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줄부터 오싹 소름이 끼쳤다....문장과 문장이 방심을 용납하지 않았다...그렇게 능멸의 서사를 냉정하게 복원해냈다. 완전히 굴복한 자의 처지에서."

소설가 김남일의 평이다.

젊은 작가 김인숙의 '소현'은 조선 역사에서 사도세자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운의 소현세자의 마지막 2년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숨막히도록 차갑지만 뜨겁고 현실적이지만 드라마틱한 묘사가 줄줄이 이어진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끼치지만 눈을 뗄 수 없이 흥미진진하다. 읽어내려가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 고동친다. 느껴지는 비애와 슬픔이 너무 커 눈물이 말라버린다. 책 한권이 주는 압박감이 버거워 헐떡인다.

왜란과 호란, 두 전란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지고 지칠대로 지친  조선의 비루하고 처참한 모습은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어린 세자 소현의 세월과 오버랩된다. 소현세자는 배명 친청 정책을 빌미로 광해군을 밀어내고 인조가 조선의 왕으로 추대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소현은 1636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자 동생 봉림대군 부부와 함께 청의 볼모를 자청한다. 심양에서 조선과 청의 중재역할을 하며 천주교 등의 서양문물에 눈을 떴고 1945년 2월 환국해 같은 해 4월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학질이지만 독살설도 심심찮게 거론된다.

김인숙의 소현은 생각보다 말이 느린, 사려 깊고 조용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의 모습은 고용한만큼 무게를 지닌다. 소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동생 봉림은 생각보다 말이 앞서는 다혈질이다. 오랜 볼모생활로 정복자 청을 향한 그의 분노와 혈기는 깊이를 더해가며 그 안에서 삭아간다. 소현의 오른팔로 비밀스럽고 위험한 임무를 맡았던 질자 석경, 강하고 엄한 아버지 심기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또 대학사 비파의 후처 흔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한다. 포로로 끌려와 황제에게 진상되었다 대학사의 후처로 살아가는 왕족의 딸 흔, 소현과 대학사 사이를 오가며 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조선에서 비천하게 태어나 항상 매맞고 굶주렸던 만상, 역관이 되어 제 잇속 차리는 일이면 뭐든 하는 비정한 사내이나 조선에서 팔려온 막금에게 정을 느낀다. 모두 지극히 현실적이다. 모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이다. 모두 애처롭다.

나 는 '소현'에서 그의 독살설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김인숙은 소현의 가장 힘들었던 세월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조선을 사랑했는지 얘기한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부질없는 것일테지만 상상해본다, 만약 소현이 왕좌에 올랐다면 조선의 미래는 어떠했을지.

'내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이 작은 나라의 비루함이 아니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인간이 지닌 오감이다.

인간의 오감 중 시각에 의존하는 예술이 바로 공간 예술인 미술이다. 시간 예술인 음악은 청각을 자극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술작품은 눈으로, 음악작품은 귀로 감상하고 각각 눈과 귀를 통해서 감동을 느낀다.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 노엘라는 우리에게 그림을 듣고 음악을 볼 수 있다고 얘기한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음악과 더불어 살았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주간한국'에 '음악과 미술의 하모니'라는 주제로 오랜동안 칼럼을 연재한 칼럼니스트이기도 한 노엘라의 신간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이는 순간'은 제목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림을 듣고 음악을 보다니!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예술의 문외한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굵직한 이름들이 나열돼 있다. 미술가와 음악가가 한 쌍을 이뤄서. 예술가 커플들은 비슷한 예술성향을 지녔거나 비슷한 삶을 살았거나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 인상주의 작가인 모네와 드뷔시가 한 쌍을 이뤘고 각기 실천방식은 달랐지만 혁명을 꿈꿨떤 고야와 베토벤이 나란히 자리를 했다. 불치의 병과 치명적인 사고라는 육체적 장애를 가졌던 프리다 칼로와 쟈클린 뒤 프레가, 클래식과 재즈를 넘나들었던 작곡가 번스타인과 클래식의 권위를 벗어던진 팝아트의 창시자 앤디 워홀이 한데 엮였다.

이렇게 짝지어진 둘은 너무나도 닮아 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디테일까지도 찾아낸 노엘라의 감각이 놀랍다. 그녀가 도서관 깊은 곳에서 두툼한 책장의 먼지를 털어내며 보냈을 시간이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비슷한 생을 살았던 동시대 예술가들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이사이 노엘라의 외롭고 힘들었던 유학시절과 그 때 느꼈던 방황과 번뇌, 그리고 힘든 고비를 만날 때마다 그녀만의 재치로 이겨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애틋하고 따뜻한 그리고 치열한 한 예술가의 삶이 묻어 있다. 인간적 따뜻함이 배어 있는 수필집을 선사한 노엘라의 선율은 어떤 색을 지녔을지 기회가 닿는다면 '보고' 싶다.

여러분은 보노보를 아십니까?

보노보란 단어는 내게 생소한 단어였다. 처음 이 책을 접하면서 사회적 기업을 부르는 신조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보노보는 인간, 침팬지와 같은 조상을 가지는 유인원의 한 종이다. 이제껏 인간과 가장 가깝다고 알려졌던 권위적이고 공격적인 남성중심의 부계 사회를 갖는 침팬지와는 달리 평화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모계사회를 이루고 사는 유인원이 바로 보노보다. 언뜻 보기에 침팬지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터라 아프리카 수풀에 숨어 살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당연히 연구 역사 또한 그리 길지 않다. 혹자는 평화주의자인 보노보의 존재가 조금 더 일찍 알려졌더라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의 방향이 완전히 틀려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을 일삼는 파괴적이고 권위적인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닌 서로 보듬어주고 상생하는 평화주의자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가설도 가능했다는 뜻이다. 그랬다면 지구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전쟁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공산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등장한 천민자본주의는 모기지 사태를 시작으로 세계를 뒤흔든 금융위기를 초래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자본주의 시대의 종말을 예견하는 전문가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보노보들'은 아름다운 자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음식물 쓰레기 수거 업체가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운동을 벌이고 원가가 5000원에 달하는 유기농 식단의 가격이 손님 마음 내키는대로 매겨지는 문턱없는 식당이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운영된다. 장애인, 저소득층 청소년, 이주노동자 등 사회 취약계층을 위해 무료로 문화행사와 예술교육을 하는 예술인들이 있다. 물품의 재활용보다 재이용의 개념을 선두에 내세우며 환경 되살림 운동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가게도 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은 아직 한국에 보노보 만큼이나 생소한 단어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틈새시장이며 블루오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보노보들'는  함께 사는 사회라는 사회적 기업들의 모토에 걸맞게 대학생과 전문가들의 합작품이다. 사회적 기업들의 짤막한 역사와 소개글을 시작으로 사업장의 인터뷰와 기업의 강점과 문제개선책 또는 발전을 위한 조언이 담긴 한 두개의 기업분석가 따라 붙는다. 모두 자신의 코 앞의 이익만을 쫓는 삭막하고 각박해져가는 한국사회를 살 맛 나게 해 주는기업들이 모두 모여 있다. 어느 대중 가요의 가사처럼 삐걱삐걱 돌아가는 세상을 한탄만 하던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이들로 이 책은 가득차 있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몫은 어떤 것일까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기업이 희망이다'라는 멋진 기획을 통해 '한국의 보노보들'이라는 책을 탄생시킨 경향신문에 감사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