 때, 작가 켄 키지는 영화화에 같이 참여 했었지만 자신이 소설속에서 서술자로 그렸던 추장의 역할이 영화에선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고 주변인물에 그쳐버린다는 것이 불만을 품고 도중에 제작현장을 떠났다고 하는 후문이 있다.

 

그렇다. 소설은 1인칭 시점에서 관찰자의 서술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인공은 맥머피이지만, 서술자는 인디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인디언-아메리컨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랫치드 수간호사이다. 이 역할을 맏은 여주인공도 역시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일명 ‘빗자루 추장’이라고 불리우는 ‘나(브롬든)’는 일명 ‘콤바인’이라고 칭하는 정신 병동에서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사람으로서 귀머거리이자 벙어리 취급을 받고 있으며 매일 대걸레로 복도 청소를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병동은 랫치드 수간호사의 컨트롤하에 움직이고 있었으며, 담당 의사 조차도 수간호사의 영향력 하에 있는 나약한 존재이다. 이런 병원에 미치진 않았지만 매우 위험한 인물인 맥머피가 들어오게 된다. 맥머피는 들어오는 날 당일부터 이 병원은 수간호사가 컨트롤 하고 있으며 자신은 절대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것이라는 것을 환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항상 내기를 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맥머피의 당돌한 행동에 당황스럽고 적응하지 못했던 환자들도 점차 맥머피를 자신들의 우상이라 여기게 된다.

맥머피 덕분에 귀청을 찢는 라디오 소리로부터 피해서 따로 카드 놀이를 할 수 있도록 샤워실을 휴게실로 배정 받기도하고, 캔디라는 매춘부와 함께 10명이 배를 빌려 의사의 동행 하에 바다로 낚시를 나갔다 오기도 한다. 맥머피의 이런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수간호사는 그를 컨트롤 하기 위하여 전기 충격요법도 사용하는데 그것도 맥머피에겐 잘 통하지 않았다.

어느날 맥머피는 수영장에서 다른 환자(구조대원)와 이야기를 하다가 병원에서 허락을 하지 않는한 자신은 영원히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갑자기 순종적으로 되기도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매춘부 2명과 병동에서 술파티를 벌이는 밤에 그는 탈출을 감행하지만 졸음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이런 혼란 속에서 처음으로 여자를 안아 볼 수있었던 빌리는 어머니에게 말해야겠다는 수간호사의 협박에 결국 자살을 하고 만다.

빌리의 자살과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수영장에서 익사한 체스윅의 사망이 모두 맥머피의 탓이라고 하는 수간호사의 말에 맥머피는 비명을 지르고, 결국 위층 중환자실로 끌려가 ‘뇌 전두엽 절제술’을 받고 다시 병동으로 돌아온다. 주인공 ‘나’를 크게 만들어준 우상이었던 맥머피를 베게로 얼굴을 막아 죽음으로 몰게 한 추장은 커진 몸과 마음으로 누구도 들지 못했던 제어반을 들어올려 창문을 부순 후 유유히 탈출했다.

 

책의 첫 부분에는 소설 본문 속에서도 나오는 인디언 민간 전승동요가 실려있다.

 

한 마리는 동쪽으로,

한 마리는 서쪽으로,

한 마리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갔다.

 

뻐꾸기의 영어인 ‘cuckoo’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바보, 얼간이 등이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the cuckoo in the nest’는 평화스러운 부모, 자식 관계를 해치는 침입자라는 뜻으로 나온다. 침입자 역할을 한 맥머피는 하지만 침입자라기 보다는 환자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는 미치광이이다. 그리고 수간호사는 이런 평화스러운 둥지를 지키기 위하여 침입자를 결국 철저하게 처단하는 사람인 것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뇌 전두엽 수술을 했다는 글귀에선, 갑자기 최근에 관람했던 영화 셔터 아일랜드를 떠올리게 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원작 소설이 있으며 정신 병원을 배경으로 한 서스펜스이다. 이 영화에서도 마지막에 주인공은 자신의 광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이런 대사를 읊으며 자진해서 수술을 받으려 한다.

 

‘괴물로 평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선량한 시민으로 죽을 것인가’

 

수술이라는 최후의 수단은 전체주의를 통제하고자 하는 자의 마지막 카드이자 자유를 끝까지 억압하고야 말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0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자유가 이렇게 제한되어 있는 사람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 살고 있는 평범한 시민이라면 자유를 극도로 원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우리가 언제나 바라는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지금 우리가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 같은 자유가 우리의 전 시대 사람들이 갈구하고 또 갈구하여 얻어낸 자유라는 것을 혹시 알고 있느냐고 말이다.

 

 

인상 깊은 구절들

 

1)     당신들도 알다시피 이 사회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소. (42p.)

2)     이 세계는….., 힘센 자들의 것이에요, 친구! 이 세계는 약한 자들을 잡아먹을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힘센 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가지요. 우리는 이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세상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건 당연해요. (111p.)

3)     세 마리 기러기가 무리 지어….. 한 마리는 동쪽으로 날아가고, 또 한 마리는 서쪽으로 날아가고, 나머지 한 마리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다….OUT이라는 글자가 나타난다…..기러기가 재빨리 내려와 너를 낚아채 밖으로 데려간다. (451p.)

4)     보조를 맞추지 않고 행군하는 자는 다른 북소리를 듣는다고 했나? (453p.)

5)     그것은 궁지에 몰린 동물이 질러대는 공포와 증오, 항복과 반항의 감정이 뒤섞인 비명이었다. (중략)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죽음 외에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할 때 지르는 마지막 비명이었다. (505~506p.)

 

<이런 사랑 – 이언 매큐언>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 작가로 알려진 이언 매큐언이 쓴 소설인 <이런 사랑>은 예전부터 계속 읽고 싶은 목록에 올라와 있던 책이다. 그런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이런 사랑에 나온 ‘드 클레랑보 신드롬’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서 궁금증이 더욱 증폭되어 바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책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어서 나도 덩달아 매우 빠른 속도로 읽어나갔다. 소설은 책의 표지 디자인에 나와 있는 바 대로 풍선 기구에 얽힌 사고를 둘러싼 사람들 간의 이야기이다.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지만 주가 되는 것은 두 사람, 바로 조 로즈와 제드 페리이다.

 

어쩌다 보니 나는 살아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제드 패리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선 굵고 긴 그의 얼굴에는 고통스런 의문이 자리잡고 있

었다….(중략)….이 남자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내가 도와주기를 원한다, 라고.

이러한 내 시선이 그 순간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알았더라면, 그가 나중

에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정신적 생명을 부여했는지 알았더라면, 나는 그를 결코 따뜻

하게 대하지 않았으리라. (33p.)

 

 이 장면이 바로 페리가 조에게 사랑의 감정, 즉 종교적인 무한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순간부터 페리는 조를 하늘이 내려주신 사람이라 생각하고, 페리의 집으로 전화를 걸거나 편지를 쓰거나 집 앞에서 기다리며, 약혼자 클라리사와 헤어지기를 종용하기도 한다.

 

바로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란 그런 것이다. 책 붙임 1에 나와있는 글을 인용하자면, 상대방인 ‘대상’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강렬한 망상적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대상이 표명하는 무관심과 혐오를 역설이나 모순으로 여기며, 그가 ‘실제로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에서 흔들림이 없다(323p.)는 것이다.

 

이 책이 전체적으로 ‘드 클레랑보 신드롬’을 소재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을 지각한 전제하에 소설을 읽기 시작했으나, 이상하게도 본인은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반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결국 책에 반전은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했던 반전이란, 제드 페리라는 인물은 조 로즈가 만들어낸 망상속의 인물이라는 설정이다. 그 이유는 제9장에서 나온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클라리사는 쉬고 싶었지만 서른개의 전화 메시지에 질력이 난 조는 클라리사를 가만 둘 수 없었다. 계속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페리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는 지에 대한 동조를 원했는데, 이때 클라리사는 그 서른개의 메시지를 어떻게 했느냐고 묻지만, 조는 다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말이다. 또한 제12장에선 페리에게서 온 편지를 증거로 클라리사에게 보이는 데, 이 편지에 대해 클라리사는 “이 사람, 글 쓰는 게 당신과 비슷하네.”라는 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제20장의 경찰 심문과정에서는 조 로즈만 홀로 남겨져 따로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때 로즈만 뺴고 다른 증인들의 얘기가 모두 일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클라리사 처럼 나도 조에 대해서 오해 했다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었다. 시종일관 독자인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점에서 흥미가 있었는지 다른 책보다도 더 빨리 읽혔다. 그리고 결말이 무척 궁금했던 소설이기도 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부록으로 있는 학설과 페리의 편지를 읽고 난 후, 정말 이런 사랑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이런 식으로 사랑한다면, 아니면 내가 어느 순간 이런 신드롬에 걸려버린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머릿 속이 복잡해졌다. 이 신드롬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환자의 환경은 혼자 살고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어느 날 ‘신호’에 의해 시작되는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은 <원죄>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영화를 너무 인상깊게 보았기에 원작 소설까지는 아직 손을 대지 않았지만, 언젠가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소설 <이런 사랑>을 통해 열린 결말을 보여준 작가의 글쓰기에 감탄을 하며 서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