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편의 단편을 모아둔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또는 주변인물과 소통의 단절을 겪고 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그들을 다르게 규정짓는 힘으로 작용하고, 혼자 툭 튀어나온 못과 같은 신세가 된 그들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본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불편함과 무관심을 이끌어내면서 파국으로 귀결된다.

워낙 그 기괴함으로 이미 유명한 <입체기하학>이나 <가정처방>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가장무도회>에서 헨리의 이모인 미나에게서도 만만치 않은 섬뜩함과 찝찝함을 맛보았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단편집을 두고 읽기 불편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사실이 아니었으면…'하고 바라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을 때로는 작가가 마치 즐기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게끔 덤덤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 역량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주인공들에게 닥칠 불안한 미래를 조심스런 눈빛으로 한껏 걱정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불안을 넘어서며 공포스럽게 결론이 나면서 아마도 강한 적개심과 씁쓸함을 안기는 듯 하다. 

 

여덟 편의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여름의 마지막 날>이다. 특히 거구의 제니는 어렸을 때 본 조니 뎁 주연의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의 엄마를, 그리고 후반부에 강에서 세 사람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는 비운의 뮤지션 제프 버클리를 떠올렸다. 마치 '뚱둥한 여자'라는 라벨이 붙은 상품을 대하기라도 하듯, 사람들은 제니에게 아무렇게나 지껄여대거나 무관심으로 응대하다가도, 그녀가 베푸는 모든 혜택은 당연하다는 듯 누린다. 그런데 이 모든 상처에도 제니는 마치 '여러분들에게 상처받지 않도록 제가 노력할게요. 제 몫이니까요.'라며 다짐이라도 하듯 사람들의 냉소에 과도한 친절과 웃음으로 대답하고, 행복과 슬픔이 뒤섞인 늙고 목이 쉰 여인의 목소리로 늘 같은 노래를 흥얼거린다. 레드 제플린의 'Whole Latta Love'를 흥얼거리며 깊은 강 밑바닥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제프 버클리처럼, 제니 역시 '그날'도 평소 즐겨 부르던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큰 소리로 웃어보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강은 그것조차도 거칠게 삼켜버린다.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강둑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허망해 보였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벽장 속 남자와의 대화>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경험하기 전까지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가장무도회>의 미나는 혼자일 때조차도 자신은 관객들 앞에 있다며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의식했다. <입체기하학>의 부부나, <나비>의 '나'와 소녀를 비롯해 여덟 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정체성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나'의 모습이고,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과거에 대한 묘사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폭력으로 점철시키는 그들의 무의식은 선뜻 다시 책을 펼치고 싶지 않을 만큼 불쾌하고 때로는 섬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천재 작가의 '실험적인' 초기작을 훔쳐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사십 년 전에 이 작품을 발표한 저자에게 Ian Macabre(소름 끼치는 이안)라고 별명을 붙이고, '악마처럼 글을 쓴다'고 평하던 저널리스트들의 말처럼 여덟 편의 이 작품들은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여전히 충격적이고 강렬한 '문제작'이 맞는 것 같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 아침 남편이 여느 때와 같이 커피를 올리고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남편이 어서 식탁에 앉으라고 부르질 않는다. 남편이 죽었다 소파에 앉은 채. 

 

 

이 이야기는 오십 년이 넘도록 함께 살아온 남편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감당해야 하는 어느 여인의 하루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정해진 의무를 다하며 살던 아내의 하루에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이 찾아오면서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의 평온함이 깨져버렸다. 첫사랑이고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이고, 한때는 자신을 두고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우며 속을 썩이기도 한 모진 사람이지만, 결국 오십 년을 함께 해온 오랜 벗이자 생의 동반자였던 남편의 죽음 앞에서 누구에게도 부고를 알리지 않은 채 지난 세월 가슴 속에 숨겨왔던 이야기를 마침내 털어놓는다는 내용이 주다. 추운 겨울 눈이 내린 어느 이른 아침과 마지막 공기를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뿜는 커피머신에서 퍼지기 시작하는 은은한 커피 향, 그리고 주인 잃은 슬리퍼 두 짝이 노년기의 사랑과 이별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완벽한지 새삼 감탄하게 된다.  

 

오십 년이 넘도록 함께 살아온 알리스와 쥘의 사랑은 '당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당신에게서 달아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를 떠올린다. 남편을 사랑한 만큼 미워할 수밖에 없던 아내가 남편의 생명의 불꽃이 꺼지고 나서야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설정은 얼마나 기구한가. 여느 때처럼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커피까지 준비해놓고, 정작 마지막 인사조차 없이 황급히 먼 길을 떠나버린 남편을 두고 허망함을 감출 수 없는 아내는 추운 겨울날 슬리퍼도 신지 않고 가 버린 남편이 너무도 애처로워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채 고인에게 슬리퍼를 신겨주는데 이 장면은 오열하는 만큼이나 슬프고 그 애잔함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요 인물은 쥘과 정해진 시간에 체스 게임을 두던 자폐아 이웃 소년 다비드로, 아이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틀을 따르고' 새로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쥘의 죽음을 경계로, 세 사람의 일상에 커다란 균열이 일고, 낯선 두려움은 예의 그 익숙함을 압도하지만, 그들의 일상은 변해야만 하고, 익숙함은 새로움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이때, 쥘과 다비드의 체스 시합이 주는 비유와 상징도 놓칠 수 없는데, 체스가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이고 체스 시합 자체와 각각의 말이 주는 상징적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거부감을 갖는 다비드의 엄마는 급한 사정이 생겨 알리스에게 아이를 맡기면서 말한다. "힘드실지도 몰라요. 다비드에게 익숙한 시간이 아닌 데다 다른 사람이랑 체스를 두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궁하면 통하겠지요.(p.38)" 평생의 동반자를 갓 잃어버린 알리스의 삶도 체스 상대를 잃어버린 다비드의 삶과 상통한다. 긴 시간을 함께 공유한 이와의 이별이니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또 극복하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고, 늘 함께 해온 존재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 역시도 알리스에게 익숙할 리 없다. 하지만 쥘은 이제 가고 없더라도 알리스의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이제부터 커피를 직접 올려야 하는 것처럼, 쥘이 해온 것들을 하나 둘 그녀의 힘으로 직접 해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남은 자의 몫이므로. 

 

마지막 하루 동안 쥘은 알리스에게로 고스란히 흘러 들었다. 잊고 싶지 않은 그와의 모든 기억, 사랑했던 날들은 물론이고 사랑보다 애증이 더 컸던 지난날의 순간들 역시도 알리스는 그렇게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둔다. 아내를 위해 커피를 올려놓고 소파에 앉아 그렇게 평온한 모습으로 세상을 등진 쥘은 커피의 진한 향으로나마 자신의 못다 한 이야기를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아래 리뷰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1950년대 말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판이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데다,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은 스물 두 살 동갑내기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를 주인공으로 한다. 서로에 대해 아직 잘 알지 못하기에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둘은 사랑하는 감정에 충실해 서로를 배우자로 맞이하고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신랑이 된 에드워드는 첫날밤에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도 오매불망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데, 아내 플로렌스는 남편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의 안 좋은 기억으로 성관계 자체를 강하게 혐오하고 있다. 첫날밤의 팽팽한 긴장이 압도하는 가운데, 혐오감과 공포감을 이기지 못한 플로렌스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면서 둘의 관계는 허망하게 끝이 나버리고 만다. 

 

사랑하던 남녀가 헤어지고 나서, 가장 흔히 하는 행동은 '그때 내가 그 행동을 했더라면(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하면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한때의 순간을 책망하거나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남녀가 수백 가지의 작은 사건이나 선택에 힘입어 만나게 되고, 급기야 상대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에 화려하게 재정립시키지만, 그토록 기적적으로 만난 두 사람을 갈라서게 하는 것이 찰나의 행동이나 말 한마디라는 건 참으로 아픈 사실이다. 게다가, 서로에 대해 오해한 채 헤어지는 경우, 감정을 회복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긴 시간이 요구되는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섭섭함이나 분노가 너무도 커져 내 안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상대를 사랑한 만큼 이해하려고 노력했더라면 둘의 관계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드레스 지퍼를 내리는 일에도 요령이 있다. 작가는 '드레스 맨 윗부분을 붙잡고 지퍼를 내려야만 얇은 천이 쭈글쭈글 뭉쳐서 걸리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어수룩하고 서투르기만 한 남자는 그것을 모르기에 그저 한숨을 내쉬며 억지로라도 지퍼를 내리려고 무작정 세게 잡아당기기만 하니 여자는 그 아래서 두렵고 답답해하며 발버둥칠 수밖에.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제대로 이해시키지도 못하고, 그런가 하면 상대의 감정에 자신이 충분히 공감하지도 못한채 그저 '사랑해'란 말만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이 완전하다고 믿어온 이 서툰 남녀처럼 무작정 어떠한 결과만을 기대하고 또 기다리면서 그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이나 감정을 무시하고, 그것들이 있기까지 반드시 요구되는 시간의 길이나 성숙함의 정도를 과감히 생략해버린다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릴 수 있다. 사랑이 귀하고 어려운 이유는 예기치 않은 때와 장소에서 소리 없이 다가와, 더러는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 아닐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주인공 에드워드는 깨닫는다. 자신이 평생토록 사랑했던 사람은 플로렌스뿐이었다고. 그때 체실 비치에서 그녀와 그렇게 헤어지지만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생을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고. 물론 그의 말대로 그랬을 수도 있고, 또는 그 반대였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날 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또 그 때 그 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양보하고 노력했다고 해서 에드워드의 삶이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설명하는 데 단 일 분도, 반 페이지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무미건조한 삶이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보따리와 같은 다채로운 삶이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과거 특정 시점에서의 선택과 그 선택이 열어줄 수많은 가능성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게 인간의 특성이 아니던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곱씹는,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린 에드워드의 모습이 익숙해서일까, 머릿속을 맴도는 어지러운 생각의 파편들이 한데 뒤섞인 채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를 위한 것인지 오롯이 내 것인지 그마저 헷갈려버리고 만다.

 

 

에릭 베네가 부른 노래 중에 'We Could Have Been'이란 제목의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제목부터가 벌써 그렇지만 가사가 말하고자 바는 가가 그렇듯, 마치 이 책의 OST라도 될 것처럼 이야기와 잘 어울린다. 'Could it be we had a chance if we just tried again? It's the hardest thing to face. It's like never knowing how the story ever ends. And I'll never know just what we could have been…'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pp.197-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