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의 단편소설집이다. 그것도 올해 노벨 문학상의 영광을 얻은 작가의 단편소설집을 말이다.
앨리스 먼로라는 이름은 이번에 노벨 문학상 수상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을 토대로한 영화 <어웨이 프롬 허>는 들어본 적이있기에 왠지 친숙하게 다가왔다.
또한 지금까지의 노벨상 수상작가들의 어려운 듯한 작품들보다는 읽기가 수월해서 마음에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책을 보니 9개의 단편들이 쭉 줄지어 서서 나를 먼저 읽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예쁜 꽃들이 검은 바탕에 그려있는 모습이 고급스런 벽지 문양같기도 한 두꺼운 책을 펼치고
나는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곰이 산을 넘어오다>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 단편이 바로 영화 <어웨이 프롬 허>의 원작이기 때문에 먼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참 이상한 제목이지? 곰이 산을 넘어오다니. 도대체 무슨소리지? 하면서 책을 읽어내려갔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면서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는 피오나, 그리고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 그랜트.
두 노부부의 일상은 이렇게 피오나의 노란색 메모지가 늘어나게 되면서 이상기후를 맞이하게 된다.
스스로 먼저 요양원에 들어가기를 자청하는 부인을 들여보내기 힘든 맘을 억누르며 부인을 요양원으로 보내고
그곳의 방침에 따라 한달간 면회가 정지된 채 한달만에 맞이한 부인은 다른 사람의 부인인양 행동하고 있었다.
그에 충격을 받는 그랜트의 내면의 모습과 슬픔이 너무 애절하게 전달되었다.
중간정도까지 읽고 책을 덮은 후 영화 <어웨이 프롬 허>를 구해서 보기 시작했다.
새벽에 본 이 영화는 잔잔하면서도 애절하면서도 또한 아, 이부분은 소설과 다르네.라는 말을 하게 했다.
두 부부로 분한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피오나 역할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론 그랜트의 연기가 맘에 들었다.
소설과는 약간 다른 길로 진행되긴 하지만 끝에선 같은 결말로 되었기에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즐길 수 있었다.
영화만을 본 사람들의 평을 조금 읽어봤는데, 그들은 이 영화의 원작도 꼭 읽어봤으면 한다.
그럼 다른 느낌과 다른 여운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왕 맨 뒤부터 읽은 김에 하나씩 뒤부터 앞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읽은 작품이 <퀴니>. 퀴니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이 주인공에 대한 묘사라든가 대사와 행동을 보고서 딱 떠오른 인물이 있다.
얼마전 자살로 세상을 떠난 가수 '에이미 와인 하우스'가 떠올랐다.
그녀의 복고풍 머리와 짙은 화장, 마른 몸은 퀴니의 이미지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퀴니>라는 단편도 영화화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한 캐릭터와 맨 마지막 부분의 할머니가 된
퀴니의 모습까지. 앨리스 먼로의 힘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정말 평범한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서 캐릭터의 힘과 소재의 다양함, 그리고 마음을 끌게 하는 진행과
여운을 진하게 남기는 결말부분까지. 왠지 나 혼자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는 반면,
몰래 남의 일상을 들여다 보는 두근거림까지 전해주고 있는 먼로의 필력은 대단했다.
비단 그녀가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해서가 아니라, 그 전에 이 작품들을 만났어도 정말 꽉찬 느낌을 주는 단편들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이라는 단편도 그렇다. 맘속 깊숙한 곳에 고이고이 숨겨둔 비밀같은 기억을 보여주는 이 단편은
한 부인의 반나절의 충동? 혹은 일상 탈출을 보여준다. 이 부인이 찾아간 앞이 보이지 않는 화가였던 이모의
캐릭터도 강했지만 부인이 계속 자신의 원래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가끔씩 자신의 일탈을 꺼내보는 모습이
왠지 여자로서 이럴수는 없지않나 라는 생각보다 아 뭔가 공감할 수 있겠다 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만의 독특한 열린 결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줄 수 있는 결말 또한 맘에 들었다.
한 집안을 흔들어놓는 사건으로 이어가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의 원작 제목이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기억이라는 것보단 은밀한 추억이란 제목도 어울릴것 같다.
<포스트 앤드 빔>이라는 단편의 제목도 특이하다. 무슨 뜻이지 했는데 읽다보니 도중에 나온다. 건축양식이다.
주인공 부부가 살고 있는 자랑스런 집의 건축양식인데, 이 독특한 집 안에서 일어나게 되는 약간 다른 일상에 대한 것이다.
일탈이 될 뻔한 부인의 은밀한 관심은 결국 아닌 것이 되었고,
그녀의 사촌이 집을 비운 사이 목을 매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녀의 두려움이 확 사라지는 이 소설의 뒷부분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만 1세 아들을 키우면서 이 부인에 대해 조금 공감하는 것도 있었다.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일상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앨리스 먼로는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잘 이야기를 해주는 좋은 작가이다.
독특한 제목들과 캐나다의 서쪽 밴쿠버와 동쪽 토론토를 오가며 캐나다 구석구석을 안내해주는 앨리스 먼로.
내가 20살에 딱 2주간 여행갔었던 캐나다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었던 책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아름다운 공원이 있었던 밴쿠버의 모습과,
정반대로 혹한의 겨울 얼굴로 맞아주었던 록키산맥과 그 안에서 만났던 사슴들.
그리고 철길을 따라 걸으며 지도를 보며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었던 동부지방의 몬트리올과 퀘백지역까지.
나의 찬란하게 빛났던 청춘의 한 단편이 그녀의 단편들 사이에서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녀가 쓴 글귀의 지명들에서 하나하나말이다.
나에게 추억과 사랑과 결혼에 대해 알려주는 그녀의 단편들. 또 다른 그녀의 이야기를 찾아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길 내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