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대유행으로 가는 어떤 계산법

 

 

  대도시 속 좀비가 들끓는 소재는 넘쳐 흐른다. 그 중에서도 전염병이라는 책은 한국을 주요 무대로 삼았고 현재 구제역과 노로 바이러스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한민국 현주소와 우연히 같은 행보를 걷고 있기에 더욱 주목되는 책이다. 구제역 바이러스가 일파만파로 퍼져가고 있는 가운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설 속의 시기는 8월 초순부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바이러스에 의한 발병자와 사망자가 나타나는 시점에 나는 한 겨울의 만원 지하철 속이었다. 주변은 감기로 콜록대는 사람들이 같이 있었다. 괜히 전염이 될 것 같아 경계를 하게 되었다. 겨울에 오히려 기승을 부리는 노로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구제역 처리로 인한 수위사들의 사직 등.

  책 1부는 어기영이라는 선원이 바이러스 숙주로서 그를 둘러싸고 사건이 전개된다. 어선의 어창 냉동설비가 고장 나서 유빙을 잘게 부수어 임시로 명태를 냉동하는데 썼는데, 이 유빙이 문제였던 것이다. 오랜 과거의 바이러스가 낮은 온도로 인해 얼음 속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문양호에 승선했던 선원 전원이 모두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했던 것이다. 단 두 명의 생존자만 빼고. 그 중 한 명이 바로 '장티푸스 메리-감염된 본인은 특별한 증상을 보이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병원체를 퍼뜨림으로써 치명상을 입히는 존재(p.53)' 어기영이었다.

  8월 31일 화요일. 이 날을 기점으로 사건은 거의 하루 단위로 묘사된다. 첫 번째 감염자가 도심인 일산에서 출현한 것이다. 바이러스는 달(moon)과 같이 생겼다 해서 엠 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명명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등에 대한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신뢰할 만한 자료 등으로 소설을 더욱 진실감 있게 만들어 주었다. 수 많은 등장인물들로 인해 더욱 꽉 찬 느낌을 주는 소설.

 소설의 배경은 수도권을 벗어나 부산까지 내려간다. 부산에서 해양생태계를 조사하는 박사 과정의 서민정을 중심으로 바이러스는 더욱 넓은 범위로 번지게 된다. 자이언츠 모자로 며칠 단장하지 못한 얼굴을 가렸다는 장면(p.106)에서는 역시 부산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그 생각을 갖자마자 바로 든 생각은 그렇다면 왜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일까라는 생각이었다. 부산으로 간 표준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설정되어 있다면 별 문제될 일이 없지만 아마도 작가는 굳이 사투리로 말투를 바꿔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않았던 듯하다.

  숙주인 어기영은 부산까지 내려가서 해외로 몰래 도피하려고 계획하지만 결국 잡히는 과정에서 부상으로 죽음에 이른다. 그 직전 골수 채취로 인해 엠1 바이러스의 백신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부산에서 발견된 문양호의 또 다른 생존자였던 한지호로부터 변종 바이러스인 엠2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 더 이상 어기영의 골수로 만든 백신으로는 안심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소설은 2부로 접어들며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바로 북극의 프란츠요제프 제도에서 연구하고 있는 최수철 교수. 최교수는 북극에서 바이러스 연구를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받아보는 한국에서 오는 잡지에 엠 바이러스에 관한 기사를 읽자마자 귀국을 하여 돕기로 한다. 바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연구원들에게 자신의 연구에 대한 설명을 한다.

  최교수는 이 바이러스를 이스케이퍼, 즉 탈출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감기에 걸렸을 때 자연스레 재채기를 하는 것처럼 감염된 숙주에서 탈출해 건강한 숙주로 이동할 기회를 노리는 바이러스라고 하였다. 상상도 못했던 최수철 교수와 그의 연구 실적으로 인하여 바이러스 퇴치에 조금 도움이 되는가 싶었지만, 이 최교수도 결국은 감염자였던 것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또 어두운 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최교수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던 윤규진 교수는 최교수의 처절한 마지막을 바라보았다. 최수철때문에 겪었던 수 많은 고통들로 인해 용서할 수 없었다. 특히 자신의 딸에 대한 루머에서는 절정을 이루었다. 반 미친 사람이 되어 병원에서 탈출해 딸이 진료를 받기로 한 병원으로 가는 장면이 그랬다. 결국 딸은 무사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윤규진 교수는 더욱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한 편 주된 인물 중 하나였던 서민정이 감염되고, 박주희도 일찌감치 그녀의 남편의 감염과 첫째 아이의 죽음, 그리고 둘째와 함께 감염되어 연구진에서 빠지게 된다. 하지만 서민정은 환자로 격리되었지만 여전히 윤규진을 도우며 엠2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가지고 있는 김성호의 골수 채취를 함께한다. 하지만 이 골수로 만든 백신엔 부작용이 있었지만, 김성호의 도움으로 바이러스가 박테리아로 바뀌는 반생명화를 발견하고 최종적으로 다수의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치료법을 알게 된다. 이런 폭풍 같은 한 때가 지나가고 사건이 마무리 된 시점이 개천절 동틀 무렵이었다.

 

  약 한 달간의 일정을 숨쉴 틈 없이 보여준 이 소설은 정말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이 자세했고 재미있었다. 출판사의 의도에 맞게 영화화 될 소설이나 영화의 원작 소설을 출판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는 한 권의 책이 아니었나 싶다. 책이 끝까지 재미있었던 것은 주인공인 윤규진 교수가 결국은 엠2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기약 없는 병원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은 아마도 영화화 되었을 때엔 삭제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만약 소설을 더욱 살리고 싶으면 이 결말은 그대로 살리는 것이 더 큰 대작으로 남을 것 같다.

 

그림자 도둑

 

Mind Reader.

그림자 도둑에 부제를 붙인다면 난 이렇게 붙이고 싶다.

 

매우 읽고 싶었던 ‘낮’의 작가 마크 레비의 새 소설이 나왔다.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은 영화 ‘자전거 도둑’이었는데, 이 소설은 어떤 내용일까 매우 궁금했었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의 조우를 보여준다는 표지 설명은 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고, 빠른 전개로 인해 소설은 금새 읽을 수 있었다.

 

책의 앞 부분부터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었다. 작가 마크 레비가 인용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언어로 책을 시작했다.

 

그림자에 입 맞추는 자 있으니,

그림자의 행복만을 얻을 뿐.

 

뭔가 굉장히 의미심장한 느낌을 주는 문구였다. 책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그림자와도 소통하는 문구인데, 그래서 그런지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이 문구를 읽었을 때에는 처음에 느낀 느낌과 약간 달랐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책의 해피엔딩이 따뜻한 느낌을 주었던 반면, 책을 읽기 전의 이 문구를 봤던 느낌은 허상과 허구를 쫓는 우매한 인물이 떠올랐던 것이다.

 

주인공 ‘나’의 어린 시절은 아픔과 슬픔이 있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 갑작스런 전학과 이른 입학, 소심한 성격과 작은 체구로 힘든 학교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그림자’를 훔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으로 남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남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던 주인공도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착하고 좋은일을 하기도 한다.

 

학창 시절, 특히 초등학생 시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잘 기억나지 않을 것인데, 작가는 오래전의 학창 시절에 대한 감성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타인의 입장을 타인이 되어서, 그리고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아서 다시 복기해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리고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어떠했는지 잠시 떠올려 볼 수 있었던 소설의 초반부였다.

 

역시 프랑스답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부분은 영어 수업시간에 과거에 대한 시제 설명에 주인공이 ‘이렇게 멋진 시제가 다 있다니!’하면서 감탄하는 부분이었다.

 

단순과거형이란 대부분 현재와는 상관없는 오래 진행되지 않은 과거의 일을 설명하는 데 쓰이며, 확실히 끝이 나 과거에 있었던 일로 분류할 수 있는 시제라고 설명했다.

(중략) 나는 학교생활이 단순과거였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했다. (p.19)

 

이 부분이 남다르게 느껴졌던 이유는 작년에 보았던 프랑스 영화 ‘클래스’의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영화에선 시종일관 한 프랑스의 고등학교 수업시간을 다루었는데 약간 자유로우면서도 의외로 엄격한 부분도 있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수업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독특해서였다. 영화에서도 시제에 대한 부분이 나왔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좀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결국 이 수업시간에 주인공은 벌을 받기도 하는데 그 벌도 참 귀여우면서도 약간은 가혹한 벌칙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세 시간 동안 운동장에 떨어진 낙엽을 줍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벌칙으로 낙엽을 줍게 하는 것은 귀여웠지만, 토요일에 그것도 세 시간은 가혹하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유년시절의 주인공 ‘나’에게 중요한 주변인물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학교 수위 아저씨인 ‘이브 아저씨’. 소년을 굉장히 잘 이해해 주면서도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아마도 책 표지에서 말하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난다는 컨셉이라고 볼 수 있다. 소설 막바지에 청년으로 성장한 주인공 앞에 다시 한번 이브 아저씨가 나타나지만 아저씨의 정체에 대해 묻는 주인공에게 아저씨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 네가 자유를 허락해준 학교 수위. 아니면 너에게 친구가 필요할 때 네가 만들어낸 그림자. 네가 고르려무나.” (p.316)

 

이브 아저씨가 실제로 주인공의 친구였는지, 아니면 주인공의 세계에서 가상으로 만들어 냈던 인물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드는 존재였다.

꼬마와 어른의 관계. 바로 주인공과 이브 아저씨의 관계를 통해서 서로 다른 나이지만 뭔가 남다른 교우와 친분 관계를 쌓고 있는 점에서 주인공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한없이 맑고 투명하기만 한 어린아이의 시선이 아닌, 조금 아픔이 상처가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기에 더욱 강해질 수 있었던 주인공이다.

이브 아저씨와의 대화와 엄마와 주인공간의 대화를 통해서 느낀 점이 있는데, 바로 아이들의 관심거리에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방법이며, 가장 아이와 가까워 질 수 있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왜 나의 관심거리를 무시할까, 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도 받았는데, 어른이 되면 그 상처 입었던 마음을 깡그리 잊고 사는 것이다. 좀 더 아이들의 관심거리에 심각한 척 생각해 준다거나, 나에게도 관심이 있는 듯이 여겨주면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브 아저씨가 당한 화재 사고 현장에서 아저씨는 어린 시절의 추억의 앨범이 전소되어 매우 슬퍼한다. 그때 주인공이 아저씨를 위로 하기 위하여 한 말이 있다.

 

“아저씨의 머리는 타지 않았잖아요. 추억을 잃은 건 아니에요. 머릿속으로 떠올리면 되잖아요. 어머니한테 받은 편지는 다시 쓰면 되고, 사진은 그림을 그리면 되고요.” (p.76)

 

아저씨를 돕고 싶었던 주인공은 자신의 엄마에게 부탁을 해서 태아시절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했다. 귀엽게도 그 편지를 그대로 복사해서 아저씨에게 멋진 추억의 선물을 보냈다. 감동적인 장면이다.

 

 

소설에는 ‘단풍 시럽을 바른 사과 케이크’가 자주 등장한다. 아빠와 이혼 후 슬픔에 잠긴 엄마와 첫 저녁식사 메뉴였으며, 어머니를 추억하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난 집에도 이 케이크가 있었다. 주인공의 엄마를 떠올릴 때는 항상 이 단풍시럽을 바른 사과 케이크가 등장하는 것이다.

 

부모님이란 존재는 어느 일정한 순간까지만 나이를 먹어 우리 기억 속에 영영 그 모습으로 기억된다. (p.146)

 

그리고 주인공의 학교 시절 친구인 ‘뤼크’. ‘셰익스피어 빵집’의 아들인 뤼크를 통해서 ‘초콜릿 빵’과 ‘커피 에클레르’가 등장한다. 이 두 종류의 빵도 역시 뤼크와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모티브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고서 에클레르가 매우 먹고 싶어졌다.

 

 

청년이 된 주인공의 연인으로는 소울 메이트 같은 친구에서 연인 사이의 관계인 ‘소피’가 있다. 그녀는 말했다.

 

“난 네 인생의 그림자일 뿐이야. 하지만 넌 내 인생에 중요한 사람이지. 그래서 가슴이 아파.” (p.228)

 

작가는 그림자라는 단어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책 이곳 저곳에 배치한다. 인턴이 된 주인공의 집 위층, 즉 6층에 사는 할머니의 대사에서 그림자는 주인공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서 그림자도 못 쫓아갈 정도라는 체이싱(chasing)의 이미지고, 소피에게는 주인공을 그저 옆에서 바라만 보고 진정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벽(wall)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그림자는 항상 마인드 리더(mind reader)였다. 남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도구였고, 나도 모르는 힘을 생기게 해 주는 원천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밖에 추억을 만들지 못했지만, 청년이 되어서도 주인공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소녀 ‘클레아’. 클레아는 매우 특별한 아이였다. 들을 수도 그래서 말을 할 수도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웃음소리만큼은 첼로 선율을 닮았던 해변가의 그 소녀.

 

클레아는 허공속에 시를 써내는 재주가 있어 하늘에 대고 글을 썼다. 클레아가 쓴 글씨는 ‘보고 싶었어’였다. ‘보고 싶었어’라는 말을 연으로 쓸 줄 아는 아이를 쉽게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p.134)

 

클레아 앞에서는 바로 내가 벙어리가 되어 버리는 주인공. 그만큼 그녀를 좋아했고,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청년이 되어 정신 없는 인턴 의사 생활을 하기까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소피와 뤼크와 함께 찾아간 바닷가는 예전의 그 곳이었다. 다시 찾은 등대에는 클레아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고, 독수리 연을 날리면서 클레아를 다시 찾기로 한다. 수소문 끝에 클레아는 원래 말을 할 줄 알지만 자폐증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말문이 텄다는 소식도 들었으며, 지금은 음악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클레아를 만나러 간 음악회에서 클레아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결국 클레아를 되찾으려는 주인공의 노력은 클레아의 집 앞 창문에서 이루어진다. 연이 날고 있는 도심에서, 클레아는 주인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얼레를 잡고 다시 공기중에 시를 남긴다.

 

‘보고 싶었어’

연으로 ‘보고 싶었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여자는 잊을 수가 없다. (p.327)

 

쉽게 잊을 수 없는 아이는 잊을 수 없는 여자가 되었고, 주인공은 그림자를 따라 여자에게 키스를 했다. 참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였다.

로지텍이라는 유명한 회사를 세운 장본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냈다는 것이 더욱 흥미로웠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도 자연히 손이 가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느낌이 좋은 한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본 듯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환상문학 작가 10명이 모였다. 그것도 한 권으로. 네이버 오늘의 장르문학에 게재된 작품들이 모여서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 난 그렇다. 글은 왠지 인쇄된 종이를 손으로 느끼면서 읽어야 제맛이라고 느끼는 사람이라서 인터넷으로 스크롤하며 읽는 것보다 훨씬 안정감을 느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한 두 작품이 조금 나와는 코드가 안맞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첫 번째로 게재된 듀나의 작품 ‘디북’이었다. 읽는 내내 시종일관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해 두었는데,

-소설 ‘해리포터’

-영화 ‘아바타’

-영화 ‘인셉션’

-영화 ‘데자부’

-소설 ‘신’

-영화 ‘아일랜드’

등이었다. 무슨말인고 하니, 어디선가 본 듯한 컨셉과,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의 조합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해리포터에선 느껴지지 않았던 위화감이 이 소설에서는 좀 느껴졌다. 그래서 많이 아쉬웠다. 뭔가 책 스타트를 찜찜하게 끊은 느낌…. 갑작스런 결론 도출과 단순한 캐릭터의 나열, 두서없는 사건 전개로 이야기의 유기성이 좀 없었다. 결국 작가가 어필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가 버렸으니….

 

조금 실망을 했지만 바로 다음 작품부터는 재미가 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이영도의 ‘에소릴의 드래곤’은 드래곤 라자가 하도 유명해서 그런지 또 드래곤이 소재로 나와도 그저 친숙하기만 했다. 또한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풀어가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적절한 고전적 표현방식을 섞으면서도 코믹한 요소를 곳곳에 포함한 대화가 참 맘에 들었다. 흔히 생각하는 페어리 테일을 조금 꼬아서 만든 이런 이야기가 나는 참 좋다. 동화같으면서도 상식을 뒤엎고 기발하고 참신한 그런 이야기 말이다.

 

은림의 ‘만냥금’은 완성도가 매우 높았던 작품이다. 어느 순간 알게 모르게 사라진 아들의 행방도 좋았고, 정신 없이 환전을 하러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도 너무 잘 그려졌다. 마치 정말로 내가 환전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 작품으로 은림 작가의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라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반말투로 시작한 이 소설은 정말 재밌었다. 흔한 교훈을 주는 것이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는 정말 점수를 줄 만했다.

 

구병모의 ‘재봉틀 여인’. 국문과를 전공한 작가라서 그런지 전통적인 화법을 잘 사용하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났다. 하루키가 써냈던 환상 문학들과도 오버랩되면서 즐겁게 읽었던 소설이다.

 

장은호의 ‘생존자’. 나에게는 이 소설이 오츠 이치의 ‘ZOO’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무언가 괴기 하고 기이한 이야기를 썼던 오츠 이치. 그의 괴기 단편 모음집인 ‘ZOO’에서 제목이 잘 생각 안나지만 각 방에 한 명씩 사람들이 들어있고, 가운데 물이 흐르는 구조로 되어 있는 그런 소설이 떠올랐다. 이 ‘생존자’는 결말이 매우 마음에 들었던 소설이었다.

 

정명섭의 ‘바람의 살인’역시 짜임새가 있고 잘 쓰여진 작품이었다. 역사 추리소설을 썼던 만큼 이번 작품 역시 고구려를 배경으로 그려낸 살인 사건을 풀어나가고 있었다. 시대적 배경을 많이 연구한 탓인지 읽는 내내 그 박식함에 감탄을 했던 작품이었다.

 

최혁곤의 ‘밤의 노동자’는 뭔가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듯한 스릴러 물이었다. 나쁘지 않았고 나름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었다. 김탁환의 ‘실 인간’으로 넘어가보자. 이름만 들어도 정말 대작가인 김탁환. 나는 이 단편을 처음으로 접해본 김탁환의 글이었지만, 이 글을 읽고 안심이 되었다. ‘눈 먼 시계공’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이야기가 매우 재밌었고, 정말로 홍대에 이런 사진관이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구경하러 가게 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임태운의 ‘가울반점’은 후반에 가서 미스터리로 종결되었다. 갑작스런 외계인의 설정이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상상력이 좋았다. 그리고 문지혁의 ‘체이서’도. 먼 미래를 설정하여 세심하게 미래엔 어떨것이다라는 가정을 확실히 해 놓았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전체적으로 대부분 만족할만한 이야기들이 많아서 재밌게 읽었던 책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책을 읽고 더욱 작가들의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졌고, 한국 문학을 조금 더 많이 접해 보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지금까지는 한국 문학을 조금 경시했던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재밌고, 그리고 더 넓은 영역으로 뻗어간 한국 문학을 마음껏 접할 시간이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