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영상과 음악이 마음에 들었던 영화가 소설보다는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20년간 이어진 약 7백 페이지의 사랑 이야기는 그 애틋함이 내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기에는 너무 길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닉 혼비의 극찬에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때에 비해 몇 권의 소설을 연속해서 읽은 데다, 최근 들어 영화까지 너무 많이 봐서 다른 소설이나 영화보다 비교적 울림이 작았던 걸까? 다만, 20년이라는 그 긴 세월 동안 영국 사회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와 직업, 더 나아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찾기까지 분투하는 과정과 연애를 하고 가정을 갖고 중년이 되기까지 으레 감당해야 할 뜨거운 여정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엠마와 덱스터의 길고 긴 인연은 그저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정의내릴 수가 없다. 단순히 이성 간의 관계가 아니라 피를 나눈 가족과도 같았고, 어떤 때에는 가족, 그 이상의 존재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잔뜩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떠오르는 얼굴이었고, 밤늦은 시각에 목소리가 듣고 싶던 그런 존재였는가 하면, 견딜 수 없다며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도 기꺼이 옆에 있어준 그런 고마운 존재였고, 즐거울 때나 힘이 들 때나 언제나 '나'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들려 주고 싶은 상대였다( '나'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들려 주고 싶은 인물은 대체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둘은 몰랐나 보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제2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엠마와 덱스터는 자기 마음속에 상대가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지, 자신의 감정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것이 이들의 문제였다. 물론 덱스터보다야 엠마가 상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일찍부터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어려운 생활 형편과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오래 고민해야 했던 자존심이 센 엠마로서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가 결코 쉬울 수 없었고, 애써 표현하더라도 늘 운명의 장난처럼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서로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을 제외한 주변인물들의 반응이다. 흔히 우리나라 TV 드라마가 그러하듯, 티격태격하는 주인공 남녀는 언제나 둘의 잦은 대립의 근본적 원인을 가장 늦게야 알아차리질 않던가? 이 책에서도 보면, 두 사람을 제외한 인물들은 둘의 남 다른 관계를 질투하지 않을 수 없고, 때로는 둘의 관계에 대해 직접 말해주기도 하지만, 엠마와 덱스터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정확히 깨닫고 그것을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사랑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타이밍이 결말을 좌지우지하는 것 중 하나다. 둘이 함께 공유한 그 숱한 기억들은 물론이고, 소심한 짝사랑녀의 애끓는 청춘이 고스란히 담긴 길고 긴 편지가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아, 물론 발신인의 애틋함을 간파하지 못하는 수신인의 무딤도 절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그날 밤 덱스터가 그 편지를 넣어둔 <하워즈엔드>를 술에 취해 쿠션 밑에 두고 오지만 않았더라면, '널 사랑해왔지만 앞으로는 더 이상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눈물을 보이던 그날의 엠마를 덱스터가 그냥 따라가기만 했더라면  둘의 관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와 에단 호크의 <이토록 뜨거운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체실 비치에서>의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만큼이나 사랑에 서툴렀고 <이토록 뜨거운 순간>의 사라와 윌리엄만큼이나 위태로울 만큼 뜨거운 청춘, 엠마와 덱스터 두 사람 역시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처럼, 그렇게 사랑했고 또 사랑하지 않으려 했다.

우리나라 영화들이 선전하고 있는 요즘, 예상만큼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이 불운의 영화는 제목이 긴 데다 낯설기까지 해 흥행에 어려움을 겪는 듯하다. silver lining은 구름의 흰 가장자리를 말하는데, '불행 속의 한 줄기 희망'이란 뜻이고, playbook은 각본이란 뜻과 미식축구에서 팀의 공격과 수비에 대한 전술이란 뜻을 가진다. 이 책에서는 불행한 두 남녀가 한 줄기 희망을 찾기 위해 펼치는 전술 또는 전략이라고 보면 적절할 듯하다.

주인공 팻과 티파니는 사랑으로 인한 아픔을 겪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팻이 열렬히 사랑한 아내 니키는 동료 교사와 외도를 했고, 티파니의 남편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신적 외상이 큰 가운데,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를 비롯해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던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게 된다는 내용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기만 했던 그들의 고된 삶에 비친 한 줄기 희망은 결국 그들 자신이었던 셈인데 영화나 책이나 그 과정을 유쾌하게 잘 풀어냈다.

주인공 팻은 35살이다. 아내를 사랑한 만큼 외도에 충격을 받았고 정신병원에서 4년이란 긴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그의 삶은 35세 성인 남성에게 이 세상이 바라고 또 요구하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도 깊었던 그는 이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 같은 삶을 꿈꾸고, 비극으로 끝나버린 문학작품을 남긴 불후의 작가들마저 죽이고 싶을 만큼 꼴도 보기 싫다. 주인공이라면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록키처럼 벌떡 일어났으면 좋겠고, 사랑하는 남녀에게 그 어떤 시련도 없이 그냥 "그 후로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해피엔딩을 바라지만, 실제 그가 살고, 니키가 살고, 티파니가 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과정이나 엔딩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시련을 겪고 4년 만에 '진짜 세계'와 맞딱 드리게 된 팻은 그가 속한 세상이 전혀 녹록지 않다는 것과 그렇다 해서 무작정 그것을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배워가며 성숙해진다.   

'그 사건'을 겪기 전까지는 좀처럼 문학작품을 읽지 않았던 팻은 정신병원에서 나온 후로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쳤던 니키를 생각하며 미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작품들을 하나 둘 읽기 시작하는데, 시대를 뛰어넘어 칭송받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니키가 좋아하는 그 작품들이 하나같이 비극이라서 충격을 받게 된다. 비록 영화에서는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만 나왔던 걸로 기억되지만, 소설 속에는 여러 작품이 등장한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에 이르기까지 미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작품들을 줄줄이 읽은 팻은 "왜 이런 비극을 읽어야 하냐!"며 울분을 토해낸다. 그러나 클리프의 말대로 우리는 삶이란 것이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만 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silver lining - 출처: Google Images 

국내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상처를 안고 좌절한 나의 동년배들의 성장을 담은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사랑으로 인한 깊은 좌절로 어느새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도 멀어진 그들이 서서히 관계를 회복해가는 과정도 감동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사랑에 데일 만큼 데인 팻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툭하면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아내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안타깝다. 물론 팻은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그가 지금 니키에게 품은 감정의 실체는 그가 믿는 것처럼 아내를 향한 여전한 사랑이나 그리움은 아닐 것이다. 둘이 함께 행복했던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고, 정신병원을 들어가기 전의, 그러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던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갈망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일자리도 빼앗기고, 집이 없어 부모에게 얹혀 살아야 하는가 하면, 근사한 레스토랑도 아니고 동네 작은 레스토랑에서조차도 편히 식사를 할 돈도 없는 상황, 이런...  근데 더는 20대가 아니며 조금만 더 있으면 40대가 되는 나이라니! 주변 사람들의 안정된 삶을 보며 팻과 니키가 맛봐야 했을 그 감정들을 생각하면, 이 고단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silver linings'를 믿은 둘이 대견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를 이겨내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보자니,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맞는 것도 같다. 팻은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운 아내에 대한 감정을 4년이 지난 지금도 정리하지 못하는 바람에 자신의 현재마저 과거로 인해 희생시키고 있다. 반면,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만 티파니는 죄의식과 자책으로 실수했을 지언정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재활의 의지를 불태운다. 그래서 티파니는 팻에게 늘 적극적이었고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어했고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도 아물기를 바랐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오직 사랑으로만이 치유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화하면서 원작과 달라진 부분이 많은데, 책은 책 나름의 재미가, 또 영화는 그 나름의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한 점은 배우들의 열연과 음악이라 생각한다. 이번 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제니퍼 로렌스는 얼굴이 예쁜 여배우라기보다는 매력이 많은 여배우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서 그녀에 대해 검색해보았지만, 활짝 웃는 미소, 건강한 이미지, 그리고 털털함은 보는 이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강한 마력을 가진다. 또, 팻 역을 맡은 브래들리 쿠퍼도 그렇고, 티파니 역의 제니퍼 로렌스도그렇고, 팻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분한 로버트 드 니로와 재키 위버 모두 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인물을 맛깔스럽게 잘 살려냈다. 또, 인물의 입장이나 사건을 잘 대변해주는 곡들로 채워진 OST도 훌륭하다. 참고로, 팻을 분노하게 만들던 문제의 음악이 책에서는 케니 지의 Songbird였으나 영화에서는 스티비 원더의 My Cherie Amour가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댄스 대회에서 두 사람은 스티비 원더의 'Don't You Worry 'Bout a Thing'으로 원하던 목표를 이루게 된다.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게 만들던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결국 과거에서 한 발짝 나아가게 해준 희망의 목소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필라델피아 이글스 미식축구팀은 물론이고 팻이 입고 다닌 저지jersey의주인공 Hank Baskett과 어린 시절 팻의 우상이었던 안드레 워터스Andre Waters에 대해서도 검색해 보았다. 아마, 미식축구에 관심이 좀 더 있었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Hank Baskett

"Ahhhhhhhhhhhhh!"

"E!-A!-G!-L!-E!-S! EAGLES!"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인터넷 과학신문 <더 사이언스>에 연재된 에세이를 간추려 엮은 책이다. 과학은 내가 가장 싫어한 과목이었는데, 더 솔직히 말하면 싫다고는 하지만 정작 '왜' 싫은지는 말할 수 없는 과목이었다. 어렵다고는 하나, 어디가 어떻게 어려운지를 알아야 하는데 무작정 피하기만 하니 무엇이 어떻게 어려운 줄도 모른 채, 계속 '어렵다, 어렵다'란 말만 반복해온 탓이다. 막연히 어렵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 가까이 가지도 못했고, 가기도 싫어했던 그 오랜 서먹한 관계를 조금이나마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읽은 책이다.

<과학 콘서트>의 저자로도 이미 유명한 정재승이나 이 책의 저자인 강석기처럼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은 대중들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대중이 두려움 없이 자발적으로 찾아 읽을 수 있도록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를 덜 무겁고 덜 딱딱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고, 다른 누구보다도 그들이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과학 커뮤니케이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냄은 물론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아메리카노에서 카페 마키아토에 이르는 총 여덟 잔의 커피와 과학계의 핫 이슈에서부터 과학자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관련된 여덟 개의 주제를 접목했다. 내용 면에서 연관이 있다기보다는, 주제별로 분류시킨 여덟 개의 챕터를 각기 다른 여덟 잔의 커피의 특징, 그 이미지와 연관시킨 셈이다.

놀랍게도 저자는 일부 일러스트는 직접 소화해내기까지 했다. 그것도 아주 수준급으로. 저자가 이 글을 연재할 적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문체를 다듬고 또 다듬은 게 느껴지고, 사진과 삽화들도 적절하게 배치돼 있다. 정말 헤밍웨이가 와서 당장이라도 노트와 연필을 꺼내 글을 쓰기라도 할 것처럼, 정성껏 콩을 볶아 맛 좋은 커피를 대접하는 카페에서 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기분이랄까, 책을 읽는 내내 독자를 위해 많은 걸 준비했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흐뭇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본 챕터는 아무래도 조그마한 문틈으로나마 유명한 과학자들의 생애를 들여다 볼 수 있었던 Part 2와 4였지만, 다른 챕터들 역시 실생활에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사항이나, 의문을 갖지도 않고 그저 당연히 받아들여 온 것들에 대해 짚어 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유익하기까지 하다. 가령 예를 들어, 다이어트라거나 여자들의 메이크업, 백열전구와 연탄, 그리고 술이나 카제인나트륨에 관한 내용들 말이다.

예전에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을 보면서 에드윈 허블에게 큰 관심을 두었었다. 트렌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잘생긴 부잣집 아들인데다, 똑똑하기까지 했던 (아마도 최초이자 유일한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천문학자가 아니었을까?) 그는 당대의 유명인사들과도 교류가 많았다. 이 책에서도 허블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과학자들을 여럿 만날 수 있는데, 퀴리 부인의 경우 노벨화학상을 못 받을 뻔할 정도로 위험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새삼 충격적이면서도 강렬했고 또 '침팬지의 어머니'로 널리 알려진 제인 구달과 그의 두 번째 남편 브라이슨의 이야기도 의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외 리처드 파인만과 라마누잔, 리제 마이트너, 우장춘 박사 등의 생애도 쉽게 잊힐 만한 이야기들은 아니다.