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나 뱀파이어처럼 현실에서 입증하기 어려운 대상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면 왜 그런지 나는 통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 이야기도 초반에는 그랬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키는 비밀요원이 뱀파이어라니? 친숙하지 않다기보다는 보다 정확히 말해 알게 모르게 기피해온 장르이고 주제라 난감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분량 자체만 약 5백 페이지에 달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술술 읽혔고, 아무리 픽션이라고는 해도 저자가 전직 폭로 전문기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이라크 전쟁은 국제적인 은행가들의 책략이고, 9.11테러는 전부 다 정부의 조작'이라며 미 정부와 중동과의 관계에 대해 묘사한 부분들은 흥미로웠다.

 

이야기의 축에는 뱀파이어 너대니얼 케이드와 야심에 찬 젊은 정치가 잭 베로스가 있다. 둘이 한 조를 이루게 됐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케이드로 인해 콤비의 활약이라기 보다는  뱀파이어 영웅 케이드의 활약극으로 비춰진다. 그런데 저자가 현재 각본가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에 영화화될 것을 지나치게 염두한 건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너무나 미국적인 영웅 스토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심에 선악 대립구조가 단편적으로 진행돼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내가 가장 흥미롭게 지켜본 등장인물은 딜런이다. 등장하는 빈도로 봤을 때 주인공은 아니지만 활약만큼은 대단했던 그는 오늘날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을 그려 낸다. � 많은 아버지 덕에 부와 특권을 누리며 자란 백인 청년 딜런은 단순히 인생의 패배자를 넘어 '악의 무리'와 손을 잡으며 사이코패스이자 (직간접적인)테러리스트가 되고 만다. 그가 그렇게 된 주원인으로 부모의 이혼과 그로 인한 가정불화 그리고 학교 교육의 실패를 꼽을 수 있다. 가정에서 버림받고 학교에서는 퇴학 당한 후 자판기 관리 일자리를 얻은 그는 온갖 불만과 분노에 휩싸이는데 자신이 누렸어야 할 특권을 남에게 다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잔인한 대량 살상 게임에 푹빠진 채, 외국인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소수와 약자에 대해 분노와 적개심을 키워나가던 그에게 어느날 거액을 제시하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전쟁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데 너라고 끼지 말라는 법이 있냐'며 영웅이 되어달라고 꼬드기는 칼레드의 말에 죽은 군인들의 절단된 사지를 빼돌리는 딜런의 모습에서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 전 노르웨이에서 테러를 일으킨 브레이비크의 모습도 보인다. 한쪽에서는 글로벌을 외치며 다문화사회를 표방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제 것을 온통 다 빼앗겼다며 타 인종과 문화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부당한 세상에 복수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 소설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의 미래에 벌어지는 건 아닐까? 지금처럼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공포와의 전쟁'이 될 것이라는 말은 대단히 설득력 있다. 미래상을 그린 영화에서처럼 더 이상 물리적인 무기나 테러가 아니라 지구 밖의 존재라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대상으로부터 갑자기 어떤 형식으로든 공격받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기도 어렵고. 그러고 보면 '뱀파이어가 주인공이 소설이 이렇게까지 현실적일 수 있다니'라던 워싱턴 포스트의 말은 딱 맞는 말이었다.

 

블러드오스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배경도 아니고 집 앞 마당을 비롯해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들로 이렇게 향내 물씬 풍기는 글이 완성되다니! 일상에서 느낀 소소한 감정과 생각들을 풀어낸 것일 뿐인데 그것이 노장의 손끝아래에서 깊이와 향을 더해 하나의 문장과 이야기로 완성되는 것이 새삼 경이롭다. 이것이 바로  '노작가의 연륜'인 걸까? 뽑아버려야 할 것들은 뽑아버리고 한 번 더 만져줘야 할 것들은 한 번 더 어루만져가며 정성스레 마당을 가꾸셨던 것처럼 이 분의 손길 아래 예뻐진 것이 어디 잔디뿐일까? 왠지 허브 향이 나는 것만 같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재차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반복되는 동작 속에 내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불만과 불안이 수그러드는 걸 느낀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던 노작가의 말 속에 담긴 혜안, 그 차분한 어루만짐에 어느 독자라도 잠시나마 가슴이 뛰는 걸 느끼지 않을까? 그래, 박완서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 무엇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성질의 그 '무엇'이 맞는 것도 같다. 나라 안팎에서 들려오는 뉴스라고는 어째 황당하기 짝이 없는 비상식적인 행위들의 무한반복이다. 선생님이 살다 가신 세상"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떠나가신 이후의 세상 역시도 이해할래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렇듯 계속해서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정(주영) 회장은 정 회장답게 고향에 갔지만 나는 내 식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 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신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p. 30)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던 대목에서는 새삼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은 기분, 그 욕구를 떨치기 힘들어진다. 작가, 그것도 시대를 풍미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대작가의 역량을 새삼스레 뒤늦게 추앙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감히 평가하고자 하는 건 더욱 더 아니지만, 이 분이 사용하신 단어 하나 하나와 문장 하나 하나가 왜 그리 부러웠던 건지는 모르겠다. 선생님께서는 이제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하게 화해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괜히 "동지"를 잃은 것만 같은 섭섭함이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선생님께서 그것과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그 두 손 끝에서 나오는 힘으로 인해서 범접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연모와 괴리감을 재확인했기 때문일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겹겹이 쌓여가는 걸 느낀다. 진리와 자유의 공간에서 지적 갈증을 해소하고, 만 권의 책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싶었으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바램과 희망을 빼앗겨 버린 소녀는 우여곡절 끝에 나라를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음에도 '그 때 그 시절 자신이 원하던' 길은 아니었기에 늘 그렇게 저 먼 발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일 수 있었나 보다. '옷이건 그릇이건 도구건 그것이 거기 있다는 걸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만큼만 갖고 있고 싶지 그 이상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 불필요한 것들이 설사 값나가는 물건이라 해도 쟁여놓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된다. (p. 143)' 문득 가슴 싸해지며 이내 눈물이 흐르고 '삶이란 존엄한 건지, 치사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칠 듯한 고통과 번민 속을 헤매게 되는 날도 있었지만...   
 

 

박완서, 못가본길이더아름답다

그런데 여기서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공부든 운동이든 하물며 노는 것이라도 진짜로, 제대로, 열심히 해본 적 있는가. 그 일만 생각하면 머리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일이 있었는가 말이다. (p. 136)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로 무엇을 이뤄내고 싶은지를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고민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갖게 되면 분명 고민한 시간 그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게 된다. 분명한 목표의식은 안일해진 자신을 깨우고 작심삼일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해 줄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p. 83)

독학의권유, 이투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